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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짐=조형규 기자]바야흐로 자전거 전성시대다. 한강변을 따라 잘 정비된 자전거길을 달리는 무수한 자전거들을 보면, 도대체 이 많은 라이더들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새삼 궁금해진다.

그중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로드 사이클이다. 현재 자전거 시장의 트렌드를 이끌고 있으며, 온로드에서 빠른 속도로 주행이 가능한 대중적인 바이크다. 또한 미니벨로, 하이브리드 등 아기자기하고 예쁜 디자인의 자전거도 있으며, 최근 웹툰을 통해 인기를 끌고 있는 픽스드 기어 바이크도 종종 눈에 띈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증가한 자전거 동호인들의 인구에 비해서, 정작 자전거를 다루는 스포츠 종목에 대한 관심은 턱없이 부족하다. 현재 대세를 이루고 있는 로드 사이클도 이러한 상황을 면치 못하는데, 자전거 시장에서도 가장 비주류에 속하는 다운힐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꾸준히 저변을 넓히고 업계의 수준을 끌어올리려는 시도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창용은 바로 비인기 종목인 다운힐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8년간 국내 다운힐 부동의 랭킹 1위를 고수하며 기술적인 발전을 선도한 라이더다. 2010년 아시아 선수권 다운힐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한 그는 3년 전 현역 국가대표에서 물러났지만, 최근에도 국내 최초로 다운힐 바이크 백플립 기술을 성공시키며 대한민국 다운힐의 역사를 스스로 써 내려가고 있다.

대한민국 부동의 넘버원 다운힐 라이더 이창용을 경기도 의정부 녹양역 인근에 위치한 야외 MTB 파크에서 만났다.


■ 다운힐 라이더로서의 새로운 동기부여···중국 무대에서 새로운 도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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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MTB 다운힐이 생소할 분들을 위해 소개 부탁한다.
2010년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3년 전까지 MTB 다운힐 국가대표를 지낸 이창용이라고 한다. 비인기 종목 중에서도 가장 비인기라고 할 수 있는 다운힐만 18년째 타고 있다(웃음).

개인적으로도 만나게 되어 영광이다. 이제 현역 국가대표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며 여전히 각종 대회에도 참가하고 있는 최고의 현역 라이더다. 최근 근황은.
올해부터 중국 쪽 대회를 많이 참가하고 있다. 지난 11월 말에도 중국에서 있었던 포크로스[1] 시합에 출전했다.

성적은 어땠나.
사실 파크에서 뛰는 경기는 경험이 거의 없었다. 포크로스도 굉장히 취약한 종목이었고. 그런데 경험 삼아 출전한 대회에서 2위를 기록했다. 물론 파크 경기는 성적 확인도 못할 정도로 하위권이었지만(웃음).

너무 겸손한 것 아닌가. 약점이라고 해놓고선 2위로 들어오고(웃음).
사실 포크로스라는 종목이 출발 위치부터 스타트 타이밍까지 운이 꽤 작용한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스타트가 굉장히 약한 편이라 이번 시합에서는 '스타트가 약해도 어느 코너에서 어느 선수를 막을 수 있을까'같은 관점으로 접근했다. 그런데 마지막 결승에서 같이 뛰었던 프랑스 선수들은 신체조건도 좋고 너무 빨라서 내가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웃음).

그래도 좋은 경기를 펼쳤다. 시간이 조금 지나긴 했지만 느낌은.
일단 내가 시도한 기술들은 모두 성공했기 때문에 스스로 만족하는 경기였다. UCI(국제사이클연맹)에서 초청된 프로 선수들도 있었고, 잘 타는 라이더들과 경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큰 동기부여가 된다. 새로운 과제들도 덩달아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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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자체는 어땠나. 올해부터 중국 쪽 경기들을 활발하게 참여하면서 느낀 점도 많았을 것 같은데.
일단 파크 경기 자체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수준이 높다. 점프 높이, 에어 트릭 등 많은 부분에서 비교가 안 된다. 중국뿐 아니라 대만, 프랑스 등 각지에서 많은 선수들이 참가하고, 질 높은 경기만큼이나 관중들도 많다. 시작은 우리나라보다 늦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확실히 한국보다 더 큰 무대다.

사실 국가대표에서 물러난 이후로는 아무래도 현역 시절에 비해 대회 참가 숫자가 많지 않았는데 올해를 계기로 조금 바뀔 수도 있나.
한국에서는 직장 생활하면서 정작 선수로서는 조금 지루함을 느끼던 차였다. 사실 말이 좋아 선수지, 국내에서는 경기에 참여해도 관계자들에게 인사 드리러 다녀야 하고 상하 수직적인 관계가 강하다. 그런데 중국 대회를 경험하고 나니 경기 규모나 운영, 문화, 초청선수 등 여러 분야에서 느낀 점이 많다.

정확히 어떤 점인지 설명해줄 수 있나.
중국에선 선수와 관계자 간의 대화가 자유롭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여건이 잘 조성됐다. 내게도 다음 시합에 또 올 거냐고 물어보기도 하더라. 선수로서 경기에 참가한다는 메리트를 느꼈고, 선수 생활에 활력을 찾았다.

그렇다면 내년에도 중국 대회 출전을 기대해볼 수 있나.
보통 대회에 한 번 참가하기 위해선 최소 100만 원 이상의 경비가 소요되는데, 다행히 중국 쪽 매거진에서 내년에도 4회 정도 초청을 하겠다고 지원이 왔다. 나에게는 새로운 놀이터가 생긴 셈이다. 덕분에 없는 시간 더 쪼개서 자전거를 더 타고, 웨이트트레이닝도 지속적으로 해야 할 것 같다.


■ 쇄골뼈와 맞바꾼 프리라이드 바이크, 이창용을 다운힐의 세계로 인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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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동안 다운힐을 탔다. 지금이야 눈곱만큼이라도 인구가 생기긴 했지만, 그때는 정말 불모지였다. MTB는 어떻게 입문하게 됐나.
어려서부터 자전거를 굉장히 좋아했는데, 또 정말 잘 잃어버리곤 했다. 심지어 부모님이 자전거를 사주신 지 2주 만에 잃어버린 적도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모님이 통 크게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다'라고 하시며 또 자전거를 사러 간 거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매장에 있던 60만 원 짜리 MTB가 딱 눈에 들어온 거지(웃음).

90년대 아니었나. 지금이야 고가의 자전거도 많고 사람들 인식도 많이 바뀌었지만 그 당시에는 초등학생에게 60만원 짜리 자전거를 사주신다는 게 정말 어마어마한 사건이었을 텐데.
98년도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도 쉽지 않았을 텐데 부모님께서 정말 큰맘 먹고 사주신 것 같다. 마침 매장에서도 꼬마가 비싼 자전거를 사니깐 '주말에 라이딩 하는데 한번 나와볼래?'라고 권하더라. 그렇게 라이딩도 자연스럽게 같이 따라갔다.

용감한 꼬마였군(웃음). 그때 같이 라이딩을 간 그분들은 뭐라고 하시던가.
처음부터 내가 겁도 없이 내리막길을 타는 걸 보시더니 "다운힐 타면 잘 하겠다"고 하더라. 그 뒤로 아는 형이 라이딩 갈 때 같이 따라갔다가 다운힐 타는 모습을 보고 너무 멋있어서 단번에 매료됐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보다도 다운힐 인구가 없었고 바이크도 700~800만 원을 호가해서, 그냥 무식하게 하드테일[2]을 안장만 낮춘 상태에서 탔다.

하드테일에서에서 본격적으로 다운힐을 타기 위한 풀 서스펜션 바이크[3]로 넘어간 건 언제쯤인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자전거를 타다가 쇄골뼈가 부러진 적이 있다. 그때 보험료가 많이 나왔는데, 내가 부모님께 당당하게 "내가 다쳐서 나온 돈이니 그걸로 혹시 자전거를 사면 안 될까요"라고 말을 해버린 거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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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꼬마에서 겁 없는 청소년으로 진화했다(웃음). 그래서 어떻게 됐나.
다행히 부모님께서 고심 끝에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그렇게 산 프리라이드 바이크 하나로 아는 형들과 같이 '어떻게 하면 빨리 탈 수 있을까?' 같은 고민을 하면서 무작정 뛰어보고 점프도 될 때까지 했다. 딱히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는데, 그렇게 단순하게 자전거를 가지고 논게 지금 생각해보면 기초에 많은 도움이 됐다.

그렇다면 본격적인 선수 생활은 언제부터 시작하게 됐나.
그렇게 자전거 타면서 고등부 경기를 나가기 시작했는데, 물론 선수층이 얇기도 했지만 꾸준히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2학년 막바지 즈음에 출전한 인디페스티벌 제1회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2003년에 열린 역사적인 첫 대회의 우승자 아닌가(웃음).
사실 그때 내 자전거가 부서진 상태였다. 그래서 다른 선수의 다운힐 바이크를 빌려 일반부 경기에 출전했는데 그게 우승으로 이어졌다. 마침 운 좋게도 당시 현장에 자이언트(Giant)사의 자전거 수입을 담당하는 분이 내 경기를 보고 나서 스폰서가 됐고, 그 후로 자이언트사의 모델을 타면서 자연히 선수 생활로 이어졌다.

크게 바뀐 점이 있다면.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선수 생활을 하면서도 크게 바뀐 점은 없었다. 그때도 선수로서 타기보다는 여전히 즐기면서 탔다. 심지어 대학교 진학도 자전거 특기로 간 게 아니라 그냥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갔다. 덕분에 대학생이 돼서도 수업 땡땡이치고 자전거 타러 많이 다녔지(웃음).

그렇게 수업에 빠져가면서까지 자전거를 타러 다닌 곳은 주로 어디였나 (웃음).
집은 익산인데 대학교는 전주에 있었다. 그쪽에 건지산이라고 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그 라인 옆으로 500m씩 계속 돌면서 연습했다. 그리고 다운힐도 다운힐이지만 크로스컨트리도 많이 탔다. 주로 오전에는 크로스컨트리, 오후에는 다운힐, 야간에는 어반 바이크 이런 식으로.


■ 비주류 종목의 고충···첫 국가대표 선발과 열악한 국내 다운힐 시장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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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국가대표로 선발된 건 언제였나.
2003년에 처음으로 국가대표가 됐다. 그때는 자전거를 더 잘 타고 싶은 욕심이 컸다. 그게 한창 절정이던 2006년에는 1년에 거의 10개 이상의 대회에 출전해서 9할 이상을 매번 1위를 기록했다. 아시아 선수권 대회도 나가고, 그러다가 다음 해인 2007년에 입대했다. 전역하고 나서도 여전히 자전거가 좋아서 계속 타다 보니, 2년 정도 지나니깐 다시 상위권 랭킹으로 올라가게 됐다.

잘 알고 있다. 당시 거의 7~8년 동안 이창용 선수가 독보적인 국내 다운힐 랭킹 1위 고정 아니었나(웃음). 혹시 선수 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대회가 있다면.
아무래도 2010년 아시아 선수권 대회가 가장 크다. 정말 연습을 많이 했고 경기 내용도 지금 생각해보면 꽤 괜찮았던 것 같다. 중간에 실수도 있었는데 그걸 빠르게 회복해서 금메달을 땄으니 만족했다. 그런데 반면 결과가 안 좋았던 경기들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안 좋았던 경기라면?
예전에 청송에서 열린 대회에 출전했었는데, 한 경기에서 무려 네 번을 넘어진 적이 있다. 정말 아쉬웠던 경기였는데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작년 무주에서 열린 포크로스 경기도 좋았다. 그때는 결승에서 2등으로 출발했다가 막판에 치고 들어가서 역전으로 1위를 기록했는데, 안 될 거라 생각하면서도 미친 척하고 시도해서 성공했을 때의 쾌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역시 다운힐은 미쳐야 잘 탄다는 말이 사실이다(웃음).
정확하다. 실제로 다운힐 라이더 사이에서는 소위 '더 미친놈이 더 잘 탄다'는 개념이 있다. 어릴 때 내가 자주 했던 것 중 하나가, 형들과 같이 타면서 드롭 거리를 조금씩 늘려가는 것이었다. 안될 것 같은데 내가 성공을 하니깐 형들이 자꾸 더 먼 곳으로 위치 지정해주고 시키더라(웃음). 그리고 반사 신경과 리듬도 중요한데 다행히도 내가 춤은 못 춰도 박자 맞추는 건 잘 하는 편이다.

그런데 그렇게 겁 없이 타다 보면 부상도 많이 달고 있을 것 같은데. 애초에 다운힐이라는 종목 자체가 상당수의 선수들이 다들 몸에 철심을 몇 개씩 박고 산다고 하지 않나.
내 경우 가장 큰 부상은 골절이었다. 양쪽 쇄골 뼈를 모두 수술했는데, 심 박고 다시 빼고 그런 식으로 병원을 자주 다녔다. 그리고 가벼운 기억상실도 다섯 번 정도 있었다. 헬멧을 써도 넘어지면서 세게 부딪히면 어쩔 수 없다.

전혀 가벼워보이지 않아서 걱정된다. 부상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는지.
다행히 그 외에 심각한 부상은 없었고, 고통에 둔감해진 것도 두려움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됐다. 통증을 참는 것도 점차 면역이 생기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고통을 즐기게 된 것 같기도 하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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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도 부상이지만 다운힐이라는 비주류 종목 선수로 느낀 고충과 현실적인 벽 등의 문제도 컸을 텐데. 그 부분은 어떤가.
역시 가장 어려운 건 금전적인 부분이다. 국내 대회를 한 번 출전하더라도 연습 기간부터 장비 및 소모품을 따져보면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스폰서는 오직 자전거에 대한 부분이고, 보호 장비나 타이어 같은 소모품은 모두 개인 부담이다. 그 부분이 가장 큰데, 어릴 때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비용 마련하고, 대회에서 상을 받으면 그 부상 팔아서 비용을 충당하기도 했다. 지금도 월수입의 30%에 가까운 돈을 대회 출전에 쓰고 있으니(웃음).

하드테일을 주로 타는 XC(크로스컨트리) 국가대표들처럼 지원을 받는 건 없나.
XC는 대한체육회 소속이라 상위 랭커들은 지원을 받는다. 하지만 다운힐은 그런 거 없다. 다들 본인 돈 써가며 대회 준비하고 참가한다. 지금까지 자전거를 타면서 비용의 98%는 모두 내 주머니에서 나갔다. 게다가 이제는 가정도 있다 보니, 부담이 되는 건 여전하다.

정말 열악한 환경인데. 도저히 선수가 나올 수 없는 구조다.
국내 다운힐 선수층이 얇은 이유 중 하나다. 현재 국내에서 다운힐 선수들이 안정적으로 운동을 할 수 있는 제반 기초가 전혀 갖춰져 있지 않다. 내가 다운힐을 처음 시작하던 18년 전 당시와 현재의 환경이 전혀 달라진 게 없다.

안타까운 이야기다. 사실 자전거가 많이 보급되고 이제는 트렌드에서 일상으로 자리 잡았지만, 대부분이 로드 사이클에 한정된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느끼는 아쉬움은 없나.
일단 MTB 하면 많은 사람들이 하드테일만 떠올리고, 주로 어르신들이 한강에서 편하게 타는 자전거라는 인식이 크다. 젊은 사람들은 주로 로드 사이클이나 미니벨로, 픽시 같은 깔끔한 자전거를 선호하는데, 아무래도 다운힐은 산 한번 타고나면 지저분하고 자전거도 무겁고 하니깐(웃음). 그런 인식이야 아쉽지만 사실은 MTB를 탈 수 있는 곳 자체가 없다는 점에서 오는 문제라고 본다.

굉장히 공감 가는 이야기다. 국내에서는 MTB를 끌고 산으로 가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의 시선도 그렇고.
점차 탈 수 있는 곳이 줄어든다는 점이 MTB 인구 감소의 가장 큰 원인인 것 같다. 그리고 캐나다에 갔을 때 보니깐 산에 수많은 등산객과 라이더가 있는데, 서로 간의 마찰이 전혀 없더라. 그렇게 서로 공존할 수 있는 부분도 있을 텐데, 사람들의 인식도 그렇고 아쉬운 부분이 있다.


■ 국내 최초로 다운힐 백플립 기술 성공까지···그가 가는 곳이 곧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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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다. 얼마 전 국내 최초로 풀샥 바이크 백플립 기술에 성공했다. 물론 그때는 젤리백을 깔아두고 성공했지만, 오늘 인터뷰 촬영하면서 다운힐 바이크로 일반 필드에서도 성공시켰다. 처음 아닌가.
맞다. 다운힐 바이크로 백플립을 맨땅에서 시도해 성공한 건 오늘이 처음인데, 미디어를 통해 처음 선보인 셈이다(웃음).

개인적으로도 그런 배경을 알기 때문에 더욱 놀랐다. 국내 최초로 다운힐 백플립을 성공시킨 역사적인 현장에서 그 소감을 들어볼까(웃음).
사실 처음 성공했을 때는 쾌감보다도 '아, 살았구나'같은 느낌이 먼저 들더라. 그 뒤에 결국 해냈다는 쾌감이 밀려오며 기쁜 감정을 느꼈지만, 지금 생각해도 안도감이 더 큰 것 같다(웃음).

일반적인 에어트릭과 백플립은 차원이 다르다. 아무리 겁 없는 이창용 선수라고 하더라도 백플립만큼은 두려움이 앞설 것 같은데.
시도하기 전에 스스로도 굉장히 긴장을 많이 한다. 백플립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기술이기도 하고. 다른 자전거와 달리 다운힐은 굉장히 무거운 바이크라 공중에서 돌 때 체공시간이 길다. 그렇게 회전하면서 시선이 다시 땅에 꽂혀야 착지할 수 있는데, 다운힐 바이크는 그 짧은 순간에도 도통 지면이 보이지 않아 더 길게 느껴진다.

백플립 연습은 어떻게 했나.
처음 시도한 건 2012년이었다.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BMX 선수들이 에어트릭을 쓰는 모습을 보고 곧바로 배우기 시작했다. BMX로 시작해서 그 후 어반 바이크와 올마운틴을 거쳐 다운힐 바이크까지 왔다. 기초를 만들고 어느 타이밍에 회전을 하는지 몸으로 느낌을 익힌 후, 점차 자전거를 옮겨가면서 자연스럽게 된 것 같다. 

선수로서의 이창용은 사실 국내에서 이룰 것은 다 이룬 다운힐러다. 그런데도 계속 이렇게 새로운 에어트릭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한민국에서의 다운힐 기술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발전이 전혀 없다. 나는 어릴 적 영상 속의 선수들이 쓰는 에어트릭 동작을 최대한 많이 구사하고 싶은데, 한국에선 그런 모습을 도통 보기가 힘든 거다. 일례로 10년 전에 노핸드 점프를 해도 박수가 나왔는데, 똑같은 기술을 지금 써도 여전히 다들 놀란다. 왜 그럴까 싶었는데, 국내 다운힐 기술의 한계치가 전혀 갱신이 되지 않고 있는다는 걸 느꼈다. 백플립을 시도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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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만족도 그렇지만 동시에 대의를 위한 의도와 명분도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렇게 계속 사용하다 보면 한 2~3년 후에는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선수들도 동기부여가 돼서 점차 더 많이 시도하지 않을까. 그리고 아직 백플립 외에도 성공시키고 싶은 기술이 몇 개 더 있다.

국내 다운힐의 전반적인 기술 발전을 위한 좋은 시도였다. 다행히 다치지 않고 멋지게 성공해서 이렇게 멀쩡히 인터뷰도 하고 있고(웃음).
사실 지금은 가정이 있고 생계 문제도 있기 때문에 몸을 사릴 수도 있는데, 이것만큼은 꼭 보여주고 싶었다. 위험해도 직접 시도해서 보여주는 것이 국내 다운힐의 수준을 더 끌어올릴 수 있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 자신의 발전도 있고, 후배들이 더 올라가기 위한 동기부여 측면도 있다. 밑에서 빨리 치고 올라오는 선수들이 있었다면 나도 기분 좋게 더 빨리 내려갔을 거다(웃음).

이제 거의 인터뷰가 마무리되어가는데, 조금 원론적인 질문을 해보자. MTB 라이더인 이창용이 자전거에 매력을 느끼는 궁극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매력적인 요소의 디테일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결국 안 되는 걸 가능하게 만드는 순간의 매력이라는 목적은 똑같다. 크로스컨트리를 타면서 업힐 한 구간을 못 올라갔는데 연습을 통해 그 구간을 극복할 때의 희열과, 다운힐 에어트릭을 성공시켰을 때 느끼는 희열 모두 기쁜 순간이다.

최근 국내에 급속도로 저변이 확대된 자전거 동호인들에게 당부의 메시지를 건넨다면.
자전거 타는 분들이 많이 늘어난 만큼 욕심을 내는 분들도 많다. 하지만 프로 선수가 아닌 일반 동호인이라면, 프로그램까지 짜면서 과도한 욕심보다는 스스로 즐기면서 타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타다 보면 그 과정에서 천천히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다. 나 역시 선수 생활을 하기 위해서 타는 것이 아니라, 자전거 자체를 즐기며 타다 보니 선수가 된 것처럼 말이다(웃음).

다운힐 라이더로서 이창용의 인생에서 두 번째 챕터랄까. 선수 생활의 새로운 시작점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금도 선수 타이틀이 있긴 하지만 뭐, 굳이 시작도 마무리도 따로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운동할 시간도 줄어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실력이 줄어드는 그런 시기다. 물론 내가 타던 리듬이 있어서 그 감만 회복하면 되는데, 대신 예전처럼 1위는 힘들 것 같고(웃음). 대신 그만큼 앞으로도 자전거를 더욱 재미있게 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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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포크로스: 4인이 한정된 공간이나 파크 등에서 동시에 경쟁하는 내리막 토너먼트 경기
[2]하드테일: 완충작용을 하는 서스펜션이 앞바퀴에만 달린 자전거. 주로 XC(크로스컨트리) 종목의 자전거들이 하드테일이지만, 뒷 바퀴에도 서스펜션이 달린 XC 자전거도 있다. 드물지만 올마운틴 바이크도 하드테일 기종이 있다.
[3]풀샥: 뒷바퀴에도 서스펜션이 달린 자전거를 통칭 풀샥 바이크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자전거의 장르와 성격에 따라 다시 트레일/올마운틴/프리라이드/다운힐 등 다양한 종류로 나뉜다.

*편집자 주 - '몬스터라이드'에서는 늘어난 자전거 동호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부족한 사이클/MTB/BMX 등 자전거 스포츠 종목의 선수들을 지속적으로 찾아 집중조명하고자 합니다. 자전거 동호인들의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사진] 최웅재 작가
[기사] 조형규 기자(press@monstergroup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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