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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대한 보디빌딩 협회 장보영 회장은 강경원, 이승철의 아놀드 클래식 출전을 승인했다. 아놀드 클래식은 1989년에 시작된 대회로 일세를 풍미했던 보디빌더이자 헐리우드의 톱스타, 그리고 캘리포니아주 주지사였던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주관하는 스포츠 이벤트로 체조와 탁구, 레슬링, 무술, 양궁, 파워리프팅, 양궁등의 종목에서 경쟁이 이루어진다. 보디빌딩의 경우 아놀드 클래식의 위상은 대단히 높다. 세계 보디빌딩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양대 이벤트가 바로 미스터 올림피아와 아놀드 클래식이기 때문이다. 당시까지 보디빌딩 협회는 소속 국내 선수들이 아놀드 클래식에 출전하는 것을 불허하는 것을 방침으로 삼고 있었지만 장보영 회장의 대에 이르러 혁신이 이루어 진 셈이다.


2014년 3월 2일 새벽,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의 아놀드 클래식 현장에서 낭보가 전해졌다. 이승철은 -100KG급에서, 강경원은 -90KG급에서 각각 우승을 차지 했다. 뿐만아니라 강경원은 전 체급을 아우르는 대상인 그랑프리로 선정되었다. 아시아인으로써는 최초로 이룩한 쾌거였다. 장보영 체제의 대한 보디빌딩 협회와 강경원-이승철의 삼각편대가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던 순간이었다. 


1973년생으로 올해 42세인 강경원은 본인의 반평생을 너머 함께한 금속제 운동기구들과 완벽한 일체감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그는 무겁고 단단했다. 덤벨과 바벨을 다루는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서 몰아일체의 경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강철이었고 강철이 바로 그였다.


(영상) 2014 올스타 클래식, '살아있는 전설' 강경원의 특별무대


강경원의 고향은 서울의 마장동이다. 20세 때 인천대에 진학하면서 선수등록을 인천에다 했고 그후 그는 20년이 넘도록 인천 소속으로 활동중이다. 이 부분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를 인천 출신으로 아시는 분들이 많으세요, 저도 이제는 제가 인천사람 다 됐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 인생의 출발은 서울이었지만 제가 꿈을 키워오고, 땀을 흘리고, 성적을 거두고 했던 거의 모든 것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니까. 절반이상 인천사람이라 해도 좋을겁니다. 


부친은 그가 중학교 3학년때 세상을 떠났다. 이후 강경원의 어머니가 식당을 운영하며 강경원과 그의 여동생을 뒷바라지 했다. 사춘기가 한창이었고 아직 철이 다 들지 않았던 강경원은 그 시기를 아래와 같이 추억했다.


당시에는 '아들에게 이렇게 밖에 못해주나?' 싶기도 하고 불만도 있고 그랬어요, 그런데 저도 나이들고 애들키우고 하다보니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이 새삼스럽네요. 아버지 막 돌아가시고, 그 후에 어머니가 어떠셨는지를 생각해보니까, 그때 저희 어머니 참, 남자같으셨거든요. 옷입는 것도 그렇고, 말씀하시는거나 행동 하시던 것도.... 그때는 몰랐는데, 솔직히 '우리 엄마 왜 저러냐' 라는 생각도 있었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저희를 위해서 여성성을 포기하셨던 거죠, 어머니 친구분들이 미용실가고 백화점 가실때 저희 어머니는 가게 운영하고 우리들 해먹이고 입히고 하셨으니까. 저희 어머니, 대단하신 분입니다. 원래는 화훼쪽 일을 하시던 천상여자셨는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여장부로 변신하신거였거든요.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어릴 때는 동생이나 저나 서로 불만인 부분만 가지고 힘들어했는데, 나이들어 돌아보니, 어머니 아니었으면 정말 저의 오늘이 어땠을지, 그저 감사하는 마음 뿐입니다.


어린 강경원은 장난꾸러기였고 타고난 운동선수였다. 초등학교 때 부터 축구부로 활동했지만 축구부 활동은 경제적으로 부담이 많이 되었기 때문에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태권도로 종목을 바꾸었다. 그는 부친이 영면에 들던 중학교 3학년 때 까지 태권도를 했다. 원래는 태권도 특기생으로 고교를 진학하려 했으나 부친상에 부상까지 겹치면서 원하는 학교로 갈 수가 없었다. 가장의 부재와 부상에 이은 목표의 상실, 그리고 고교생활이라는 질풍노도. 80년대 후반의 강경원은 학원가의 어두운 그늘로 편입될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집 근처의 교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서북공고라고, 소위 말하는 깡패학교중 하나였어요. 불량스러운 친구도 좀 있었는데, 저는 그냥 운동을 하고싶었어요. 운동을 계속 하고싶다는 욕심이 컸습니다. 다리가 좀 괜찮아 지면서 태권도를 다시 하려고 했습니만, 그것때문에 학교를 다시 옮기기도 어렵고, 또 학원체육이라는게, 조금 쉬다보면 금방 처지기도 하고 솔직히 굉장히 속타더라고요. 그것때문에 고민 많았습니다. 그래도 넋놓고 있으면 안될것 같아서 합기도 도장을 다녔고 YMCA에서 체조도 배우고 그러고 있었죠. 그 때 또 사춘기다 보니까 알통나오는게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운동하는 애들중에 반정도는 헬스장을 다니고 그랬어요. 저는 우연치 않게 한 친구가 한남동에 살았는데, 한남동 쪽에 한번 다녀보지 않겠냐고 해서 따라갔어요. 그런데 거기가, 그 당시 한동기 선배님하고 창용찬 이사님이 운영했던 창세스였습니다.거기 국가대표 하시던 분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그 당시 갔을 때는 제가 아무 것도 모를 때니까, 그냥 몸이 좋구나하지 국가대표인지 뭔지 모르잖아요, 그렇게 우연치 않게 가서 뭣도 모르고 운동을 하고 있었죠. 거기서 운동을 하다보니까 선배들이 시합을 뛰고 시합성적을 가지고 대학교도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귀에 박히면서 이걸로 대학을 가야겠구나 싶어가지고, 합기도, YMCA 기계체조 하는 것 다 관두고....


고교 1학년 7월, 강경원의 진로가 결정되었다. 쉽지는 않았겠지만 그는 비교적 빨리 상황을 정리한 셈이다. 고교 2학년 때 그는 춘계 선수권을 따라가면서 선수생활을 시작한다. 당시의 감회나 느낌, 혹은 결심이나 각오를 물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무덤덤했다.


특별한 느낌은 없었습니다. 그냥 이거해볼까? 생각으로 한거죠.


한남동의 창세스에서 한동기를 비롯한 국가대표급의 기라성같은 선배들로부터 영향을 받은거냐는 질문에도 강경원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꼭 그런것도 아니예요, 당시 그분들은 워낙 엄청나셨으니까. 함께 운동을 할 레벨도 아니었고 그냥 먼발치에서 구경을 하는 정도였는데, 영향을 받고 그런건 모르겠습니다. 


그럼 보디빌딩에 어떤 매력을 느끼셨느냐고, 혹시 아놀드 슈왈츠 제네거나 실베스터 스탤론같은 당시의 근육질 슈퍼스타들에게 영감을 받은거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아래와 같았다.


근육나오고 알통커지는게 좋았어요. 아놀드, 스탤론 그런사람들도 저는 사실 잘 몰랐고요. 그냥 힘쎄지고 하니까...


강경원은 고교시절부터 각종대회에서 성적을 내면서 보디빌딩 특기자로 대학진학을 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당시의 행정처리 시스템은 정비가 잘 안되었던 상황이았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부친의 부재와 바쁜 어머니, 그리고 학교측의 관심부족은 강경원에게 '재수'라는 고난을 안겨주었다.

 

1년 재수해서 대학을 갔어요그 당시에는 보디빌딩 특기자를 뽑는 대학이 지금처럼 많은게 아니고 저희 때 과특기나 특기자를 처음 뽑았습니다중대나 인제대그 두 개 학교밖에 없었어요인천대 같은 경우는 연제호 선배님이 과특기를 뽑는다고 말씀해 주셔서 거기를 지원했는데, 그때 아버지 안 계신 부분때문에 조금 힘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문화관광부에다가 학교에서 신청을 해줘야 했거든요. 그런데 보디빌딩이 개인 운동이고 당시에는 아직 학교측에서도 크게 관심을 갖는 종목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원서 낼 때 보니 특기자증을 마련 못한거죠지금은 협회에서 전적증명서 다 띄어주고 갔다주고 하는데 그 당시에는 문화관광부에서 내가 특기자라는 증명을 받고 증명서를 받아서 직접 냈어야 했어요. 여기저기 다녀야 하고 과정이 복잡햇습니다. 그걸 제출해야하는데 그런 부분에서 진행이 잘 안되는 바람 재수를 했죠.


재수생 시절의 강경원은 다시한번 사바세계와 접촉하게 된다. 압구정동을 무대로 낮에는 커피숍, 밤에는 주점의 서빙 아르바이트를 한 것. 그래도 그는 술을 마시거나 이성에 탐닉하지 않았다. 당시 대한민국의 에피큐리안 문화를 선도하던 압구정의 분위기 조차도 강철의 수도승 강경원을 흔들기는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대해 강경원은 아래와 같이 술회했다.


알바비 많이 준다고 해서 친구 소개로 압구정에서 아르바이트 했습니다. 술은 마시지 않았어요. 예쁜여자들이 많이 보였지만 저는 그것보다는 학교에 못가는게 마음이 허전했거든요. 어떻게든 학교로 돌아가야 했으니까, 아르바이트가서는 일만 했습니다. 


강경원은 위의 시기, 즉 재수생 시절 초반의 6개월 정도를 '방황'이라 표현했다. 그가 자신에게 얼마나 엄격한지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한동안의 성실하고 모범적인 방황을 끝낸 강경원은 다시 바벨을 잡았다. 그리고 YMCA 보디빌딩 대회 일반부에서 3위에 입상하며 특기자 자격을 확보했고 인천대로 진학했다. 학생 강경원의 미스터 코리아 첫 도전은 94년 6월이었다. 같은해 7월 그는 군복무를 위해 입대했다.


94년 미스터 코리아에서 예선탈락하고 방위를 갔죠저희 때는 부사망독자라고 해서 18방위가 나왔습니다제가 한 살만 더 많아도 6방위가 나오는 건데....저희때는 그랬어요거의 마지막 방위에요.


당시의 방위복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동사무서등의 공공기관에서 근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강경원은 운동경력과 남다른 체구 때문에 조교로 차출되었다. 하지만 그 덕에 강경원은 1년 6개월간 개인운동을 전혀 하지 못하게 되었다. 선배였던 연제호의 공릉동 체육관에 가끔 들러 술잔을 기울인 것이 다였고 강경원의 인생에서 술을 취하도록 마신건 이때가 유일했다.


그때는 많이 마셨어요. 소주의 쓴맛을 알게 되었다고 해야하나. 지금은 취하도록 마시지 않습니다. 운동도 운동이고, 또 결혼하고 나서는 그렇게 마시면 안되겠더라고요.


운동선수에게 20대의 1년 6개월은 매우 길고 중대한 시간이다. 특히 성인 무대에 갓 올라온 선수들에게 있어서 그 정도의 시간은 활용여하에 따라 특급으로 발전할 수 있는 중대한 전기를 마련할 수도, 혹은 중심권에서 완전히 멀어져 버릴 수도 있을만큼의 시간이다. 강경원에게 1년 6개월의 손실은 어느정도였는지를 질문했다.

 

96년 1월 3일날 소집해제가 되었습니다운동을 못해서 학교 복학을 2학기때 했어야 했는데, 직장다니던 사람은 다시 다니고 공부 하던 학생은 책을 다시 잡으면 될텐데, 운동하던 사람이 운동을 한참이나 못하다가 다시 하려니까,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진로에 대한 고민을 좀 했습니다. 운동을 계속 해야 하나? 아니면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하나하고요.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운동을 한다는 것, 그거 꽤 고민 되거든요. 특히 부유하지 않은 환경에서 특별한 성적을 내지도 못하면서 군대까지 대녀오고 나면 회의감이 드는게 사실입니다. 과연 할 수 있을까? 라는 두려움이 생기는게 당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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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강경원은 다시한번 갈림길에 섰다. 아버지의 사망과 불의의 재수, 방위복무치고는 운이 없었던 부분까지, 20대 초반의 젊은이 치고는 고민도 충분했고 이제 그만 편한길을 선택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을 시점이었다. 남들처럼 직장을 다니면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도 어찌보면 좋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그에게 포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제가 체육관에서 알바하면서 2학기 복학했고, 그러면서 유니버시티 대회를 준비했어요. 유니버시티 대회에서 제가 제 체급에서 1등하면서 베스트 포즈상을 받았고, 당시 최재덕 선수가 대회 그랑프리를 수상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대표급 선수들이 전지훈련 가는데 제게도 합류하겠냐고 하시더라고요, 그 전지훈련에서 저는 보디빌딩 선수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전지훈련의 장소는 하와이였다. 그곳에서 그는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보조하면서 그들의, 그리고 보디빌딩의 진면목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고등학교 때 한동기 선배님을 뵈었지만 운동을 같이 하는 레벨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전지훈련을 따라가면서 제가 막내고 하니까 보조도 해드리고 수발도 들고 하면서 같이 운동을 했었죠. '아 운동을 이렇게 해야 하는 구나'는 그때 알았어요. 선배님들의 영향은 그때 제대로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 전까지는 제가 선수라는 자각이 그다지 없었고, 또 보디빌딩에 대한 인식도 많이 부족했었던것 같아요. 그런데 거기서 진심으로 보디빌딩에 모든 것을 바치시는 선배님들과 함께 지내면서 뭔가 새로운 시각과 느낌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갔다와서 코치아카데미 등록을 하고 학교를 안 갔어요아, 안 간게 아니고 못갔죠. 머리속에 운동생각밖에 없었으니까, 아무것도 안보이고 아무 생각도 안나도 오직 운동밖에 없었습니다. 그때가 25살 이었어요그때부터 25, 26, 27살 3년은 미친놈처럼 운동만 했습니다.


강경원의 첫번째 몰입기는 97년 부터 99년 까지였다. 그는 보디빌딩 국가대표 훈련장이라 해도 좋을 코치 아카데미에 매일 아침 출근도장을 찍었고 저녁 7~8시까지 머무르며 마지막 남은 체력의 한방울까지도 그곳에 떨구고 집으로 돌아갔다. 최고레벨의 선수들과 먹이사슬의 상층부를 향해 돌진할 준비가 된 후기지수들의 공동체였던 코치아카데미, 당시 그곳의 분위기, 특히 탑레벨 선수들 간의 치열한 경쟁심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강경원의 대답은 흥미로웠다.


경쟁, 솔직히 대단했죠, 밖에서는 친한 선후배고 서로 아껴주는 사이였지만 내부에서는 모두 같은 목표를 가지고 노력하는 경쟁자인게 맞았습니다. 운동을 서로 더 많이 하려고 무지하게 노력했고 또 선배님들이 노하우를 웬만해서는 가르쳐 주시지 않았어요. 특히 식사를 어떻게 하는건지, 보충제는 어떻게 사용하는건지 그런 부분은 정말 배우기 어려웠죠. 특히 시합이 다가오면 서로 아무말도 안하는 무거운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그 분위기를 이겨내지 못하면 낙오되는 거였어요. 


모든것은 어깨너머로 배워야 했는데, 운동은 무조건 많이 하고, 선배가 하는대로 보고 따라하고 그랬습니다만, 사실 중요한 것은 강약조절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죠. 선배들은 강약조절을 하면서 하시는건데 저는 눈으로만 보고 강하게만 하다가 몸에 무리가 오고 그런적도 많았습니다. 또 사실 선배들중에 짓궂은 트릭을 사용하시는 분들도 계셨어요. 도시락을 어마어마하게 싸오시는거죠. 그러면 저희들도 아, 저정도는 먹어야 되는구나 싶어서 따라한단말이죠, 근데 그 선배는 사실 도시락을 다 먹지 않고 대부분 남겨갔던겁니다. 우리는 다 먹어야 하는줄 알고 꾸역꾸역 다 먹었고요, 그러니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보디빌더식이라고 해도 그정도로 먹으면 다이어트가 안되거든요. 노하우를 배우기도 힘들고 또 눈으로 훔치려니 트릭에 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재미난 추억입니다. 


물론 선배님들 중에는 노하우를 선뜻 알려주시고 또 제가 잘 못하고 있는 부분을 예리하게 지적해주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제가 하루에 닭가슴살을 무려 2KG씩 먹고 있으니까 어느날 한동기 선배님께서 "너 닭가슴살을 2KG이나 먹으면서 무슨 다이어트가 되겠냐?, 그거 다먹어 봐야 변만 많이 나오지, 줄여라"그러시더라고요. 그 말씀을 듣고 줄이니까 또 배가고파서 운동이 잘 안되는겁니다. 체중도 쭉쭉 빠지고. 그런데 어느정도 빠지더니 안정을 되찾게 되고 적당량이 어느정도인지를 알게 되니까 더 효율적으로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동기 선배님 같은 경우는 70KG급에서 뛰셨는데, 세끼밖에 안 드시고 한번 드실 때 닭가슴살을 100g짜리 한쪽 밖에 안 하셨어요그런데도 근육량이 그만큼 유지되는 걸 보면 어느정도 근육량이 자기 몸에 배면 음식을 적게 먹어도 근육량이 유지가 되는 것이죠. 또 덜먹으면 소화기관의 부담도 적고 또 조금씩 먹는 버릇을 들이면 소화기관이 영양소를 흡수하는 효율이 더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즘 90KG급에 맞춰서 운동하는데 하루에 닭가슴살을 한 800~900그람 정도 먹습니다. 


1999년 강경원은 미스터 코리아에서 우승했다. 하와이에서의 각성과 이후 3년간의 몰입이 대회에서의 결과로 고스란히 돌아온 셈이다. 우승의 소회에 대해 강경원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웃음) 제가 표현력이 부족합니다, 말도 그렇게 유창하게 잘하지 못하고....날아갈 것 같은 기분? 그런데 가장 기뻤던 건 어머니가 보시는 앞에서 우승을 한 거였어요. 당시 제가 운동을 10년차 정도였는데 대회장에 어머니께서 오신게 처음이셨거든요. 동생이랑 어머니랑 부둥켜 안고 막 우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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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미스터 코리아 우승 후 기념사진


우승의 기쁨은 잠시였다. 미스터 코리아가 된 이후 강경원에게는 두가지 고민거리가 생겼다. 첫째는 식욕을 통제할 수 없게된 심리적 이상상태였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미스터 코리아 하려면 1월부터 다이어트 시작해야 한다고, 대회가 6월이었는데, 전 또 순진하게 그 말을 믿고 1월부터 다이어트 시작했습니다. 근데 보통은 8주에서 12주 정도 전에 시작하거든요. 그게 정석입니다. 저는 근데 뭐 한 26주 다이어트를 한거예요. 너무 힘들었습니다. 운동에 대한 욕심은 어마어마 했는데 엄청난 스케쥴을 소화하면서 다이어트까지 너무 일찍 시작해가지고, 막상 대회가 끝나고 나니까 미치겠는거예요. 식욕이 너무 강해져서 음식을 보면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정신없이 먹고, 먹고나서 후회하고, 더이상은 안먹어야지 하고 다짐을 한지 몇시간 만에 또 폭식 하고, 그러면서 제 자신에 대한 믿음도 흔들리고. 심리적으로 정말 괴로운 시기였습니다.


두번째 문제는 주변의 시선이었다. 미스터 코리아 우승 이후, 강경원에게 주변의 시선이 쏠리면서 그에 대한 뒷말들이 나오고 그것이 본인의 귀에도 하나씩 들려오는 것이 또하나의 큰 스트레스였다.


성취감이 있으면 후폭풍도 있다고, 미스터 코리아를 하고 난 뒤 강경원이라는 이름이 알려지면서 좋았던 것보다는 불편한게 더 많았던것 같아요. 제 행동과 말이 사람들의 얘기 거리가 되고, 좋은 얘기보다는 주로 안좋은 얘기가 퍼지더라고요. 예전에는 제가 옆으로 인사하던 앞으로 인사하던 상관도 안하던 사람들이 미스터 코리아가 되니까 "너는 인사를 왜 옆으로 하냐, 인사를 왜 안하냐, 변했다..." 등등 해서 그런 말들이 많았습니다. 처음으로 그런 위치가 되니까 그런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승리의 이면에서 불어닥친 후폭풍은 강경원에게 예상치 못한 시련을 안겨주었다. 본능적인 욕구를 고도로 절제하며 한걸음 한걸음을 무겁게 내 딛어온 그에게 통제를 벗어난 이상식욕과 주변의 가벼운 입놀림은 견디기 힘든 고난이었다. 강경원의 슬럼프는 1년이상 지속되었다. 그리고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보디빌딩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아시안 게임에 출전할 국가대표가 되면서 더이상 개인적인 문제에 빠져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표팀에는 한동기 선배님과 조왕붕 선수를 비롯한 거물들이 중심을 잡아주셨는데, 덕분에 저도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었습니다. 보디빌딩 국가대표만 해도 엄청난 부담감을 가지게 되는 자리지만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아시안게임에 나간다고 하니까 긴장감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2002년 아시안게임 보디빌딩 부분에는 전체 45개국중 20여개국이 참가했다. 아시안 게임 중량급에서 한국 선수가 우승하는 것은 어렵다는 예견이 대세였다. 80KG급에서 강경원은 아시아 선수권에서 2~3권에 머무르고 있던 중이었다. 아시안게임에 출전하던 당시 어느정도의 성적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대회 과정은 어땠는지를 질문했다.


중동세가 강했어요. 워낙 몸들이 커서, 금메달은 솔직히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은,동중 하나는 가져오고 싶었어요. 1차 예선을 전날하고 본선이 다음날이었는데, 예선때는 그렇게 긴장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탑 6가 메달을 놓고 경쟁하는 본선때는 압박감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한동기 선배님께서 전날 금메달을 따시고 제 시합때 펌핑하는거 봐주시고 그래서 큰 도움을 받았어요. 


강경원은 2002년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된다. 발표 당시의 감격에 대해 물었다.


재미 없다고 그러실것 같은데, 솔직히 조금 김새는 얘기지만 우리나라에서 하는 대회니까, 마지막 포징을 끝내고 무대 뒤로 돌아오니까 임원분들께서 저보고 금메달이라고 말씀을 해 주시더라고요. 근데 믿어지지가 않아서 반신반의 하고 있었죠. 그러다가 '금메달 강경원'이라는 발표가 막상나니까 무대로 나가면서 울음이 터질것 같았습니다. 참느라고 혼났어요. 어머니랑 동생은 관중석에서 펑펑 울고있었고요. 태극기 올라가면서 애국가가 들리는데 그 기분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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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0월 6일 MBC 뉴스데스크에 보도된 강경원의 금메달 획득 소식


강경원 선수 아시안게임 금메달 획득 MBC 뉴스 클립 보러가기 (클릭!)


전국체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전국 체전은 국내 보디빌딩 선수들에게 가을걷이와 같은 대회다. 한해의 성과가 전국 체전을 통해 평가되며 그 결과에 따라 연봉이 결정된다. 따라서 보디빌더들에게 체전은 전쟁이다. 강경원은 전장의 신과 같은 존재다. 그는 총 17회의 전국체전에 출전했다. 25세때 4위, 26세때 3위를 한 후 27세였던 99년에 대망의 첫 우승을 수확했다. 99년부터 그는 체전에서 12연패를 달성했고 2011년에 이진호 선수에게 한차례 금메달을 내준 이후 2012년과 2013년에도 연속우승을 거두었다. 최근 15년동안 14회의 우승을 한 셈이다. 12연패라는 대기록을 멈춰세운 이진호 선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물어보았다.


이진호 선수도 고등학교때부터 운동을 해왔고 대단한 선수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 선수 덕에 더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자리를 빌어 다시한번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첫 우승부터 15년이라는 그 긴시간, 자신을 어떻게 관리해 왔느냐는 질문에 강경원 선수 다음과 같이 답했다.


처음 5연패 할때 까지는 그다지 힘든 것도 없고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여섯번째 부터는 경쟁자들도 하나씩 생기고 또 말도 많아졌어요. 판정에 대한 뒷말들도 오고갔죠. "몸이 없는데 왜 주느냐"라는 식으로요. 협회의 수장이 교체될 때 마다 환경이 바뀌고 또 시도간의 경쟁이다 보니 경기 외부에서도 치열했습니다. 하지만 선수는 그런 것을 너무 신경쓸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주변이 어떻든, 뭐가 어떻게 돌아가던, 결국 몸을 만드는 것 만큼 중요한게 없습니다. 저는 그냥 운동만 했어요.


(영상) 2013년 전국체전 보디빌딩 -90kg급 금메달 강경원 선수 개인 포징


우승을 밥먹듯이 해온 최근 15년, 그의 연봉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했다.


(웃음) 2002년 부터 체전 성적이 연봉에 반영되고 전반적으로 연봉들이 많이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우승을 많이 했고 또 많이 받는 편이긴 한데, 지자제의 특성이나 시도 체육회, 또 소속팀의 정산 방식이 다 다르기 때문에 실제로는 저보다 더 실속있는 선수들이 있어요. 우리 인천은 따박따박 원칙대로, 융통성 없게 하니까. (웃음)


강경원의 연간 스케쥴표에서 전국 체전 다음의 일정은 세계 선수권 출전이었다. 오랜동안 그는 그러한 루틴을 반복해왔다. 그렇지만 어느날 그의 레이더에 아놀드 클래식이 포착되었다. 


아놀드 클래식은 일종의 스포츠 페스티발입니다. 여러 종목이 있는 미니 올림픽 같은건데, 엑스포도 같이 진행됩니다. 선수들과 팬들과 스포츠 기업들이 축제를 벌이는 분위기예요. 몇번 거기를 가보면서 출전해 보고싶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어요. 그리고 결정적인 부분이 아시아 선수권에서 저와 경쟁하던 중동 선수들이 아놀드 클래식에서 입상을 하는거죠. 사실 아시아 선수권에서는 중동 텃세가 조금 있습니다. 텃세에 밀려서 제가 우승을 못한거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그러다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거예요. '여기라면 중동 선수들과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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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부터 강경원은 아놀드 클래식에 출전하고싶다는 의사를 협회에 전달했다. 강경원은 국제 보디빌딩 협회 IFBB의 한국지부인 대한 보디빌딩 협회에 소속된 선수이기 때문에 역시 IBFF의 대회인 아놀드 클래식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협회의 승인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협회는 소속 선수가 아놀드 클래식에 출전하는것을 허가한 전례가 아직 없었다. 하지만 2013년 대한 보디빌딩 협회는 새로운 리더를 맞이하게 된다. 


작년에 장보영 회장님이 당선되셨는데, 인천의 김준수 이사님과 조민수 회장님께서 장보영 회장님께 제 얘기를 잘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장보영 회장님께서 용단을 내리신거고요. 그렇게 아놀드 클래식에 출전 허가를 받게되었습니다.


대한 보디빌딩 협회 제 9대 장보영 회장.jpg

대한 보디빌딩 협회 제9대 장보영 회장


강경원의 두번째 몰입기가 시작되었다. 수년간 마음속으로 품어왔던 아놀드 클래식의 출전이 현실화 되자 그의 정신은 90년대 후반의 미친듯이 운동에 몰입하던 시기로 돌아갔고 다시 하루종일 운동에만 집중하는 일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시합 신청하고, 열심히 했습니다. 20대 중반으로 다시 돌아간것 같았죠. 처음 나가는 대회고 또 거기서 저는 무명이기 때문에 아무런 부담감도 압박감도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운동에만 집중했습니다. 홀가분한 기분이었고 다시 신인이 된 느낌이라 에너지가 넘쳤습니다.


협회의 그린라이트가 떨어졌고 강경원 본인도 최고의 상태로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미국에서 벌어지는 대회에 자비로 참가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일주일 정도 기간을 잡았는데 워낙 비용이 비용이다보니 서포트 해줄 후배들도 같이 못가고 이승철 선수는 이승철 선수대로, 저는 저대로 와이프랑만 같이 다녀왔습니다. 둘만 다녀오는데도 비용이 천만원 정도 들었어요. 현장에서도 모든 것을 우리가 직접 알아서 해야 했는데, 말도 못하게 힘들었습니다. 대회 진행 시스템이 완전히 다르고 제가 처음 경험하는 거라 보통일이 아니었어요. 저도 이승철 선수에게, 이승철 선수도 저에게 혼자왔으면 어쩔뻔했냐고 서로 정말 고마워 했습니다.


강경원의 목표는 90KG급 탑 5였다. 세계 선수권에서 거둔 개인 최고 성적이 7위였기 때문에 또하나의 세계대회인 아놀드 클래식에서는 5위를 노린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경쟁자들을 보았을때 강경원은 쉽지 않겠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끝나고 나서는 중동선수들이나 다른 선수들 상당수가 밸런스가 맞지 않았다는게 보였는데, 막상 첫 대면때는 크기도 그렇고 혈관 나온게 '어떻게 몸을 저렇게 만들었나'싶었습니다. 전날 밤에는 잠도 안오더라고요, 사실 미국에서 10여일 있었는데, 제대로 잠을 자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계속 긴장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대회 전날 잠은 잘 못잤는데, 그래도 당일 컨디션은 꽤 괜찮았어요. 컨디션이 좋아야 하체도 잘 갈라지고 혈관도 잘나오고 하는데, 그날은 몸이 잘 만들어진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좋은 컨디션이었지만 처음 참가해본 대회였기 때문에 대회 당일, 크고 작은 어려움들을 계속 맞이해야 했다.


이승철 선수가 100kg을 뛰었는데, 처음 계측할 때 오버가 돼서 뛰고 왔는데 안빠지는거에요, 근데 국내랑 다르게 2번의 기회를 주고 그 다음날 다시 계체를 하게 하더라구요. 그래서 체중 맞춰서 아침 7시부터 가서 있었죠. 사람이 워낙 많다보니까 우리나라처럼 출전 선수 다 불러서 다 데리고 가는게 아니고 거긴 불러서 안 나오면 그냥 진행하더라구요. 실제 그걸 몰라서 못 뛴 남녀 선수가 100명은 될거에요. 몰라서 아침부터 가 있었던게 다행인거죠.


또하나 당황스러웠던게 우리 나라 시합이랑 느낌이 너무 달라서 거의 펌핑도 못하고 올라갔어요. 뭔가 슝하고 지나가듯이 시합이 진행되더라구요. 갑자기 부르길래 펌핑도 못하고 이승철 선수가 프로탄을 발라줘서 저는 들어가고 이승철 선수는 제가 나가니까 등쪽은 발라줄 사람이 없어서 안면이 있는 일본 선수가 발라줬다고 했어요. 거기는 서포터가 못 들어가고 선수만 들어갈 수가 있어서 발달된 것이 예약을 해서 탄 발라주는 일만 하는 사람이 있더라구요. 진짜 아무것도 몰랐죠그래서 대기장에서는 덤벨가지고 펌핑 겨우 두 번하고 나갔어요근데 그렇게 하고도 예선에서 TOP 5를 들은거예요. 기분 엄청 좋았죠. 목표가 그거였으니까요.


(영상) 2014 아놀드 클래식 -90kg급 강경원 선수 개인 포징 영상


강경원과 함께 출전했던 이승철은 본선을 앞두고 서로가 '1등 할것 같다'라며 응원과 격려를 주고 받았다. 강경원 본인은 그러나 본인의 체급에서 1등을 할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본인이 1위라는 발표가 떨어졌을 때, 강경원은 얼떨떨 했다고 한다. 이승철 선수도 100KG급에서 우승했고 두 선수는 아놀드 클래식 체급별 우승자로써 그랑프리를 선정하는 무대에 당당하게 도열했다. 이제 이날 대회의 메인이벤트인 오버롤 (그랑프리) 발표만을 남겨두고 있던 시점.


저는 거기까지도 이미 목표 이상을 달성한거였습니다. 충분히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동안의 일들이 막 주마등처럼 흘러가는것 같고, 빨리 와이프를 안아주고싶고, 아들도 보고싶고, 선배님들, 동료와 후배들, 그리고 저를 도와주신 많은분들과 친구들을 만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사람이 제 이름을 발음하면 '켱원 캥'이 됩니다. 그게 제 이름처럼 들리지가 않잖아요, 근데 계속 코리아, 켱원 캥, 코리아 켱원 캥, 그러는 거예요, '코리아? 켱원 캥? 설마 난가?' 싶더라고요. 세번이나 부르고 나서야 겨우 반응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기분은, 완전 멍했죠, 현실이 아닌것 같았습니다.


그랑프리를 수상한 강경원에게 아놀드 슈월츠네거 본인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가 직접 강경원에게 인터뷰를 했다. 도와줄 사람도 아무도 없이 아내와 함께 떠난 출정길에 통역이 있을리가 만무했다.


아놀드는 이 세계에서 영웅 같은 존재입니다. 그사람이 직접 올라올지 몰랐고 또 사회자도 제가 우상으로 생각하던 숀 레이라는 분이셨고 리치 가스파리라고 올림피아 2등 하셨던 분이 스폰서도 하셨고, 아놀드와 직접 인터뷰를 했는데,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서 완전히 망쳤어요. 나중에 영어 못한다고 말도 나왔고. (웃음)


사본 -Screen Shot 2014-10-26 at 10.04.49 PM.png

대망의 아놀드 클래식 그랑프리, 대한민국 보디빌딩 역사에 길이 남을 장면이다.


그는 빨리 아내를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일정은 계속되었다. 여러 미디어와 수많은 팬들이 사진촬영을 요구했는데 모든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분위기에 협조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제가 느낀 중요한 점 중에 하나가 그거였습니다. 팬들이 굉장히 친근하게 선수를 대하고 선수들도 팬들과 접촉하는것을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이고 있었어요. 필 히쓰 같은 선수들이 인터뷰에서 항상 강조하는것도 그런 부분이고요. 팬들 덕분에 이 스포츠가 존재하는거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다 팬들의 지출에 의해서 만들어지는거다라는거죠. 아내를 빨리 보고싶었지만 일단은 선수로써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진 참 많이 찍어드렸죠. 모든게 다끝나고 아내를 보니까 모든게 다 꿈만 같았습니다. 평생 못잊을거에요. 


강경원은 2005년, 트레이너와 클라이언트의 관계로 연애를 시작했다. 아내와의 만남에 대해 강경원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계속 강조를 했습니다, 연애를 하면 결혼을 해야하는거라고, 누가 대쉬하고 아니고가 중요하지 않고 제가 처음부터 세뇌를 시킨거죠. 이해심이 넓고 정말 착했습니다. 보통 여자들이 자기를 챙겨주기를 바라잖아요, 근데 저희는 운동선수니까 그래 줄 수 없는 경우가 많아요, 연애하는데는 조금 불리하죠. 제 와이프는 그런면에서 모든 것을 이해해 주고 뒷바라지를 해주고 있습니다. 


결혼하고 난 이후의 내조와 서포트에 대해 질문했다.


네, 많이 받았죠운동하는 것을 많이 이해해주고 그런거에 대해서는 일등인 것 같아요생활 패턴 자체가 다 저한테 맞춰져 있어서 식단도 보디빌딩 식단으로 해주고...대단한 것 같아요이제와 생각하지만 정말 고맙습니다선배들은 결혼하면 일등 못한다라고 말을 하셨었는데 사람의 차이가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제 경우는 아내를 잘만나서 마음이 편안하게 운동에 집중할 수 있는것 같습니다. 


아놀드 클래식에서 동양인 최초로 그랑프리를 수상하고 돌아왔을 때, 강경원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어휴, 뭐 달라진거 없어요. 뒷말이나 없으면 다행이죠. (웃음) 저는 그냥 운동하고 대회나가고 그런거 밖에 몰라요. 계속 그렇게 살고싶습니다. 남들은 무슨재미로 사냐고 그러는데, 저는 운동하는 재미로 살거든요, 또 20대의 근육과 30대의 근육, 40대의 근육이 다 다르고 새로운 경지를 요구하니까 그 흐름을 타는 것만해도 바쁩니다.


강경원은 전국 체전 15회 우승을 노리고 있다. 18번째 출전이다. 전국체전의 출전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제가 나가야죠. 우승을 몇번하고 몇번 출전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보디빌딩과 운동후배들에 대한 예의나 의무 같은겁니다. 당연히 나가서 후배들과 경쟁해야죠. 15번째 우승을 노린다기보다는 빼지 않고 경쟁에 참여한다는 쪽에 무게를 더 두고 있습니다.


강경원에게 '어떤 꿈을 가지고 계시냐'고 물었다. 포괄적인 질문이었지만 그의 대답은 명료했다. 


사실, 최근 새로운 목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42살이나 먹고 새로운 목표라 그러니 조금 쑥스럽기도 한데요, 미스터 올림피아에 212 쇼다운이라는 체급이 있습니다. 올림피아 212파운드(96.5KG)급이라고 보시면 간단한데, 거기에 출전하는것을 다음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미스터 올림피아는 세계 보디빌딩계의 최종 스테이지다. 올해로 50주년을 맞은 이 대회에서 각 시즌 최고의 보디빌더가 누구인지가 가려진다. 아놀드 슈왈츠네거(7회 우승), 리 해니(8회 우승), 도리안 예이츠(6회 우승), 로니 콜먼(8회 우승)등이 역대 미스터 올림피아의 지배자들이었고 올해 50주년 기념 대회에서는 필 히쓰가 4회 연속우승으로 전설을 향해 한걸음 더 다가갔다. 히쓰는 완벽한 선수로 존경받지만 팬심은 카이 그린이라는 개성만점의 스타 보디빌더를 향하고 있는 것이 현 시대의 라이벌 구도로 볼 수 있다. 미스터 올림피아가 헤비급이라면 212 올림피아 쇼다운은 라이트 헤비급이다. 


2008년 202 파운드(91.6KG)급으로 출발한 이 체급은  2012년 부터 212파운드로 한계체중이 상향되었다. 초대 우승자 데이빗 핸리 이후 09~11년까지 케빈 잉글리시가 3연패를 이룩했고 한계체중이 상향된 2012년 부터는 웨일즈의 플렉스 루이스가 3년 연속으로 우승을 거두고 있다. 이 체급에는 야마가시 히데타다 라는 일본선수가 활동하고 있는데 2014년 올림피아 212 쇼다운에서 그는 4위를 기록했다. 


만약 출전 허가가 떨어진다면 어떤 각오로 준비에 임할지를 물어보았다.


특별한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저는 말로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해 왔던 것 이상으로 할겁니다. 제게 남은 모두를 바쳐 도전해 보고싶습니다. 


그가 올림피아 212 쇼다운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역시 장보영 회장 이하 대한 보디빌딩 협회의 결단이 필요하다. 협회의 판단여하에 따라 강경원의 세번째 몰입이 시작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결정된다. 과연 향후의 전개가 어떻게 될지 전국의 보디빌딩계가 숨을 죽이고 지켜볼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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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원에게는 8세 아들이 있다. 아들에게도 보디빌딩을 시킬거냐는 질문에 강경원은 "원한다면 시킬겁니다, 그런데 이미 또래들 중에 키가 너무 커서 어떨지 모르겠어요, 운동은 좋아하고 잘 하는데, 어떤게 적성에 맞는지, 어디에 재능이 있는지 여러가지를 시켜볼겁니다"라고 대답했다.


강경원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떡볶이와 팥죽이다. 


여유시간이 있을때 그는 휴식을 취하는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집이며 좋아하는 노래는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발라드면 다 좋다, 근데 요즘 노래는 잘 몰라"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운동 이외에 이루고 싶은 목표에 대해서 강경원은 박사학위 취득과 영어실력 향상을 꼽았다. 특히 영어는 본인에게 첫번째 슈퍼 사이클을 선물했던 하와이 전지훈련때 부터 생각하고 있던 부분인데 아직 별다른 성과가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강경원의 어머니는 음식점을 접고 다시 화훼쪽 일을 시작했다. 원래 포지션이었던 천상여자로 돌아간 것이다. 강경원은 어머니 하시는 일을 많이 도와드리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여동생이 어머니를 잘 모시고 있어서 대견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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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취재진의 간곡한 요청을 못이겨 복근을 보여주고 있는 강경원선수


마지막으로 강경원 선수가 팬 여러분들께 드리는 한마디.


팬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의 덕분으로 제가 이렇게 운동에만 집중하면서 보람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정말 운동밖에 모르고 운동만 하고 있습니다. 다른데 눈 돌리지 않고 24시간을 모두 운동과 휴식에 사용하고 있어요. 노는것도 모르고 술도 안마십니다. 지금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겁니다. 여러분들의 관심과 성원이 있는 한 저는 계속 할 수 있습니다. 40이 넘어서도 운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할 수 있고 또, 새로운 목표를 가질 수 있다는 부분에 대해 제가 얼마나 운이좋은지를 새삼 느낍니다. 저 뿐만 아니라 우리 보디빌딩 선수들 모두 정말 피땀을 흘리며 노력하고 있습니다. 팬 여러분, 보디빌딩 많이 사랑해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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