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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현은 현재도 미스틱 & 아우라와 싸우고 있다>


[몬스터짐] 뉴욕의 심장부에 위치한 양키 스타디움, 1901년 창단이래 27번이나 우승의 영광을 함께했던 이 스타디움의 한쪽 구석에는 이런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Mystique and Aura: Appearing Nightly (신비한 기운: 밤마다 나타난다.)  이는 양키스의 영광을, 또한 상대팀이 마주한 통곡의 벽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2001년 11월 1일, 월드 시리즈 5차전에서도 그 기운은 강력했다. 입추의 여지가 없이 들어찬 관중들, 그리고 모든 시선이 폭사되던 마운드위에 메이저리그 최단신의 아시아인이 우뚝 서 있었다.  그 밤, ‘애리조나의 수호신‘ 김병현은 양키스의 101년 묵은 초자연적 현상에 도전했었다. 

16년이 지난 2017년, 김병현은 또 다른 마운드에서, 또 다른 미스틱 & 아우라와 싸우고 있다. 2001년의 김병현과 2017년의 김병현이 마주한 두 험난한 도전에 대해, 그가 거쳐온 전투의 격렬함과 꺾이지 않고 내일을 향하는 투지에 대해 우리야구가 메이저리그의 역사에 남긴 주요한 페이지들을 돌아면서 그의 앞날을 전망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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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현 특유의 잠수함 투구폼 기라성 같은 타자들도 그의 투구에 하나둘 덕아웃으로 들어갔다>

■ Born to K, BK 김병현의 인생역경

1979년 광주에서 태어난 그는 광주일고를 거쳐 성균관대학교로 진학했다. 성균관대 2학년 시절에는 98 방콕 아시안 게임에도 참가해 금메달과 더불어 병역 혜택을 받았다. 또한 이 때 중국과의 4강전에서 중간 계투로 나와 8타자 연속 삼진을 포함, 6이닝 동안 12탈삼진을 따내는 괴력을 보였다.

이후, 한미 대학 국가대표 대항전에서 6⅔이닝동안 15탈삼진을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D-Backs)의 러브콜을 받아 미국으로 향한다. 이 때 받은 계약금이 무려 225만달러, 현재까지 대학무대에서 이정도 금액으로 메이저리그에 직행한 선수는 아직 없다. 그 정도로 그 당시의 김병현은 천재라는 말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초특급 투수였다.

그리고 대망의 미국 첫 무대인 1999년, 그는 특유의 잠수함 특이폼에서 나오는 폭발적인 구위를 바탕으로 마이너리그를 단 석 달 만에 평정하게 되었고, 당당하게 메이저 무대로 올라서게 되었다. 그리고 1999년 5월 30일 뉴욕의 셰이 스타디움에서 펼쳐진 뉴욕 메츠와의 메이저 리그 데뷔전에서 중심타선 에두아르도 알폰소-존 올러루드-마이크 피아자를 삼자 범퇴로 처리하여 미국 전역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특히 역대 최고의 공격형 포수인 마이크 피아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모습은 압권이었다. 이후 김병현은 곧바로 팀의 마무리 투수로 낙점받으며 2001년 팀의 월드 시리즈 진출에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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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현의 영광,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시절>

2001년 내셔널리그 디비전 시리즈와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4경기 6.1이닝을 던지며 3세이브 무실점 피칭으로 완벽하게 막아냈다. 그리고 운명의 월드 시리즈, 당시 애리조나에는 랜디 존슨과 커트 실링이라는 난공불락의 원투펀치가 버티고 있었고, 김병현은 팀이 시리즈 전적 3승 1패로 앞선 4차전에서야 아시아인 최초로 월드 시리즈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본인이자 동양인 최초의 월드시리즈 무대. 그는 8회말 뉴욕 양키스의 강타선인 셰인 스펜서, 스캇 브로셔스, 알폰소 소리아노를 삼진으로 모두 돌려세우면서 무난히 세이브를 챙기는 듯 보였다.

9회말에도 등판한 김병현은 까다로운 타자 데릭 지터를 땅볼로 잡아냈다. 비록 폴 오닐에게 안타를 허용했지만, 당시 절정의 기량을 뽐내고 있던 버니 윌리엄스를 삼진 아웃으로 잡아내며 그에게는 동양인 최초 월드시리즈에서 세이브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그를 외면했다. 다음타자 티노 마르티네스는 그가 던진 슬라이더를 놓치지 않고 좌측 담장 밖으로 넘겨버렸다. 블론세이브였다. 그는 동점홈런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태연하게 웃었다. 경기는 연장전에 돌입했고, 그는 10회말 데릭 지터에게 10구의 끈질긴 승부 끝에 훗날 그에게 ‘미스터 노벰버’라는 별명이 붙게 된 통한의 끝내기 홈런을 허용하며 패전투수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다시 등판했다. 이미 전날 61개의 공을 던지고도 9회말과 10회말, 연속으로 끝내기 홈런을 허용하며 패전투수가 된 그였다. 하지만, 그를 향한 밥 브렌리 감독의 신뢰는 절대적이었고, 또다시 양키 스타디움 마운드에게 오르게 된 것이었다.

이번에도 출발이 불안했다. 훗날 양키스의 전설이 된 호르헤 포사다에게 2루타를 맞았다. 그러나 그는 침착하게 셰인 스펜서를 3루 땅볼로 잡은 뒤 척 노블락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전날의 악몽을 차례차례 씻어나갔다. 그리고 타석엔 스캇 브로셔스, 이미 지난 경기에서 김병현의 슬라이더를 받아쳐 거의 홈런과 같았던 파울 타구를 만들어냈던 그였다. 초구는 몸쪽 볼, 김병현이 던진 회심의 2구째에 브로셔스의 배트가 힘차게 돌았다. 공은 좌측담장을 훌쩍 넘어갔다. 동점 홈런, 월드 시리즈 연속 블론세이브였다.

 
<허구연 위원이 말하는 김병현>


당시 미국에서 현지 중계를 하던 허구연 위원은 “그 공이 제발 폴 바깥으로 나갔으면 하고 기도했다.”라며 당시의 상황을 회고했다. 하지만, 월드시리즈 2경기 연속 블론세이브라는 초유의 사태가 그의 눈 앞에 펼쳐졌다. 미스틱 & 아우라는 다시한번 김병현의 곁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는 데뷔시즌으로 메이저리그에서 최고가 되었지만, 만 22세인 김병현에게 첫 월드 시리즈에 대한 부담감을 떨쳐내는 것은 너무나도 벅찼다.

김병현은 동점 홈런을 허용한 직후 교체되었지만, 양키스의 수호신 마리아노 리베라의 호투에 밀린 애리조나는 연장 12회말 알폰소 소리아노에게 끝내기를 허용하며 역전패, 시리즈 스코어도 2승 3패로 밀리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6, 7차전을 홈구장인 뱅크 원 볼파크에서 치룬 애리조나는 6차전에서 랜디 존슨의 호투를 앞세워 양키스를 대파하고, 7차전에서는 알폰소 소리아노의 홈런으로 1대2로 밀리고 있던 상황에서 전날 선발에 이어 구원투수로 등판한 랜디 존슨이 대역투를 펼쳤고, 9회말 그 난공불락의 리베라를 상대로 토니 워맥의 동점 2루타, 루이스 곤잘레스의 끝내기 안타로 대역전승을 일구어 냈다. 이 승리는 리베라의 포스트시즌 첫 블론세이브이자 포스트시즌 평균자책점 0의 행진에 마침표를 찍는 명승부 중의 명승부였다.

당시 김병현은 우승 직후 가진 파티에서 “우승을 하지 못했다면, 은퇴를 할 생각이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을 정도로 그가 가졌던 부담감과 중압감은 엄청났다. 하지만, 그는 그 중압감을 이겨내고 월드 시리즈 우승이라는 해피엔딩을 만들어냈다. 물론 월드 시리즈에서는 블론세이브 2개로 우승에 직접적인 기여는 하지 못했지만, 정규시즌과 디비전시리즈를 거치면서 김병현은 위기마다 세이브를 따내며 월드 시리즈 진출까지 이끌었다. 애리조나 팬들은 비록 월드 시리즈에서 블론세이브를 기록했어도 김병현의 공을 인정해 그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우승 직후 랜디 존슨과 함께 월드시리즈 MVP를 수상한 커트 실링은 김병현에게 "앞으로 애리조나를 책임질 젊은 투수가 될 것이다."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2001년 월드 시리즈는 김병현의 블론세이브 2개로 2000년대 최고의 월드 시리즈로 남게 되었다.

시련을 겪고 더욱 강해진 김병현의 행진은 거침이 없었다. 2001년 월드 시리즈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다음 해인 2002년에는 풀타임 마무리로 뛰면서 2.04의 방어율과 36세이브를 기록하면서 자신의 커리어 하이를 달성했고 올스타에도 선정되며, 올스타전 그라운드를 누볐다. 2001년과 2002년 당시 김병현의 구위는 당해낼 타자가 없었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메이저리그 타자들에게도 생소한 언더핸드 폼에서 올라오는 변화 큰 '프리즈비 슬라이더'는 상대타자들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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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현과 오승환, 두 전설의 만남>

2016년 성공적으로 메이저리그에 장착한 오승환과 비교해본다면 그의 활약은 더욱 두드러진다. 99년과 02년까지 일명 ‘스테로이드 시대’로 불리는 선수들 틈바구니에서 김병현의 WPA(승리 확률 추가, Win Probaibilty Added)는 평균 1.62였다. 특히 전성기였던 2001년과 2002년의 WPA는 각각 3.56, 3.40에 달했다. 오승환의 지난해 WPA인 2.56과 비교해본다면 김병현의 가치는 더욱 올라간다. 그는 불펜으로서 마무리로서 계속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2003년 갑자기 선발투수로의 전업을 선언했다. 갑자기라 할 수 있었지만, 김병현은 이미 메이저리그 데뷔 시기부터 선발투수 자리를 원했고, 마이너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콜업될 당시에도 김병현은 선발투수로 두각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2년간 마무리 자리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피칭 끝에 선발 자리를 얻어냈고, 우여곡절 끝에 얻어낸 선발 자리에서도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2003년 4월15일 콜로라도와의 경기에서 6회에 프레스톤 윌슨의 부러진 배트에 오른쪽 발목을 맞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부상으로 투구 밸런스가 무너졌으며 결국 커리어를 갉아먹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밥 브랜리 감독과의 불화도 그의 발목을 잡았고, 결국 5월 30일 보스턴으로 트레이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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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시절의 김병현>


김병현은 이적 후 한 달간은 선발로 뛰었으나 팀의 요구에 따라 7월부터 다시 마무리 보직을 맡아 보스턴을 포스트시즌 진출로 이끌었다. 이적 후 19차례의 세이브 기회에서 16번 세이브에 성공. 선발 12경기에서 3승6패 평균자책 3.38, 피안타율 0.231을 기록했고 구원에서는 6승4패 16세이브 평균자책 3.28에 피안타율 0.218의 호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2003년 디비전시리즈에서 펜웨이 파크의 홈 팬들이 야유를 하자, 손가락 욕설로 맞대응을 했고 논란이 커지자 당시 보스턴 감독이었던 그래디 리틀 감독은 김병현을 포스트시즌 엔트리에 제외하게 된다. 수준급 불펜투수를 잃은 보스턴은 그해 리그 챔피언십에서 뉴욕 양키스에게 패하는 수모를 겪고 말았다.

이듬해인 2004년에는 비시즌 개인적인 일까지 겹치며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단 7경기에만 등판해 2승 1패 5.23의 평균자책점에 그쳤다. 하지만, 팀이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2004년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하면서 두 번째 우승 반지를 획득했다. 비록 활약을 거의 하지 못했지만, 동양인 최초의 양대리그 우승자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아직까지 양대리그를 통틀어 모두 우승을 경험한 동양인은 아직까지 김병현을 제외하고는 탄생하지 않고 있는 영광스러운 기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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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 첫 10승을 달성한 플로리다 시절>

■ 저니맨 신세, 하지만 야구가 있는 곳에 그가 있었다.


그 후 2005년 2월까지 지리한 트레이드 협상 끝에 그는 3월 30일 콜로라도 로키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콜로라도에서도 선발과 불펜을 오갔으나 보스턴 시절부터 계속되었던 부상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2005년 5승12패, 평균자책점 4.86으로 시즌을 마친 김병현은 2006년에는 풀타임 선발로 출전, 8승 12패 평균자책점 5.57로 어느 정도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는 김병현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끊임없이 트레이드 카드에 이름이 올랐고 결국, 2007년 5월 로키스에서 플로리다 말린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이후 안정적인 모습으로 전반기 5승을 쌓으며, 선발 자리를 꿰찼으나, 말린스는 그를 웨이버 공시했다. 그의 친정팀이었던 애리조나가 클레임을 걸어 다이아몬드백스 유니폼을 입었지만, 전 소속팀이었던 플로리다 전에서 채 1이닝도 소화하지 못하고 4실점 하는 등, 2차례 선발등판에서 2⅔이닝 11안타 9실점(7자책점)이라는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며 21일만에 다시 플로리다로 복귀했다. 이러한 불안한 행보 속에 10승을 하긴 했어도 그의 성적은 자연 나쁠 수밖에 없었다.

2008 시즌은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시작했으나, 시즌 직전 퇴단했다. 김병현의 불운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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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현은 야구를 위해선 독립리그도 마다하지 않았다>


■ 야구를 위해서 독립리그도 마다하지 않은 야구인(野球人)

2009년 그의 눈은 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향해있었다. 2006년 제1회 WBC에서 대한민국의 4강 신화의 선두에 섰던 김병현은 2회 대회를 앞두고 대표선발에 대한 강한 열망을 보였고, 개인적인 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표팀 소집일 여권을 잃어버리는 불운이 그를 덮쳤고, 결국 그는 WBC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

이후 김병현은 2009년 한해를 몸만들기에 온전히 쏟았다.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개인 트레이너와의 훈련을 통해 2010년 스프링캠프에 도전을 준비했으며, 미국 한인 사회인야구에서 종종 공을 던졌다. 메이저리그, 마이너리그, 사회인야구까지 야구가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그가 있었다.

2010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지만, 훈련 강도와 등판 간격에 이견을 보여 스프링캠프 도중 퇴단했다. 이후 미국 독립리그에 속한 오렌지 카운티 플라이어스에 입단하게 되었다. 점차 구위가 올라오고 제구력도 좋아졌고, 10경기에 등판해 3승 1패 평균자책점 2.56을 기록하며 무척 좋은 결과를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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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쿠텐 시절의 김병현>


■ 미국을 떠나 일본으로 한국으로

미국 메이저리그부터 독립리그까지 모두 경험한 김병현이 향한 곳은 일본 NPB였다.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 1년 계약을 맺었다. 신임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마무리로 내세울 것이라 기대감을 표했다. 하지만, 그는 시즌이 끝나도록 1군에 콜업되지 못했다. 당시 마무리었던 라이언 스파이어가 좋은 성적을 거두며 강한 인상을 심어줄 동안 김병현의 몸상태는 아직 올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일본에서 특별한 출전기회를 얻지 못한 채 2군 생활만 하다가 귀국, 결국 11월 16일 라쿠텐 측으로부터 공식적인 방출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2012년 김병현의 행선지는 대한민국이었다. 김병현의 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넥센 히어로즈와 1년 16억(계약금 10억 연봉 5억 옵션 1억)에 계약했다. 넥센은 김병현을 시즌 초부터 붙박이 선발 자원으로 낙점하고 김병현의 실력에 큰 기대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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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현과 추신수의 환담 그는 언제나 유쾌했다>

하지만, 시즌 내내 제구가 잡히지 않아 고생을 했다. 다발적으로 당한 부상이 그의 투구 밸런스를 완전히 망가뜨린 것이었다. 특히 변화구의 각이 제대로 나오지 않은 탓에 좌타자에 취약했고,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는 이를 의식한 듯 삼성이 모두 좌타자라인으로 그를 공략하기도 할 정도로 한국 무대에서도 고전했다.

제구 불안은 2013년에도 계속 되었고, 15경기에 등판해 5승 4패 평균자책점 5.26을 기록하며 넥센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고향팀인 KIA 타이거즈로 이적했다. KIA에서도 그는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공을 뿌렸다. 하지만, 그의 시련은 계속되었다. 2014년 3승 6패 7.10, 2015년 승없이 5패 6.98의 평균자책점, 2016년에는 2군에서도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며 시즌이 끝난 직후 방출되고 말았다. 결국 한국프로야구 생활동안 거둔 성적은 11승 18패 5홀드 평균자책점 6.25 그는 아직 불운의 터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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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현의 메이저리그 발자취를 알 수 있는 싸인볼들>

■ 다시뛰는 김병현, 야구가 있기에 그가 있다

야구장에서나 야구장 밖에서나 그의 성격은 한결같았다. 늘 유쾌하고 거침없는 말로 주변 사람들에게 친근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2006년 WBC 이치로의 ‘30년 발언’이 나온 이후 가진 인터뷰에서 “만화를 많이 본 것 같다.”라는 답변은 그의 유쾌한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허구연 위원도 김병현에 대해 “유쾌하고 재미있던 친구”라고 회고했다. “어떤 좌절이 있어도 초연하게 대처하고 그 좌절을 또 다른 기회로 바꿨다“는 것이 바로 허구연 위원이 말한 김병현의 모든 것이었다.

그는 야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 자택이었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훈련장인 플로리다의 마이애미까지 직접 운전해서 갔을 정도로 야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가던 그였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그의 야구는 계속되었다. 현재 김병현은 은퇴와 선수생활의 기로에서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야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야구가 있기에 김병현이 존재하며 야구에 대한 열정은 언제나 김병현을 지탱해 올리는 힘이 되었다. 


하지만, 현재 김병현의 상황은 은퇴와 선수생활의 기로에 서있다. 자신의 꿈이 이루어진 미국 애리조나에 머물면서 자신의 거취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11월 KIA에서의 퇴단이 확정된 직후 "완벽한 몸상태로 마지막 도전을 하고싶다"라고 말하던 그였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야구뿐이다.


2001년 김병현은 미스틱 & 아우라를 월드 시리즈 우승으로 말끔하게 털어냈다. 과연 2017년의 김병현도 16년 전과 마찬가지로 그의 곁에서 춤추고 있는 불운을 모두 떨쳐버릴 수 있을까? 그는 해피엔딩으로 자신의 자서전을 끝맺음하기 위해 야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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