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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며칠동안 고민하고 마음 졸였던 ‘숙제’를 끝낸 기분입니다. 홀가분하기가 이를 데 없네요. 경기장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와 지난 주 ‘개그콘서트’를 다운받아 보는 이 기분이란!

주위는 물론 언론에서도 ‘쿠어스 필드는 투수들의 무덤’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를 해주시는 바람에 내심 적잖은 부담으로 다가왔던 게 사실입니다. 그동안에는 잘 피해 다녔는데 ㅎㅎ.

사실 오늘 등판하기 전에는 살짝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 워밍업을 위해 포수 부테라와 허니컷 투수코치가 지켜보는 가운데 불펜피칭을 하는데, 단 한 개의 공도 스트라이크 존에 꽂히질 않는 겁니다. 분명 똑같은 투구 폼과 스피드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이 모두 높게 제구됐고, 구속도 기대에 못 미쳤습니다.

‘이게 뭐지?’하는 생각에 걱정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지금까지 야구하면서 오늘처럼 경기 전 불펜피칭 때 ‘멘붕’ 온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쿠어스 필드라고 해도 저 혼자만 공을 던지는 것도 아니고, 상대 투수도 다 똑같은 환경에서 경기를 펼치는데, 제 공이 제구가 안 된다면 정말 큰일 난 것이죠.

그래서 1회 말 마운드에 오르며 ‘안 되겠다. 오늘은 땅바닥을 보고 던지자’라고 생각했고, 포수 미트보다 더 낮게 던지려 했던 게 제구가 되면서 경기의 흐름을 여유있게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공을 던질 때마다 불편하게 느껴지는 기분이 쿠어스 필드라서 그런 건가요? 타자들이 치는 타구에서는 그런 이질감을 못 느끼는데, 제가 던지는 공에선 원래 제 공이 아닌 것 같은 혼란스러움이 2회에 투구수를 30개나 늘린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경기 직전부터 불안한 조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데에는 1회부터 우리 팀 타선이 일찌감치 점수를 올려줬기 때문입니다. 특히 디 고든! '저엉말' 사랑스런 선수입니다. ㅎㅎ 저한테는 최고의 1번타자이죠. 출루했다 하면 도루로 상대 투수를 흔들어 주고, 1회에도 3루타를 치면서 득점까지 올린 데다 시즌 초반보다 수비에서도 한결 부드러움이 돋보이는 터라 예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클럽하우스 내에서도 성격 좋기로 유명한 팀메이트입니다. 성실하고 착하고 선수들과도 잘 어울리고…, 저한테는 참으로 든든한 조력자 중 한 명이죠.

사실 우리 팀이 홈에서 연패를 거듭하며 팀 분위기가 싸 했던 게 사실입니다. 선수들 관계에서 어떤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경기 결과가 좋지 않다 보니 감독님도 선수들도 스트레스가 상당했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오늘 같은 팀 플레이는 제가 승리를 거둔 것보다 더 큰 수확을 얻은 것 같아 만족도가 상당히 높습니다.

아, 그리고 오늘 제가 아주 오랜만에 동산고 4번타자 출신의 위용을 자랑했습니다. ㅎㅎ 그동안 마운드가 아닌 타석에서 ‘2년차 징크스’를 겪고 있었는데, 오늘 번트 성공과 2루타에다 득점까지 올리는 바람에 선발투수들의 타율 경쟁에서 ‘드디어’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번 달 그레인키로부터 500불을 사수하기 위해선 다음 경기에서도 오늘의 신바람을 계속 이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다음 등판 예정 팀이 신시내티 레즈라면서요? 선발 투수가 조니 쿠에토? 흠…, 아니 지난 번에 맞붙었으면 되지, 뭐 또 다시 만나게 됐대요? 조니 쿠에토는 자주 보고 싶지 않은 투수이거든요.

오늘 2루타를 치고 디 고든의 적시타로 여유있게 홈을 밟은 후 더그아웃으로 들어오자, 선수들이 저에게 산소마스크를 씌우려 하더라고요. 쿠어스필드 더그아웃에 산소마스크 있는 거 아세요? 우리 선수들도 수비하고 들어오면 몇몇은 산소마스크 쓰고선 호흡을 고르곤 했습니다. 그만큼 체력이 달린다는 거겠죠. 제가 오죽했으면 마운드에서 잠시 주저앉았다가 일어났겠습니까. 하지만 전 경기 끝날 때까지 산소마스크는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경기에서 심판의 스트라이크 존에 대해 지적하시는 분이 많던데, 솔직히 저도 조금 헷갈렸어요. 볼이었던 공이 스트라이크가 되고, 스트라이크였던 공이 볼이 되니까 어떻게 던져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뭐, 그래도 아직 ‘짬밥’ 안 되는 선수가 뭐라 할 수 있겠습니까. 심판이 일관성 없게 콜을 하면 저도 일관성 없게 공을 던지면 되는 거니까요. ㅎㅎ 제가 맞춰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오늘 제가 콜로라도 타선 중 가장 신경을 쓴 타자들은 찰리 블랙몬과 트로이 툴로위츠키입니다. 워낙 제 공을 잘 치는 선수들이라 그들에 대해 연구도 많이 했고 볼배합에도 가장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물론 블랙몬에게 내야안타를 맞긴 했지만, 빗맞은 안타였고, 툴로위츠키한테 맞은 안타 2개도 영양가는 없었습니다.

오늘 선발 등판을 마치고 클럽하우스로 들어와 얼음 찜질을 하면서, 7이닝을 선방하고 들어온 브랜든 리그와 아직 재활 중인 유리베, 그리고 트레이너와 함께 TV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콜로라도의 마무리 투수로 올라온 선수가 라트로이 호킨스이더라고요. 마틴 형이 말하길, ‘저 선수 나이가 몇 살인지 알아? 마흔 두 살이야. 1995년 미네소타 트윈스에 입단 후 정말 많은 팀을 옮겨 다녔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헐, 마흔 두 살인데 나보다도 공이 더 빠르네’.

스물일곱 살의 전 오늘 최고 구속이 90마일 정도 나온 것 같은데, 라트로이 호킨스는 95마일, 96마일을 던지니 정말 후덜덜한 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죠. 라트로이 호킨스 선수를 보며 자꾸 ‘향운장’ 최향남 선배가 생각이 나는 건 왜일까요? 마흔 두 살의 류현진은 그 나이에도 공을 던지고 있을까요? 일기 다 썼으니 ‘개콘’이나 보고 잠들어야겠습니다.

*이 일기는 류현진 선수의 구술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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