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접한 뒤 반년 만에 대관령 힐클라임 대회 1위
-교통사고 극복하고 극적인 복귀..."덕분에 자전거 더 즐기게 됐죠"



[몬스터짐=영상 박제영 PD·글 조형규 기자] 시계추를 10년 전으로 돌려보자.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쬐던 2007년 8월, 강원도 강릉에서는 제5회 대관령 힐클라임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대관령 힐클라임은 2003년 첫 대회를 시작으로 매년 개최되며 점차 강원도 지역의 대표적인 자전거 대회로 자리를 굳혀가던 중이었다. 그리고 2007년 대회가 끝난 뒤, 한 장의 사진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다.

사진은 평범했다. 그저 대회에 출전한 아마추어 사이클 선수의 사진이었지만, 이 사진에 달린 설명이 그를 스타로 만들었다. 설명에 의하면 사진의 주인공은 로드 바이크를 구입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회에 출전했고, 클릿 페달에 장착하는 클릿 슈즈를 챙기지 못해 일반 운동화를 신고 자전거에 올랐다. 게다가 장갑도 없이 맨 손으로 핸들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기록은 44분 07초. 사이클 남자 3그룹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또한 넷타임 기록에 대해 따로 수상을 하진 않지만, 이 숫자는 당시 대회에 참가한 모든 그룹의 선수들 사이에서도 가장 짧은 시간 안에 골인 지점을 통과한 최단 기록이었다.



사진의 주인공은 바로 아마추어 MTB 선수이자 자전거 동호인의 전설 김팔용 씨다. 김팔용은 자전거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전혀 없는 순수 동호인. 하지만 각종 아마추어 대회를 휩쓸면서 자전거 동호인 사이에서는 전설이 됐다. 지금도 이 사진은 ‘장비보다 실력’이라는 절대 명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모범답안으로 남았다.

아쉽게도 김팔용의 이야기는 2008년 이후로 세세한 정보를 찾기 힘든 편이다. 양쪽 발목의 복숭아뼈가 모두 부서지는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한 뒤 오랜 공백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종종 자전거 대회에 참가한다거나, 강원도 삼척에서 냉면집을 한다는 단편적인 이야기들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필자는 그 이후가 궁금했다. 자전거 동호인의 전설로 화제를 몰고 다닌 영웅담이 아닌, 교통사고 이후 삶에 더욱 애착을 갖게 된 그의 드라마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 지금부터 풀어낼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업힐왕’, '산악왕', ‘힐클라임의 황제’ 김팔용이 아닌, 너무나도 소박하고 따뜻한 감성을 가진 ‘인간’ 김팔용의 이야기다.


■ 여전히 건재함 과시하는 자전거의 전설···“대관령 힐클라임은 무조건 참가 합니다”



기함급 머신, 고가의 저지와 헬멧 등 각종 장비로 몸을 휘감은 젊은 로드 라이더들이 무색하게도 김팔용과의 첫 만남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평범한 운동복, 매실차가 담긴 1.5리터 PT병을 배낭에 넣은 채 트렉 에몬다 SL6를 타고 나타났기 때문. 물론 에몬다 SL6는 일반인 기준에서는 고가의 자전거로 볼 수 있지만, 로드 바이크를 타는 마니아들에게는 탈만한 정도의 모델이다. 심지어 이 자전거는 오는 4월 열리는 ‘어라운드 삼척 2017 트렉 라이드 페스트(이하 어라운드 삼척)’ 홍보대사로 임명되면서 협찬 받은 제품이었다. 하지만 그는 "저는 동호인이기 때문에 자전거나 장비는 잘 몰라요. 그냥 자전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산과 들을 달리면서 좋은 풍경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함께 싸온 간식을 나누어 먹을 때가 제일 행복합니다"라며 활짝 웃을 뿐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아마추어 동호인, 힐클라이머 김팔용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자전거의 전설을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웃음).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겨울이라 사실 자전거를 많이 타진 못하고, 생업에 열심히 종사했죠(웃음). 제가 원래 고기 발골 일을 하고 있는데 얼마 전에 누님께서 손가락이 골절되는 사고를 겪었거든요. 그래서 잠시 제 일을 관두고 누님 가게에 들어와서 같이 일을 보고 있습니다.”

저런, 제가 괜한 걸 물어봤네요. 어쩌다가 다치셨나요?
“누님께서 냉면 기계에 뭐가 빠진 걸 꺼내려다가 손가락이 말려들어갔어요. 넉달 가까이 치료를 받아서 낫긴 나았지만 결국 장애가 생겼죠. 한 4개월 동안 가게 문을 닫아야만 했습니다.”

누님께서 빨리 쾌차하기를 바랍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질문을 드릴게요. 가장 먼저 물어보고 싶었던 근황 중 하나가 바로 지난해 참가한 '제17회 MTB 280 랠리'입니다. 어떻게 참가하게 되셨나요?
“예전부터 항상 마음속에 ‘280 랠리를 꼭 완주해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어요. 그런데 교통사고도 있었고, 그동안 여러 가지 문제로 바빠서 참가를 못 했죠. 그러다가 재작년에 17회 대회는 강원도 강릉에서 열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작년 1월 1일부터 계획을 세워 바로 훈련에 돌입했습니다.”



대회에 참가하기 오래 전부터 계획을 잡으셨네요.
“전 항상 매년 1월 1일에 대회 계획을 짜요. 그렇게 지난해도 밤 9시에 산에 올라가서 새벽 4시까지 열심히 탔어요. 어차피 280 랠리를 뛰면 밤에도 자전거를 타게 되니깐 속으로 ‘잘 됐구나’ 싶었죠(웃음)."

사실 지난 2009년 교통사고 이후로 장거리 레이스는 안 하신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36시간 내로 백두대간 280km를 달려야 하는 대회라니, 부담스럽진 않으셨나요?
“그래서 나름대로는 장거리에 대비하기 위해 몸 관리도 하고 충분히 연습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평속 10km 내외로 천천히 가면 무리 없이 완주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조금 쉽게 생각을 했죠. 물론 막상 해보니 굉장히 힘들었습니다(웃음)."

그래도 280 랠리는 완주하는 인원 자체가 워낙 적은 대회잖아요. 뿌듯하셨을 것 같아요.
“제가 장거리와 다운힐에 약하고, 교통사고 경험 때문에 겁도 많이 났어요. ‘이러다가 완주도 못 하는 게 아닌가’ 싶어 긴장되더군요. 그래서 중반까지는 최대한 빠르게 치고 나갔죠. 사실 280 랠리는 삼척에서도 매년 7~8명이 참가하는데 아무도 완주를 못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제가 삼척에서 처음으로 완주한 사람이 됐습니다. 10년 동안 가슴속에 담아뒀던 목표를 이뤘기 때문에 굉장히 기뻤죠."

280 랠리가 비경쟁 대회이지만 단순 시간으로 보면 기록도 굉장히 좋아요. 25시간 50분, 참가자들 중 두 번째로 빨리 완주하셨더라고요.
“골인하고 나니 컷오프 타임이 거의 10시간 정도 남더라고요. 괜찮은 기록으로 완주하니 기분도 더 좋았죠(웃음). 다음에 또 280 랠리에 참가한다면 그 때는 더 여유를 갖고 즐겨도 될 것 같습니다. 중간에 보급도 하고 경치도 즐기면서 무리하지 않고 완주하고 싶어요." 

올해는 또 어떤 대회를 계획하고 계시나요?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로 XC(크로스컨트리) 대회는 참가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대관령 힐클라임 대회는 매년 빠지지 않고 참가하고 있어요. 올해도 나가야죠(웃음)."


■ 서울로 상경한 강원도 촌뜨기···주식으로 전 재산 잃은 뒤 만난 자전거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일단 그가 걸어온 발자취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강원도 삼척 노곡면 고자리, 거기서도 인적이 거의 없는 칠째골에서 태어난 김팔용의 어린 시절은 척박한 강원도 오지의 삶 그 자체였다. 당시 칠째골에는 김팔용의 가족 단 한 가구만이 살고 있었고, 드물게 손님이라도 찾아올 때면 그는 항상 장독에 몇 시간이나 숨어있었다고. 그 곳에서 그의 유일한 말벗은 토끼와 노루 같은 동물들이 전부였다.

이곳 강원도 삼척에서 나고 자라셨잖아요. 어렸을 때의 기억을 들려주실 수 있나요?
"제가 태어난 곳은 노곡면 고자리 칠째골이에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은데, 완전 산골짜기였죠. 그 깊은 곳에 초가집을 짓고 불을 떼고 살았는데, 칠째골의 유일한 가구가 바로 저희 집이었어요. 사람 구경을 전혀 못 하고 살았죠."

가족 외에 접촉한 사람이 전혀 없었나요?
"네. 식구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정말 간혹 낯선 손님이라도 찾아오면 어린 마음에 덜컥 겁이 나서 장독 안으로 숨곤 했죠. 그 조그만 항아리 안에 있으면 심장박동 소리가 어찌나 그렇게 크게 들리던지(웃음). 그러다가 바깥이 조용해지면 슬며시 나오고 그랬습니다."

정말 강원도 오지의 삶 그 자체였네요.
"그렇죠. 주변에는 온통 산뿐이었고, 저에겐 그게 세상의 끝이었으니까요. 눈에 보이는 거라곤 토끼, 노루, 독수리, 개구리 같은 동물들이 전부였어요. 그러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삼척 시내로 이사를 왔습니다. 전깃불과 자동차도 그때 처음 봤죠."

처음 도시를 본 느낌은 어땠나요?
"엄청 신기했죠. 하지만 삼척 시내로 온 뒤에도 어머니는 계속 농사일을 하셨어요. 그걸로 저와 형제들을 모두 키우셨지만, 그것만으로는 식구들을 모두 감당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전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곧바로 철공소, 인쇄소 같은 곳을 전전하며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9세 때 서울로 상경하셨죠?
"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당시 삼척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거든요. 계속 그렇게 살면 아무런 희망이 없겠다 싶어서 서울로 올라갔죠. 처음에는 차비도 없었어요. 농사만 지으시는 어머니께 무슨 돈이 있겠어요. 그런데도 3만 원을 주시더라고요. 하지만 그 정도까진 필요 없을 것 같아서 1만 5천 원을 다시 어머니께 드리고, 전 나머지만 가지고 서울로 갔죠."



서울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딱히 배운 게 없다보니 원대한 야망 같은 건 없었어요. 유일한 목적은 그저 서울에 일자리가 많았기 때문에(웃음). 처음에는 복싱을 하려고 했습니다. 지금이야 격투기가 큰 인기를 끌고 있지만 그 때는 복싱의 시대였거든요. 인기도 엄청났죠. 그런데 제 코뼈가 약해서 복싱을 하기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게다가 당시 전 주민등록증도 나오지 않은 상태라 일단 먹고 자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에, 급하게 식당에서 일을 하게 됐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진 겁니다."

요리사로 일한 건 얼마나 되셨죠?
"30년이 더 됐죠. 서울에서는 30대 중반까지 일을 했어요. 그렇게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제 가게도 차리고, 결혼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는 돈이라 은행에 부어봤자 수익도 거의 없고, 고심하다가 선택한 게 주식이었어요. 주변에서 '전세금을 빼서 월세로 살고, 남은 돈으로 주식에 투자를 하라'고 권유하더라고요. 그런데 이걸 펀드 전문가에게 맡긴 것도 아니고, 홈트레이딩을 하다 보니 돈이 쭉쭉 빠진 거죠 뭐. 게다가 본업이 따로 있다 보니 하루종일 주식에 매달려있을 상황도 아니었고. 그렇게 힘들게 모은 돈을 하루아침에 날렸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군요. 혹시 좌절하거나 안 좋은 마음을 품진 않으셨나요.
"처음엔 정말 괴로웠어요. 입맛도 없다 보니 체중이 쭉쭉 빠지면서 말라깽이가 됐죠. 자연히 기운도 없고 현기증도 자주 나면서 급속도로 몸이 약해지더라고요.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크게 좌절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아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태어나서 죽는 그 날까지 기복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게 인생이죠. 물론 그때는 너무 아팠지만요(웃음)."

큰 위기였습니다.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나요?
"당시 출근도 못 할 정도로 몸이 약해지다 보니, 하루는 사장님이 집으로 찾아오셔서 절 끌고 병원을 갔어요.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마치 고양이가 발톱으로 할퀸 것처럼 위에서 출혈이 나고 있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돈도 잃었는데 이러다간 건강까지 잃겠구나, 안 되겠다’ 싶었죠. 하나 남은 몸에라도 투자를 하기 위해 친구의 도움으로 MTB(산악자전거)를 한 대 구입해서 운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자전거와의 인연이 시작됐죠. "


■ 30대 후반, 절망의 끝에서 만난 자전거가 선사한 ‘업힐왕의 기적’



2003년, 30대 후반의 김팔용은 캄캄한 암흑 속에서 그렇게 자전거를 만났다. 하지만 안장에 오른 그가 처음부터 두각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동호인들과 함께 그룹 라이딩을 하면 으레 가장 먼저 뒤처지기 일쑤였다. 자신이 민폐가 된다고 생각한 김팔용은 그 뒤로 동호회를 나와 밤낮으로 페달을 밟으며 홀로 봉황산을 올랐다. 안장 위에서 반년을 보낸 김팔용은 이듬해인 2004년, 주변 동호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으로 제2회 대관령 힐클라임 대회에 참가 신청서를 냈다. ‘업힐왕’의 전설은 그렇게 마법처럼 시작됐다.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전거와 처음 만나셨네요.
"네. 처음에는 말도 아니었어요. 몸도 엉망에, 근력도 형편 없었죠. 20명 가까이 되는 동호인들과 같이 타다 보면 항상 뒤처지곤 했어요. 제가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결국 한 달 후에 동호회를 나와서 혼자 타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연습을 하던 코스는 어디였나요?
"봉황산을 많이 올랐습니다. 그리고 삼척대학교랑 시청 앞 언덕도 한 번 탈 때마다 20~30번 씩 계속 올랐죠. 그렇게 힘을 쓰다 보니 물을 많이 마시게 되고, 없던 입맛도 조금씩 다시 돌아오더군요. 체중이 늘어나면서 근육도 붙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그 즈음 동호인들 사이에서 대관령 힐클라임 대회가 화제였는데, 저도 호기심이 생겨 난생 처음 자전거 대회에 참가하기로 결심했죠."

동호인들은 항상 뒤처지곤 했던 모습의 김팔용만 기억하고 있었을 텐데, 걱정하진 않던가요?
"어휴, 말도 마세요. 난리도 아니었죠.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웃음). 그런데 저는 대회에서 뭘 해보겠다는 게 아니라 그저 경험 삼아 나가보고 싶었어요. 그러니깐 동호인들은 ‘정 그렇다면 몸 상태도 그렇고 자전거도 좋지 않으니, 내 자전거를 타고 출전하라’고 권유하더군요. 하지만 전 좋은 자전거는 필요 없고, 그냥 제가 타던 자전거로 출전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준비를 하다가 대회 1주일 전에 리허설 삼아 동호인들과 함께 댓재를 올라갔어요. 그런데 거기서 난리가 난 거죠."

갑자기 확 늘어난 실력 때문인가요(웃음)?
"네(웃음). 초반에 평지에선 제가 뒤처져서 따라갔어요. 그러다가 업힐이 시작되면서 조금씩 거리가 좁혀지더군요. 처음에는 ‘내가 자전거를 못 타니깐 맞춰주려고 천천히 가나보다’ 싶었죠. 그런데 절반 정도를 넘어가니 점점 앞에 사람들이 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 정상이 어딘지도 모른 채 별로 힘 들이지 않고 쭉쭉 올라가던 상황이었는데, 그렇게 정상에 도착하고 5분 정도가 지나니 한두 명씩 올라오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분들도 엄청 놀랐죠. ‘여태까지 보여준 약한 모습이 다 작전이었냐’면서(웃음)."

어쨌든 그렇게 2004년 제2회 대관령 힐클라임 대회에 처녀출전 해서 3그룹 1위라는 기록을 세우셨습니다. 첫 출전에 1위였죠. 느낌은 어떠셨나요.
"너무 좋았죠. 굉장히 감격했어요. 처음 스타트에서는 길도 좁고 사람들이 많으니 조심스럽게 달렸는데, 4km 지점부터 길이 넓어지고 업힐이 시작되면서 쭉쭉 치고 올라갔죠. 저는 3그룹에서 출발했는데, 앞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계속 추월하면서 갔기 때문에 느낌이 좋았어요. 골인 후에 동호회 회장님이 얼추 보더니 ‘이 정도면 순위권 정도가 아니라 1위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고 하시더라고요. 결과가 나왔는데 제가 참가한 그룹 1위였어요. 태어나서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이었죠. 그 위에서 보이는 강릉시내가 모두 다 제 것이 된 것만 같았습니다. 제가 살면서 이럴 때 아니면 언제 1등을 해보겠어요(웃음)."



하지만 그렇게 전설이 시작됐죠. 그중에서도 압권은 2007년 제5회 대관령 힐클라임 대회였습니다. 클릿 슈즈와 장갑 없이 운동화만 신고 달린 바로 그 대회요. 중요한 대회였는데 장비는 왜 빠뜨리셨던 거죠(웃음)?
"대회 전날까지 일을 했는데, 하필이면 그날따라 손님들이 새벽 1시 넘어서까지 있더라고요. 마감을 하고 나니 새벽 2시를 훌쩍 넘겼고, 결국 늦잠을 잤죠. 그렇게 아침에 일어나서 헐레벌떡 달려간다는 게 그만 운동화를 신고 급하게 버스에 탄 겁니다. 버스가 이미 출발한 뒤에서야 장비를 챙겨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어요. 어쩔 수 없었죠. 물론 대회장에 도착해서 아는 동호인들의 장비를 빌릴 수도 있었는데, 기록 욕심이 있다 보니 '출발 2분 전!'이라는 소리에 그냥 운동화를 대충 신고 급하게 스타트 라인으로 뛰어갔죠(웃음)."

운동화도 그렇지만, 페달도 클릿 페달이라서 면적이 좁고 접지력도 부족하잖아요. 장갑도 없었고. 불안하거나 초조하진 않으셨는지요.
"스타트 때는 워낙 정신이 없다 보니 잘 느끼진 못했습니다. 그런데 시작과 동시에 주행하다보니 ‘이거 큰일 났구나’ 싶었죠. 클릿페달에 운동화를 얹으니 자꾸 발이 미끄러지는 겁니다. 게다가 클릿슈즈가 없으니 끌어올리는 힘도 쓰지 못하잖아요. 어쩔 수 없이 찍어 내리는 힘에 집중해서 최대한 페달과 밀착한다는 느낌으로 페달링을 했어요.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잘 적응이 됐죠."

설상가상으로 당시 대회는 MTB에서 로드 바이크로 기종을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으로 알고 있어요.
"맞아요. 로드 바이크를 구입한 지 정확히 보름 됐었죠. 기어 변속조차 손에 익지 않은 상황이라, 업힐 중 체인이 이탈하는 일도 있었어요. 장갑도 없는 맨손이라 기름을 묻히지 않으려고 길가에 있는 풀을 꺾어다가 그걸로 체인을 잡아서 걸고 다시 달렸죠(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룹 1위로 당당히 골인하셨죠. 게다가 넷타임을 보니 44분 07초로 대회 참가한 모든 선수 중 가장 빠른 기록이었는데, 어떠셨나요?
"나중에 결과를 보니 전체 기록 중 제가 가장 빨리 들어왔더라고요. 당시 대회 참가 목표이기도 했기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속도도 MTB 탈 때보다 더 잘 나왔고요."

그때 김팔용 선수의 대회 사진이 인터넷에서 한창 화제가 됐죠. 혹시 인터넷에 본인 사진을 올린 분은 누군지 아시나요?
"전혀 모릅니다. 저도 아는 동호인에게 갑자기 ‘지금 난리가 났다고, 빨리 인터넷 들어가 보라고’ 연락이 와서 제 사진이 퍼진 걸 알게 됐어요. 그런데 어차피 일반인들은 잘 몰라요. 그래도 자전거 타시는 분들은 많이 알아봐주시더라고요. 지금도 자전거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학생들이 그 사진을 보고 찾아오곤 합니다. (사진 올려주신 분께) 고마울 따름이죠(웃음)."


■ 교통사고, 그리고 2년의 공백···“부상 이후 삶과 자전거의 균형 찾았죠”



주식투자로 전 재산을 잃은 그에게 자전거는 또 다른 희망을 선사했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상향선만을 그리지 않는다. 그대로 완만하게 나아질 것만 같던 그의 삶은 지난 2008년 교통사고를 당하며 다시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항상 긍정적인 태도로 삶을 바라보던 그는 이번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아마 신이 있다면, 삶과 자전거의 균형을 맞춰주기 위해 이런 시련을 내린 게 아닐까요?”라며 훌훌 털어내듯 웃었다.

힐클라임 대회에 주로 참가하셨는데 수상 경력을 보면 크로스컨트리 대회 출전 이력도 종종 있어요. 내용을 살펴보니 제일 처음 출전한 게 2006년 봉화산 크로스컨트리 대회였는데, 어떤 계기로 참가하셨는지요.
역시 MTB는 산으로 가야 더욱 빛이 나는 자전거잖아요. 솔직히 저는 도로 힐클라임을 주로 타기 때문에 산악에서의 다운힐은 약해요. 겁도 나고요. 하지만 그것도 경험해보고 싶었어요. 입상에 대한 욕심보다, 동호인들과 함께 산을 타는 것 자체가 즐거웠기 때문에 참가했습니다.

그런데 봉화산 크로스컨트리 대회, 춘천 산악자전거 XC 부문, 오대산 산악자전거 XC 부문 등 각종 크로스컨트리 대회에서도 1위를 기록하셨습니다. 즐기기 위해 참가하셨다면서요(웃음).
"엄밀히 말하자면 크로스컨트리는 제가 잘 타서 그런 게 아니라, 업힐에서 거리를 최대한 많이 벌려놓고 다운힐을 느긋하게 내려온 덕분입니다. 업힐에서 많이 벌려놔도 다운힐에서 다시 다 좁혀지고, 그렇게 간발의 차로 골인하는 식이였죠. 그러니깐 주변 동호인들은 '힐클라임 대회나 계속 나가지 왜 크로스컨트리 대회까지 넘보느냐'면서 농담도 던지고(웃음)."

어쨌든 그렇게 각종 대회를 휩쓸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중 2008년에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오랜 휴지기를 갖게 됩니다. 큰 사고였죠?
"네. 그때 저는 2007년 대관령 힐클라임 대회에서 스스로 목표해왔던 전체 1위 넷타임 기록을 달성하면서, 아마추어로서 갈 수 있는 데까진 다 올라갔다고 생각하던 차였습니다. 그쯤 되면 이제는 여유를 갖고 조금 더 즐기면서 탈법도 한데, 여전히 기록 단축에 대한 욕심이 있었어요. 매일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다 보니 그 시간마저도 굉장히 하드하게 탔는데, 그러다가 사고가 났죠."

사고 당시 상황은 어땠나요?
"언덕을 오른 뒤 완만한 다운힐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당시 앞에 차가 가고 있었는데, 깜빡이를 켜지 않고 오른쪽으로 가더군요. 순간 저는 ‘우회전을 하거나, 나 때문에 잠시 비켜주려는가 보다’ 했죠. 그런데 알고 보니 좌측에 있는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기 위해 굉장히 크게 돈 거였어요. 다운힐이었기 때문에 차에 부딪치는 순간 한 바퀴 돌면서 바닥에 굴러 떨어졌고,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습니다."

정말 큰 사고였네요. 사고와 수술 경과는요?
"양쪽 복숭아뼈가 다 부서졌어요. 여섯 시간에 걸쳐 수술을 했고, 발목에 핀을 8개나 박았습니다. 그런데 보통 6개월 정도 지나면 뼈가 붙으면서 낫는다고 하던데, 저는 도통 낫지를 않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100명 중 한 사람 꼴로 몸 안에 핀 같은 이물질이 들어오면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는데, 제가 바로 그런 케이스였던 거죠."

그래서 치료는 어떻게 하셨나요?
"핀을 박아 넣으면 계속 고름이 차오르고, 그걸 째내고 항생제를 먹으면 또다시 고름이 올라오고··· 이게 계속 반복됐어요. 결국엔 핀을 모두 제거한 뒤 목발을 짚고 조심히 생활했죠. 핀을 빼니 회복 속도가 더뎌서, 완치까지 꼬박 2년이나 걸렸습니다."

2년의 시간 동안 굉장히 괴로우셨겠어요. 무엇보다도 자전거를 다시는 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크셨을 것 같습니다.
"그렇죠. 저도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어요. 병원에서 눈 뜨자마자 ‘아, 이제 앞으로 자전거는 완전히 끝났구나’ 싶었죠. 굉장히 상심이 컸습니다."



교통사고 후 다시 자전거에 오르기까지는 얼마나 걸리셨나요?
"처음 자전거에 다시 오른 건 교통사고 후 1년이 지난 시점이었어요. 그것도 자전거를 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재활을 위해서였죠. 1년 내내 목발을 짚고 다니다 보니 한쪽 다리만 근육이 다 빠져서 짝짝이가 됐는데, 발로 직접 뛰는 운동은 전혀 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렇게 재활을 위해 다시 자전거도 타고, 웨이트트레이닝도 굉장히 많이 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사고 이전의 정상적인 수준까지는 복구되지 않더라고요."

이제는 전성기만큼의 기량이 나오지 않는데 그에 대한 아쉬움은 없으셨나요?
"다행히 미련은 없어요. 제가 하고 싶었던, 그리고 목표로 했던 것들을 어느 정도 이룬 상태에서 사고가 났으니까요. 대신 그 후로는 자전거를 조금 줄이고, 제 생활과 일에도 비중을 쏟으며 균형을 잡게 됐죠."

어떻게 보면 부상이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준 셈이네요?
"맞아요. 확실한 변화가 됐죠. 사고 이후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종교는 없지만, 만약 신이 있다면 ‘자전거에만 너무 치우쳐져 있던 그동안의 삶에서 이제는 다시 균형을 찾기 위해 돌려보낸’게 아닌가 싶더라고요(웃음)."

그렇군요. 하지만 그렇게 끔찍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전거를 완전히 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람이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그 외의 무언가를 함으로 인해 삶이 윤택해지잖아요. 그런데 운동을 하면 몸도 건강해지고 정신건강에도 좋고. 교통사고 후에도 뭘 해볼까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저에겐 역시 자전거였던 거죠. 처음에는 전혀 못 탈 줄 알았는데, 회복이 되니깐 여전히 재미있더라고요. 그러다보니 대회도 조금씩 다시 출전하게 됐죠. 이제는 기록에 연연하지 않고 동호인들과 함께 타는 것 자체가 즐거워요. 물론 막상 경기 시작하고 나면 본능이 나올 때도 있지만(웃음)."

아무래도 사고 이후로 훈련양이나 라이딩 스타일도 많이 바뀌셨을 것 같아요. 변화한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과거에는 자전거를 매일 탔어요. 그리고 혼자서 타도 재미가 있었죠. 하지만 지금은 한두 명이라도 모아서 함께 라이딩을 합니다. 재미도 더욱 배가 됐죠. 혼자 타는 일은 이제 많지 않아요(웃음)."

그때문일까요? 여전히 많은 동호인들이 김팔용 선수를 만나기 위해, 또 같이 자전거를 타기 위해 삼척까지 오곤 합니다. 그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무엇인가요?
"한결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업힐을 잘 탈 수 있느냐'(웃음). 그런데 사실 제가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은 게 아니라 별로 해드릴 말이 없어요. 그나마 ‘웨이트트레이닝도 중요하고, 모든 스포츠의 기본이 육상이니 달리기도 같이 겸하면 좋아요’ 정도만 조언해드리곤 하죠."

사실 김팔용 선수의 페달링은 정석과는 조금 거리가 있잖아요. 일반적인 케이던스(분당 페달 회전수) 주행이 아닌 파워에 의한 토크 주행인데, 이 부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많은 분들이 ‘힘으로만 탄다’며 흉을 보기도 해요(웃음). 하지만 이 부분에서는 제가 딱히 할 이야기가 없어요. 힐클라임에서 이런 스타일을 계속 고수하면서 1위를 했거든요. 그리고 한국에서 열리는 대부분의 힐클라임 대회가 20~30km 안팎이기 때문에 그 수준에서는 토크로 타도 큰 무리는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확실히 장거리에서는 케이던스로 타야겠죠. 그래야 무릎에 부담 없이 오래 탈 수 있고요."


■ ‘업힐왕’ 아닌 ‘인간’ 김팔용, “어머니와 트럭으로 여행하는 것이 꿈”



만약 김팔용이 부와 명예에 관심이 있었다면 수많은 기업들의 강연 요청과 방송사들의 섭외 제의를 외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저는 남을 가르칠 만한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방송 카메라만 보면 덜덜 떠는 걸요"라며 손사래를 쳤다. 교통사고 후 자전거를 더 순수하게 즐길 수 있게 된 김팔용은 '업힐의 왕' 같은 화려한 수식어를 버렸고, 대신 스스로의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볼 줄 아는 '인간' 김팔용이 됐다. 그런 그의 유일한 꿈은 1톤 트럭에 어머니를 모시고 맛집을 찾아 여행을 다니는 것.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버킷리스트다.

유명세를 타면서 방송이나 여러 분야에서 섭외 요청이 오진 않던가요?
"기업에서 강연 요청이 많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제가 그런 곳에 가서 누굴 가르칠 만한 사람도 아니고··· 방송도 힘들어요. 제가 카메라만 보면 덜덜 떨거든요. 강원도 지역 방송국에서 짧은 다큐멘터리 방송을 촬영한 게 전부였죠. 대신 자전거와 관련된 매체에서 인터뷰를 온다고 하면 그런 건 좋습니다(웃음)."

그렇군요. 그나저나 지난 2015년에는 작은 냉면집을 오픈하셨죠? ‘옥류관’이라고. 특히 자전거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자자해요(웃음).
"사실 지금은 다시 정육 쪽 발골 일을 하고 있고, 옥류관은 누님이 운영하고 있어요. 처음에 말했듯이 누님이 손가락을 다치셔서 요즘은 제가 다시 같이 하고 있지만요."

옥류관은 어떻게 열게 됐나요?
"제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이었는데, 그 학벌이 요리사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발목을 잡더라고요. 그래서 검정고시를 보고 2011년에 늦은 나이에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성적도 좋았는데, 1학기를 마치고 나니 고민이 앞섰어요. ‘4년 동안 돈을 쓰면서 학교를 다니느니, 차라리 그 돈을 모아서 개업을 할까’ 싶었죠. 다행히 교수님도 '팔용 씨라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다'라며 응원해주시더라고요. 그 길로 학교를 관뒀어요. 그리고 정확히 4년 뒤에 이 가게를 차렸죠. 계획대로 된 셈입니다."

30년 넘게 요리를 하셨잖아요. 종목을 냉면으로 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요리도 다들 자신만의 전문 분야가 있는데 전 고기를 많이 다뤘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고깃집을 하고 싶었죠. 그런데 고깃집을 차리려면 부지가 넓어야 하는데, 경제적 여유가 없다 보니 그건 빠듯하더군요. 게다가 어머니를 모시고 살 집이 필요하다보니 2층에는 거주공간을 지어야 했고요.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메뉴를 고민하다가 냉면을 주력으로 하게 됐죠.



고기가 전문이셨군요. 확실히 냉면도 냉면이지만, 오늘 갈비탕을 먹어보니 고기 맛이 범상치 않더라고요(웃음).
"정육 계통에 오래 종사했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는 자부심이 있어요. 고기 삶는 법부터 시작해서 냄새 제거하는 법, 맛을 내는 법 등의 모든 노하우가 몸에 배어있습니다. 요리경진대회에서도 세 번 정도 입상한 경험도 있고요."

그러고 보니 어머니를 모시고 살기 위해 2층은 집으로 만들었다고 하셨잖아요. 요즘 같은 세상에 쉽지 않을 텐데, 효심이 깊으신 것 같아요.
"딱히 그런 건 아니에요. 누님과 동생 모두 결혼해서 타지에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미혼인 제가 모셔야죠.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해요. 더 편하게 해드리고 싶고, 사실 더 큰 목표도 있었는데··· 아쉬울 따름이죠."

더 큰 목표라면 무엇인가요?
"돈을 많이 벌어서 부모님을 모시고 같이 여행을 다니고 싶었는데 주식으로 재산을 전부 잃어서 그게 잘 안됐죠. 그래서 조금 더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다행히 어머니께서 아직까지는 걸으실 수 있으니,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면 어머니를 차에 태우고 좋은 곳을 많이 다니고 싶습니다."

혹시 어머니께서는 자전거 대회에 출전하는 아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처음에는 기뻐하셨죠. 그런데 자주 입상을 하다 보니 이제는 무조건 1위만 하는 줄 아세요. 그러다가 순위에 들지 못하면 대회 나가지 말라고(웃음).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도 나름의 효도라고 생각하는데, 이제는 그게 많이 무덤덤해지셔서(웃음)."

이제 1위도 적당히 하셔야겠네요(웃음). 그나저나 지난해 반가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김팔용 선수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제작된다고 들었어요. 아직도 유효한 이야기인가요?
"네. 진행 중입니다. 가게를 오픈할 무렵 두 곳의 영화 제작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 중 한 곳에서 먼저 계약을 해서 진행하게 됐는데, 인터넷에서 제 이야기를 보고 연락을 주셨더라고요. 그러더니 삼척까지 와서 저와 함께 2~3일 가량을 함께 먹고 자고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죠. 저는 '아니, 이게 영화 소재가 되긴 되나요?'라고 물었는데, 작가 분이 오히려 “충분히 차고 넘칩니다'라면서 좋은 이야기라고 해주시더라고요."



현재 영화화는 얼만큼 진행이 됐나요?
"시나리오 작업 중인데 거의 마무리 단계라고 합니다. 영화는 태어나서부터 대관령 힐클라임 대회 1위에 오르는 과정까지만 다룬다고 하는데, 일단 다른 시점으로도 시나리오 B안을 써 본다고 하더라고요. 조만간 완성된 시나리오를 들고 삼척으로 한 번 내려온다고 했는데 아직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것 같네요."

최근에는 강원도 삼척시와 자전거 브랜드 트렉사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어라운드 삼척’의 홍보대사로 선정되셨습니다. 홍보대사는 어떻게 맡게 되셨나요?
"하루는 삼척시 관광과에서 '4월에 열리는 자전거 대회의 홍보대사를 맡아줄 수 있느냐'라고 전화가 왔어요. 트렉에서 삼척시에 제의를 한 것 같은데, 자전거 관련 일이니깐 흔쾌히 알겠다고 했죠. 저 말고도 전 다운힐 국가대표 장준원 선수, 철인 3종 경기 김비오 선수가 함께 홍보대사로 활약하고 있어요. 그 분들은 젊고 인터넷 소통에 능하니 SNS에서도 많이 홍보를 하시고, 저는 전국의 동호인들에게 직접 연락하고 함께 자전거를 타면서 알리고 있죠."

고향에서 열리는 대회이기 때문에 의미도 남다를 것 같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강원도 삼척에 대한 자랑 좀 부탁드릴게요(웃음).
"삼척이 전국에서 제일 안전한 도시 1위에 꼽혔다고 하더군요(웃음). 일단 삼척은 자전거 도로도 잘 되어있고, 마침 어라운드 삼척이 열리는 코스는 차도 거의 다니지 않으면서 경치가 굉장히 좋습니다. 특히 4~5월이 되면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데, 이게 전혀 차갑거나 뜨겁지 않아서 굉장히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탈 수가 있어요.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정말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함께 달리고 싶네요. 굉장히 오랜 시간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이제 거의 마무리 질문입니다. 선수 김팔용이 아닌, 인간 김팔용으로서의 삶의 목표나 꿈은 무엇인가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제가 20대 때부터 생각해온 게 있는데요.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이 된다면 1톤 트럭을 사서 캠핑카처럼 꾸밀 겁니다. 물론 캠핑카를 구입하면 되겠지만 그건 비싸니깐(웃음). 그렇게 차를 사서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도 다니고, 맛집도 찾아다니면서 전국을 돌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선 고깃집을 먼저 해야 할 텐데, 가게 운영은 매니저에게 맡기고 저는 여행을 다니는 거죠. 아, 이건 너무 큰 꿈인가(웃음)."

아니에요. 힘든 세월 걸어오셨으니 이제는 꽃길만 걸으셔야죠(웃음). 인터뷰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전국의 자전거 동호인들에게 한 말씀 남겨주세요.
"프로 선수가 아닌 이상, 자전거도 어차피 건강을 위해 하는 운동입니다. 그러니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사고 없이 즐겁고 안전한 라이딩이 되길 바랄게요."



[사진/영상] 박제영 PD
조형규 기자(press@monstergroup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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