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0.jpg

10월 27일(현지시각) 미국 동부 로드아일랜드주의 한 경기장에서 CES MMA라는 단체가 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네 번째 경기에 존 가티 3세라는 선수가 출전했다. 신장 180cm의 웰터급인 그는 2014년 아마추어에서 5승 1패를 기록한 후 그날 프로 데뷔전을 가졌다. 상대였던 조니 애덤스 역시 프로 데뷔전이었다. 1라운드 상대를 넘기고 상위포지션을 차지한 가티가 팔꿈치를 활용해 애덤스의 콧등에 열상을 입혔다. 코뼈가 부러진 듯 상당한 출혈이 일어나면서 상대가 위축되는 것을 확인한 가티는 연이어 파운딩을 내리쳤고, 경기시작 3분 51초경 애덤스는 구두로 항복의사를 밝혔다. 

셔독과 MMA 파이팅을 비롯한 주요 종합격투기 매체가 이 선수의 데뷔전에 대한 프리뷰 기사를 냈다. 도널드 트럼프가 좋아하는 극소수의 신문사 중 하나인 뉴욕 포스트에도 같은 기사가 실렸고, 남성지 맥심의 미국판도 보도에 동참했다. 대회사는 가티를 포스터 모델로 기용했다. 그가 승리를 거두자 더욱 많은 매체들이 가티 3세의 MMA에 대해 지면을 할애했다. 


■ 113kg에서 3년 후 77kg 

2014년 9월, 아마추어 데뷔 당시의 가티 3세는 근육질의 라이트 헤비급 선수였다. 아마도 레슬링 경험이 있어 보였고 타격 면에서는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 왼손잡이 상대를 만나 시작부터 체력을 과도하게 소모하는 운영을 했고, 1라운드 후반에 벌써 마우스피스를 빼물고 두 손으로 허리를 짚을 만큼 지쳐버렸다. 

g1.jpg

상대의 경우는 비교적 체력 상태가 양호했지만 가티의 펀칭이라 하기 힘든 수준의 주먹질에 하나씩 걸릴 때마다 휘청거리며 달아나기 바빴다. 가티 역시 상대의 펀치를 잊을 만하면 하나씩 얻어맞았다. 그러나 맷집과 근성은 상대적으로 훨씬 우수했다. 

3라운드가 되자 두 선수 모두 한번 맞붙고 나면 잠시 멈추고 숨을 몰아 쉬어야 했을 정도가 되었다. 3라운드 초반에 가티가 오른손을 크게 휘둘러 애덤스를 그로기로 몰았지만 마무리를 하지 못했다. 애덤스의 반격에 안면을 몇 차례 당한 가티는 태클을 시도하다 되치기를 허용하고 그라운드에서 서브미션에 당할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겨우 버텨내고 판정승을 거두었다. 

이후의 경기들과 현재의 모습을 살펴볼 때 이 선수가 분명 열심히 하고 있다는 점은 명확하다. 그의 타격 트레이너인 데릭 판자가 뉴욕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처음 MMA를 시작하던 당시 그는 체중 115kg의 보디빌더였다고 한다. 복싱을 잠깐 했었다고 하는데, 데뷔전 영상을 참고하면 아마도 아주 잠깐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데뷔전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EXOkeT5CTFY)

2015년에 두 경기, 2016년에 세 경기씩 경험하면서 경기력이 조금씩 잡혀갔다. 그리고 체중도 지속적으로 줄어 2017년 2월에 있었던 아마추어의 여섯 번째 경기에서는 계체 결과가 78.7kg이었다. 2014년에 라이트 헤비급에서 싸울 때 이미 상당한 근육질의 몸이었는데 웰터급까지 16kg를 줄였다는 건 관리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는 것이고, 체중과 관련된 관리는 욕구에 대한 저항을 요구하며 각오가 없이는 몇 년에 걸쳐서 서서히 그 정도로 감량을 하는 게 쉽지 않다. 데릭 판자는 가티가 술, 담배를 하지 않으며, 매우 절제된 클린 다이어트를 하고 있고, 하루에 세 타임씩 일주일에 5일 성실하게 훈련에 임하고 있다고 밝혔다. 


g2.jpg

대회사의 프로모터는 그를 두고 슈퍼맨 같은 몸을 가진 진짜배기 유망주라 평했으며 프로 데뷔전을 앞두고는 데이나 화이트와 조 로건에게 곧 UFC로 갈 선수이니 주목하라는 SNS 멘션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아마추어에서 그가 상대했던 선수들 중 인상적인 전적이나 신체능력, 혹은 스킬 레벨을 보유한 경우는 없었다. 5승 중 두 번의 KO가 있지만 세 번의 판정승 중 두 번은 스플릿 디시전이었다. 

단적으로 말해 아마추어에의 활약이 미디어의 시선을 그 정도로 집중시킬 만큼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투기종목에서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 메달리스트였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미디어가 그를 주목하고 대회사에서도 그를 위해 이례적인 행보를 보인 이유는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명세 혹은 악명 때문이다. 세 사람의 이름은 모두 존 가티이고, 1대와 2대 가티는 FBI의 집중마크를 받던 거물이었다.


■ 패밀리 비즈니스

1대였던 존 '테플론 돈' 가티는 뉴욕 마피아 5대 패밀리 중 하나인 감비노파의 보스였다. 1940년에 브롱스의 저소득 가정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폭력에 시리며 자라난 그는 밑바닥에서 출발해 각종 범죄를 두루 섭렵했다. 1985년 부하들을 사주해 전임자였던 폴 카스텔라노를 살해한 후 감비노파의 3대 보스가 되었다. 

FBI의 입장에서 카스텔라노를 누가 죽였는지는 뻔한 얘기였다. 86년부터 89년 사이에 그들은 세 차례에 걸쳐 가티를 법정에 세웠다. 하지만 가티는 번번히 무죄로 빠져나갔다. 미디어가 그런 그를 두고 테플론(프라이팬에 입히는 코팅)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가 법정에 출두할 때면 취재진이 운집했는데 그는 취재진을 위협하거나 피하지 않았다. 마치 카메라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했고, 어떤 기사가 나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그를 따라다니며 질문을 퍼붓는 기자들에게는 가끔 한마디씩 대답하기도 했다. 그의 그런 성향이 더 많은 취재진을 불러들였고 기자들은 그에 대한 것이라면 아주 조그만 것도 기사화하게 된다. 

그는  최소 5명의 피살사건의 교사자였으며 각종 이권에 개입했고, 보스가 되기 직전까지 마피아가 금기로 여기는 마약밀매로 돈을 긁어 모았다. 심각한 도박중독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멋지게 차려 입은 모습으로 미디어에 노출되었고 언제나 여유 있는 태도를 유지했다. 그를 밀착 감시하는 FBI 요원에게 "커피나 한잔 하지"라고 권했다는 일화는 그의 대중적 이미지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값비싼 수트를 입고 고가의 벤츠 대형세단을 탔지만 보스가 되기 전에 살던 집을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굉장히 많으며 매일 수십 통씩 감사편지를 받는다는 그의 변호사의 주장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다는 가족들의 증언 덕분에 그에 대한 팬덤이 형성되기도 했다. 

g3.jpg

FBI는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악당이 일부 대중에게는 로빈 후드와 같은 인물로 인식되는 상황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가티에 대한 수사망은 점점 좁혀졌고, 92년 그의 오른팔이던 새미 그라바노가 수사관들의 설득에 응해 법정에서 가티에 대한 증언을 하면서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교도소에 수감된 상태였지만 가티는 자신의 장남인 존 가티 주니어를 통해 조직을 통솔했다. 주니어는 그러나 조직내의 알력과 다른 패밀리의 견제, 그리고 이제는 본인을 향하게 된 수사기관의 압박 속에서 조직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힘들었다. 가티 주니어는 극도로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몇 차례 소송에서 승리했고 아버지의 별명까지도 이어받아 테플론 주니어로 불린 적이 있지만 코팅의 수명에는 한계가 있었고 1999년 그 역시 법의 심판을 받게 된다. 그는 본인의 삼촌인 피터 가티에게 조직의 운영을 맡기고 얼마 후 은퇴했다. 
 

■ 대부의 손자라는 양날검

감비노파는 뉴욕 마피아의 최대 조직이며 전 미국을 통틀어 비교의 대상이 없을 만큼 세력이 강했다. 존 가티가 보스이던 시절이 감비노파의 절정기였으며 그는 알 파치노 이후 가장 유명한, 혹은 악명 높은 조직 범죄자였다. 그런 사람의 가족들은 어떤 영향을 받게 될까?

1세의 둘째 아들인  피터 가티도 본인의 장남에게 존 가티라는 이름을 물려 주었다. (4촌인데 이름이 같다.) 23세인 그는 최근에 몇 가지 문제로 법정에 섰다. 법정에서 그가 인정한 범죄들만 보면 그는 70년대에 아버지지와 함께 루프트한자 현금강탈 사건을 저질렀던 공범과 함께 은행을 털었고(당시 가티의 나이 18세), 운전 중 자신의 앞으로 끼어들었다는 것을 이유로 상대방의 차량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여러 차례 약물 문제를 일으켰고 지난해 8월에는 마약 밀매 혐의로 체포되었다. 

g4.jpg

그는 이미 7명의 부하를 거느린 범단의 소두목이었다.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그는 아편계 진통제이며 최근 들어 점점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는 옥시코돈을 주로 거래했는데, 월간 10만 달러(약 1억 1천 만원) 가량을 벌었다고 한다. 

23세의 청년이 조직범죄에 빠져들 경우 대개 패거리의 맨 밑바닥에서 가장 지저분한 일을 하게 되며 큰 돈을 만지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존 가티이고, 감비노파의 전 보스였던 1세의 친손자라는 사실이 어두운 세계에서는 상당한 특혜로 작용한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g5.jpg
사진=cbs 뉴스 화면 캡쳐/ 이 가티는 그 가티가 아니었다.

그런데 만약 가티 3세가 보통 사람들처럼 살아가고자 한다면, 그건 대단히 어려울 수 있다.  어떤 직장을 다녀도 할아버지의 영향력과 아버지의 과거는 본인을 따라다닐 것이며, 그것을 알게 된 타인이 3세와 자연스럽게 인간관계를 맺는 것은 어려울 가능성이 있다. 친하게 지내다가도 어느 날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소원해지는 경우가 생길텐데, 이미 여러 번 경험이 있을 것이 틀림없다. 데렉 판자가 그의 성격을 두고 '고독을 즐기는 타입'이라 설명했는데, 어째서 그런 성격이 되었을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사회생활을 평범하게 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본인의 이름을 감추고 살아가는 것이 보통 사람처럼 살아가는 데에는 유리할지 모른다.

그런 사정을 고려해 볼 때, MMA 파이터가 되기로 한 것은 가티 3세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선택이다. 그가 존 가티라는 이름을 부정하지 않을 작정이라면 -SNS 계정에 1세에 관한 게시물들이 많고 존경심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나마 파이터들 중에는 그의 할아버지가 누구던 아버지가 어떤 일을 했건 개의치 않을 사람들의 비율이 다른 직업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에 최소한 경계 바깥의 사람 취급을 당할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상대 선수 쪽에서 대전을 꺼려하는 경우가 없지 않겠지만 어느 정도의 실력을 보여준다면 대회사는 그를 흥행카드로 활용하려 할 것이고 프로모터가 그런 입장일 경우 어떻게든 상대는 찾아낸다. 

g7.jpg

무엇보다, 본인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적절했다. 지난 7월 블리쳐 리포트와의 인터뷰에서 가티 3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티라는 이름은 제 선수생활 내내 저와 함께 할 것이고 그것을 회피할 방법은 없습니다. 저는 존 가티라는 이름을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공유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이름을 밝은 스포트라이트의 아래에 놓고 제가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며 이 스포츠를 위해 헌신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중략-
"과거를 바꿀 수는 없어요. 그래서 저는 앞으로 나갈 겁니다. 저는 우리 가족의 이름을 밝고 긍정적인 쪽으로 바꿀 겁니다. 그리고 저는 제 자신의 길을 개척할거예요. 제 할아버지의 이름은 아주 오래 기억될 겁니다. 좋던 나쁘던 그 이름은 역사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서 사람들이 가티라는 이름을 떠올릴 때 저와 제가 MMA에서 이루어낸 것들을 먼저 연상하게 되기를 신께 기도합니다."


■ 속죄와 부활의 콜로세움

가티 3세는 본인의 자아를 실현하고 또 가문의 오명을 씻어내기 위해 격투기를 선택했다는 것인데, 대단히 숭고한 결정이고 본인이 영광의 길을 걸어 할아버지의 과오를 덮겠다는 포부라고 보면 야심만만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의 할아버지는 전술한대로 미국 최대 범죄조직의 전임자를 살해하고 장악한 인물이며 알카포네 이후 가장 악명 높은 마피아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걸 다 덮으려면 웬만큼 잘해서는 어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블리처 리포트라는 대형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저렇게 말한 것은 그 자체로 할아버지의 악명이기도 하면서 인기라고 볼 수도 있는 네임밸류에 본인의 신상을 슬쩍 묻히고, 선수로서 자신을 대중에 쉽게 각인시킬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것이 진심이건 입에 발린 소리이건 매니지먼트에서 써준 대사이건 당연한 행보였다. 

g8.jpg

그런데 그게 만약 진심이라면, 그리고 본인에게 재능이 있고 운이 많이 따라 준다면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본인 스스로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 상황이라서 만약 그가 UFC 웰터급 챔피언이 되고 연속방어 기록을 작성하면서 맥그레거처럼 PPV를 팔아 치운다면 아마도 원하는 것 이상의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어찌되었건 격투 종목에는 굉장히 독특한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HBO의 수석 해설자 래리 머천트가 버나드 홉킨스에 대해 논하며 언급한 바를 옮겨본다.
"계속 이기면 사람들은 그 선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게 됩니다"

그래도 괜찮은지, 그것이 옳은지는 논외로 하고 상황의 추이와 대략적인 결과만을 볼 때, 매우 흉포한 범죄자였지만 격투를 통해 속죄하고 대중의 용서를 받은 인물들이 더러 있다는 게 현실이다. 대표적으로 마이크 타이슨이 있고 마크 헌트도 만만치 않다. 컵 스완슨도 상당히 위험한 범죄를 저지르고 소년원에 수감되었던 적이 있다. 모두 지금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정상적인 삶에 적응하고 잘 살아가는 중이다. 

버나드 홉킨스의 스토리도 만만치 않다. 긴 이야기가 될 테니 패스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 요약하자면 

1. 홉킨스는 빈곤했던 10대 시절 강도질이 직업. 
2. 17세 때 중무장 강도로 18년 형을 받고 교도소 수감 
3. 소년원이 아닌 교도소에서 본인 정도는 악당 축에도 못 낀다는 것을 체감, 공포와 좌절감
4. 교도소 복싱 프로그램에서 희망을 찾음
5. 교도소 챔피언 등극, 1988년에는 5년 만에 모범수로 출소
6. 데뷔전 패배, 이후 22연승(16KO)
7. 1994년 29세, 첫 세계타이틀 매치로 IBF 미들급. 상대는 초신성 시절의 로이 존스 주니어. 전원일치 판정패
8. 존스 주니어가 상위체급으로 떠나며 타이틀 매치 다시 받고 에콰도르 원정. 3000미터 고지대에서 다운 두 번 당하며 고전 끝 무승부
9. 1995년 4월 리매치, 상대가 악으로 버텼지만 레프리가 TKO 선언, 첫 타이틀
10. 2001년 14차 방어 상대로 당시 슈퍼스타 펠릭스 트리니다드 만나 12라운드 KO승 거둠.
11. 2004년 19차 방어 상대로 오스카 델라호야 9라운드 KO승. 사상최초로 WBA, WBC, IBF, WBO의 4대 기구 타이틀 동시보유 기록 달성
12. 저메인 타일러에게 의문의 2패
13. 만 41세, 은퇴를 거부하고 라이트헤비급으로 올라가 안토니오 타버, 윙키 라이트 제압, 칼자게에게는 패배. 타일러를 꺾은 34연승의 젊은이 켈리 파블릭을 일반적으로 두들김. 이때 나이 만 43세
14. 28세 때 로이 존스 주니어에게 진 1패의 빚을 17년 후, 45세가 되어서 이자 붙여 갚음.
15. 46세의 나이로 장 파스칼을 판정으로 누르고 WBC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94년 45세였던 조지 포먼의 최고령 타이틀 획득 기록을 17년 만에 갱신.
16. 채드 도슨에게 연패하고 다시 무관, 48세 때 본인보다 20살 어린 챔피언을 주먹으로 타일러서 본인의 죄고령 타이틀 획득 기록 갱신.
17. 49세 때 또 한 명을 몸으로 설득해 다시 기록 갱신. 홉킨스가 이루어낸 업적은 49세 94일의 현재 최고령 기록, 미들급 최다 연속방어 20회, 미들급 최장기 집권 10년, 최고령 타이틀 획득, 동시에 4대 기구 타이틀 모두 보유.
18. 상대를 읽어내는 능력이 탁월한 초특급 카운터 파이터-브로울러이고 다양한 페인트와 페인트처럼 보이는 진짜 공격으로 어이없이 큰 펀치를 쉽게 맞추는 스타일, 그리고 더티 복싱의 1인자. 그의 머리는 제3의 주먹. 로블로 스페셜리스트
19. 이후의 내용은 스킵하고 마지막 부분의 결론으로 직행 바람.

홉킨스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어머니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가족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빈곤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랐다. 10대 시절의 어느 날에 대해 그는 "양과 늑대가 있었습니다. 양들에게는 아무런 기회가 없었어요. 늑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을 패고 돈을 빼앗는 것을 주업으로 삼았다. 그러다 칼에 찔리기도 했고 경찰에 연행된 것만 수십 번에 달했다. 17세 때였던 1983년 그는 무장강도 혐의에 대한 유죄 평결에 의해 18년 형을 언도 받고 필라델피아 주립 그레이터포드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HBO의 비욘드 더 글로리라는 스포츠 다큐멘터리 시리즈에서 홉킨스는 그곳의 분위기에 대해 "3~4천 명 정도의 수감자들이 있었는데, 저는 악당 축에도 끼지 못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전혀 비슷하지도 않았죠. 거기 사람들에 비하면 저는 교회 오빠 정도였어요. 야외활동 시간에 누군가가 아무 이유도 없이 시비를 겁니다. 저는 성질을 부리면서 맞섰습니다. 대차게 대응하면 다음부터 안 그럴 줄 알았죠. 그런데 성질을 부리고 난리 치는 게 재미있다고 더 자주 더 심한 시비가 걸려왔습니다. 도저히 편안하게 지낼 수가 없는 곳이었고, 영원히 그곳에서 나가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라고 털어놓았다.

홉킨스는 1984년 그레이터포드의 복싱 프로그램에서 희망을 발견했다. "희망을 되찾은 것 같았습니다. 달리고 훈련하고 경기를 하면서 좋아, 더 괜찮아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허파와 땀샘을 통해 알코올과 온갖 나쁜 버릇들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죠"라며 추억을 더듬은 그는 교도소의 복싱경기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었다.

"부심은 없고 레프리는 제소자였습니다. 로프도 없이 바닥에 담요로 경계선을 표시해 두었고요. 물러나다가 그 선을 넘어가면 천하에 둘도 없는 겁쟁이 취급을 받습니다. 거기선 그게 최고의 엔터테인먼트였기 때문에 체육관은 언제나 만원이었죠. 제가 그곳 챔피언 출신입니다."

1988년 수감된 지 4년 8개월 만에 홉킨스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 해 10월 홉킨스의 프로 데뷔전이 있었다. 클린턴 미첼이라는 선수를 상대로 한 4라운드 경기였고 결과는 2대 1 메이저리티 디시전 판정패였다. 두 번째 경기는 1년 4개월 후였던 1990년 2월에 있었고, 전원일치 판정승이었다. 그로부터 1993년 2월까지 홉킨스는 22연승을 달렸다. 그중 KO승은 16번이었다. 

93년 5월 홉킨스(65년생)는 공석이었던 IBF 미들급 타이틀을 놓고 로이 존스 주니어(69년생)와 대전했다. 당시 그의 전적은 21전 전승 20KO였다. 서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결정적인 장면이 나왔던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존스 주니어가 더 영리했고 전술적으로 우위를 점하면서 포인트에서 넉넉하게 앞선 판정승을 거두었다. 그의 첫 번째 타이틀 획득이었다. 

g9.jpg

이듬해 존스 주니어는 슈퍼미들급으로 올라갔다. 다시 공석이 된 IBF 미들급 챔피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94년 12월 홉킨스는 에콰도르로 원정을 떠났다. 경기가 열린 곳은 수도인 쿠이토라는 도시였다. 해발 고도가 3,000미터에 달하는 곳으로 전세계 수도 중 볼리비아의 라 파즈에 이어 두 번째로 고도가 높은 곳이다. 

해발 0미터의 대기에는 산소가 약 20.9% 포함되어있다. 해발 3000미터의 경우 산소비율은 14.3%로 떨어진다. 이 차이는 얻어맞으면서 장거리를 달리는 복서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된다. 홉킨스는 그러나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세군도 마차도라는 상대에게 다운을 두 번이나 허용하면서 무승부로 돌아섰다. 

이듬해 4월 IBF는 두 선수의 리턴매치를 주선했다. 홈 엔드 어웨이로 미국에서 있었던 홉킨스의 타이틀 도전 3차 시기에서 홉킨스는 3라운드 부터 피치를 올리기 시작했다. 라운드 시작하자마자 레프트 훅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마차도는 잠시 후 라이트도 하나 허용했고, 라운드 내내 홉킨스의 클린히트를 여러 개 받아냈다.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격차는 더 벌어졌다. 그러나 마차도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항복할 것 같지 않았다. 

7라운드 시작 무렵에 홉킨스의 라이트를 또 하나 클린히트로 받은 마차도는 홉킨스의 컴비네이션 까지 허용하며 그로기에 몰렸는데, 클린치 상황에서 떨어지라는 레프리의 오더에 세 번이나 불응했다. 레프리는 즉각 TKO를 선언했다. TKO 선언을 하기엔 조금 빨랐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으나 3라운드부터 6라운드까지 마차도가 허용한 펀치들을 종합적으로 계산하면 선수 보호차원에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판정이었다.

만 30세에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홉킨스는 40세가 될 때까지 미들급의 4대 기구와 링 타이틀, 또 리니얼 챔피언십까지 모조리 수집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당시 복싱계를 주름잡던 두 명의 특급 복서와 대전했다. 펠릭스 트리니다드와 오스카 델라 호야다. 

2001년 매디슨 스퀘에 가든에서 트리니다드는 WBA와 리니얼 챔피언십을 걸었고 홉킨스는 WBA, IBF 타이틀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경기 전부터 과격한 도발로 트리니다드를 흥분시킨 홉킨스는 평소보다 더 노골적인 방어우선의 전략으로 트리니다드의 공세를 먼저 차단한 후 카운터를 적중시켜 거의 모든 라운드를 챙겼다. 트리니다드는 카운터를 계속 먹으면서도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치열한 난투극은 라스트라운드를 2분 남긴 시점에서 마무리 되었다. 홉킨스의 왼손 어퍼가 허공을 갈랐을 때 트리니다드가 왼손 훅으로 카운터를 시도했는데, 보통 어퍼컷이 미스되면 커버링이 열린 채 상체가 펴지면서 상대방에게 매우 좋은 카운터 찬스를 넘겨주게 된다. 오른손 어퍼의 경우는 특히 더욱 그런 경향이 강하다. 홉킨스는 그렇지만 미스를 인지하고, 혹은 일부러 미스라도 한 듯 재빠르게 주먹을 회수했고 올라갔던 왼손으로 트리니다드의 카운터 왼손을 쳐 내리면서 방어에 성공했다. 그리고 즉시 라이트 역카운터를 적중시켜 트리니다드를 잠재웠다. MSG를 가득 채웠던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을 침묵시킨 치명적인 역카운터였다. 

오스카 델라 호야는 버나드 홉킨스의 19차 방어전 상대였다. 미들급에 마지막 남은 메이저 타이틀인 WBO 벨트를 호야가 가지고 있었다. 호야는 홉킨스의 정면에서 버티고 서서 공세적일 듯한 스탠스를 취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페인트와 모션이 많았고 정타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홉킨스는 3라운드부터 아웃복싱으로 호야를 상대했다. 슬슬 물러나서 끌어들이고 불시에 던지는 라이트 리드로 점수를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특기인 더티복싱까지 버무려지면서 호아의 옵션은 점점 사라져갔다. 9라운드 홉킨스의 왼손이 호야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호야는 뱌를 잡고 바닥을 구르며 카운트가 다할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당시 홉킨스는 만 39세였고 호야는 8살이나 어렸지만 그 뿐이었다. 

만 40세가 되던 2005년 홉킨스는 아워드 이스트먼을 판정으로 꺾으면서 20연속 타이틀 방어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그러나 그 해 7월 23승 무패 16KO의 전적을 기록 중이던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저메인 타일러에게 판정패로 물러나면서 10년 동안 수집한 6개의 타이틀을 한번에 넘겨주게 된다. 12년 만에 경험하는 패배였다. 세 명의 저지 중 한 명은 116대 112로 홉킨스의 승리라 채점했다. 나머지 두 명은 113-115로 타일러의 손을 들어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한 판정이었다. 컴퓨목스의 펀치스텟을 보면 홉킨스는 326개중 96개를 적중시켰다. 타일러는 453개 중 86개. 적중률과 총량모두에서 홉킨스가 우위였다. 타일러는 공격시도가 많았다는 부분과 잽을 많이 적중시켰다는 부분에서 앞섰는데, 그것은 승부의 반대편에 있는 수치라고 봐도 좋은 것이다. 

복스렉에 집계된 당시 미디어들의 비공식 채점결과를 살펴보면 ESPN의 댄 라파엘과 다른 한 매체가 무승부, HBO의 헤롤드 래더맨을 포함한 두 곳에서는 타일러의 승리, 그리고 나머지 링매거진과 로이터, AP 등의 통신사, 그리고 보스톤 글로브 등의 주요매체의 기자 17명은 모두 홉킨스가 이긴 경기라고 보았다.

같은 해 12월 두 선수의 리턴매치가 벌어졌다. 1차전 보다 더 흥미롭지 못한 내용이었다. 이번에는 세 부심이 모두 타일러의 손을 들어주었다. 컴퓨복스의 통계상으로는 이번에도 홉킨스 쪽이 우세했다. 이번에는 심지어 총 공격시도 면에서도 비슷한 숫자였고, 타일러는 잽을 35개 더 맞춘 반면 홉킨스는 파워펀치를 41개 더 적중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타일러의 승리가 되었다.

타일러는 젊은 올림픽 메달리스트 출신의 선수이고 선수생활의 황혼기에 접어든지 오래인 41세의 노장에게 승리를 주는 게 아까웠을 수도 있고, 또 따지고 보면 다소 더티한 플레이를 즐겨 사용하는 홉킨스에 대한 반감이 작용했을 수가 있다. 홉킨스의 머리는 양손 만큼 훌륭한 무기다. 그가 구사하는 버팅-펀치 연계기는 악명이 높다. 다른 선수들은 두 주먹으로 싸우지만 홉킨스는 손이 세 개라고 해도 될 정도다. 뿐만 아니라 레프리의 시선이 닿지 못하는 사각에서 홉킨스는 매우 능숙하게 로블로와 래빗 펀치를 구사한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타일러전의 2연패는 흔한 말로 카르마였다고 해도 그 이후의 홉킨스가 보여준 노익장은 왕년의 조지 포먼을 능가했다. 2006년 그는 라이트 헤비급에서 로이 존스 주니어를 상대로 1패 후 2연승을 거둔 안토니오 타버를 꺾고 그의 IBO 타이틀을 빼앗았다. 42세가 된 2007년에는 전 라이트 헤비급 통합챔피언이던 윙키 라이트를 판정으로 돌려 세웠다. 

2008년 4월 조 칼자게와 싸워서 패했지만 칼자게를 이긴 선수는 아무도 없었으니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당시 34연승 중이던 무패의 신예 켈리 파블릭을 일방적으로 두들겨 전원일치의 판정승을 거두었다. 그는 저메인 타일러를 KO로 잡고 리턴매치에서도 완승을 거두었던 선수였기 때문에 홉킨스에게는 대단히 기분 좋은 승리가 되었다. 당시 홉킨스는 43세였고 파블릭은 27세였다. 

2010년에는 로이 존스 주니어와의 재대결을 가졌고 승리했다. 홉킨의 나이는 45세, 존스 주니어는 41세였다. 

2011년에는 장 파스칼과의 1차전 무승부의 아쉬움을 털어버리며 판정승을 거두었고 WBC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이 되면서 조지 포먼의 최고령 챔피언 기록을 46세 126일로 갱신했다. (포먼의 종전 기록은 45세 299일)

2011년과 이듬해에 채드 도슨에게 연패하며 다시 무관으로 돌아갔지만 2013년 태보리스 클라우드를 꺽고 다시 IBF 챔피언이 되면서 본인의 종전 기록을 48세 53일로 갱신했다. 2014년에는 베이부트 뷰메노프라는 선수를 이기고 WBA 벨트까지 손에 넣으며 49세 94일, 즉 우리나이로는 50세가 되어서까지 챔피언 벨트를 수집목록에 추가하는 괴력을 과시했다. 같은 해 세르게이 코발레프의 도전을 받아준 것은 다소 무리였고, 결국 KO패를 당한 후 만 51세 337일이 되어서야 겨우 그만두게 되는데, 그것을 보고 아쉬워하는 팬보다는 안도하고 축하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분위기였다.


g10.jpg

■ 절망 속에서 밝은 빛으로

불로장생의 비법에 대해 홉킨스는 두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교도소 시절 몸에 배인 규율이다. 그는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본인이 만든 규칙을 철저하게 준수하면서 살고 있다. 그 기나긴 선수생활 내내 술을 한 번도 입에 대지 않았고, 심지어는 탄산음료도 마신 적이 없다고 한다.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탄산음료는 액체 마약 같은 것으로, 그런 것을 먹으면서 건강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한다.

두 번째는 최대한의 휴식이다. 그는 1라운드 KO승을 거두었다 해도 충분히 휴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기를 오래 쉬라는 게 아니라 경기 직후에 들뜬 마음을 추스르고 파티제의 같은 것을 정중하게 거부한 후 휴식을 취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경기가 끝난 바로 그날이 휴식의 효과가 가장 큰 날이며, 승리감에 도취되어 퍼 마시고 엉망이 되는 것도 분명 즐거운 일이겠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그런 날들의 반복에 의해 선수로서의 수명이 조금씩 줄어들게 된다는 얘기다. 본인도 주변 사람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싶지만 그 순간을 견뎌내고 휴식을 선택했기 때문에 상식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었다고 한다. 

2000년대 초반, 트리니다드와 델라 호야를 꺾은 직후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홉킨스는 본인이 복역하던 그레이터포드 교도소에 체육관을 기증했다. 그 기념식장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남겼다. 

"이곳 주립 교도소 체육관의 벽에 걸려있는 15미터짜리 제 사진을 보면서 말문이 막혔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모두 이곳에서 농구를 비롯해 가능한 여러 가지를 하게 될 텐데, 그때 저걸 보지 않고 지나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비록 저 사진은 말을 하지 않고 그냥 저기 있을 뿐이지만, 저 사진이 여러분에게 '저도 이곳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이야기해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스모키(홉킨스를 지도했던 교도소의 트레이너) 러브 유 맨."

"이곳에서 보낸 제 인생의 일부는 영원히 저를 따라다닐 겁니다. 그것은 제가 이룬 어떤 것의 일부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저는 여러분들을 힘 닿는 데까지 도울 겁니다. 저는 이곳에서의 생활과 여러분들을 잊지 않을 겁니다."

미국의 교도소 복싱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삶을 개척한 성공적인 케이스는 지금도 계속 등장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루이지애나주의 딕슨 교도소 복싱프로그램에서 60승 1패의 전적을 기록하고 사회로 나와 13연승 중인 에릭 워커라는 주니어 웰터급 선수의 사연이 소개되었다. 83년생인 그는 2013년 30세가 되어서야 데뷔전을 가졌다, 교도소에서 13년을 복역했기 때문이다. 

복싱팀 주장이 된 워커는 교도소에서 브래드 솔로몬이라는 동료 죄수에게 영감을 주었고 솔로몬은 출소 후에 계속 복서로 활동하여 현재는 27승 1패의 전적을 기록하며 탑랭커가 되었다. 현재 그는 밥 애럼의 탑랭크 프로모션 소속인데, 2013년에 워커가 출소하자 그가 워커를 로이 존스 주니어에게 데려갔다고 한다.[1]

미국의 교도소 복싱 프로그램은 한 번쯤 연구해 보고 문제가 없다면 도입할 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 미국에서는 교도소 복싱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제소자가 프로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다. 70년대 데이브 휴커비라는 선수는 제소자 신분으로 미래의 미들급 챔피언 비토 안토페르모와 싸웠다고 한다. 레너드의 11번째 상대였던 랜디 밀턴도 복역 중에 특별외유 허가를 받아 경기에 나설 수 있었다.[2] 그러나 무장강도를 저지르고 12년 형을 살고 있던 찰스 뉴웰이라는 선수가 1980년 말론 스털링과의 경기에서 입은 뇌손상으로 사망하자 교도소 복싱 프로그램이 중단되고 링과 샌드백이 모두 철거된 적도 있었다. 

아무래도 교도소 안에서 건강관리가 쉬울 수 없고 또 신분이 그러하다 보니 승부에 과도하게 집착하다 위험한 경우를 당하게 되는 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코네티컷 주 북부 교도소(통칭 소머즈)의 커미셔너였던 존 맨슨이라는 인물은 80년 당시의 복싱 프로그램에 대한 다른 문제에 대한 지적을 했다. 참여자의 숫자가 적고 결과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것에 비해 인력과 비용은 상당히 많이 소요된다며 우려를 표명했던 것. 그것이 제소자들에게 목적의식을 주고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본인 자신은 존속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였다. 

이후 제소자가 외부에서 프로 경기에 출전하는 것에는 제약이 가해지는 쪽으로 정리되면서 프로그램이 전면 중단되는 것은 면했다. 덕분에 1983년에 복역을 시작한 버나드 홉킨스는 링이 없는 환경에서나마 어떻게든 교도소 복싱 프로그램의 혜택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복싱을 배운 적이 없던 13세의 소년범 마이크 타이슨이 소년원 내의 복싱 도장에서 코치의 코를 주저앉혔고, 그 코치는 부러진 코를 감싸 쥔 채 즉각 본인이 아는 최고의 트레이너인 커스 다마토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사이즈의 원석을 발견했다고 말한 일화가 있다. 홉킨스의 케이스도 있으니 이제는 적어도 그 프로그램이 일으킨 변화와 거두어진 결실에 대해서는 할 말이 생긴 셈이다. 

한 인터뷰에서 마크 헌트는 격투를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무얼 하고 있었을 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의 대답은 "감옥에 있겠지"였다. 장정구 전 챔피언 역시 복싱을 하지 않았다면 깡패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스완슨과 제레미 스티븐슨도 범죄자가 되는 길 위에 올라섰다가 MMA로 가는 샛길을 발견하고 발길을 돌린 선수들이다. 

프로복싱, 킥복싱, MMA에는 극도로 반사회적인 인물로 자라날 뻔한 사람에게 긍정적이며 생산적인 대안을 제시한다는 측면에서 다른 종목과는 구분되는 장점이 있다. 가끔 이러한 종목에서 나타나는 유혈극이라든지 끔찍한 부상 장면들을 보면서 과도한 폭력성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인상을 받을 수 있고 부정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 선수들이 케이지 밖으로 뛰쳐나갈 경우 발생할 위협적인 상황은 모두에게 손실이다. 촉망 받던 유망주였던 리 머레이가 부하들을 이끌고 현금 보관소를 습격해 범죄 역사상 최대의 현금 강탈 사건을 벌인 것이 대표적이다. 사건의 수사관에 따르면 그것은 군사작전 수준의 조직 범죄였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격투기를 가르치면 더 위험하지 않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분명 그런 우려가 있지만 경기장 밖에서 기술을 사용하다가 법정에 서면 대개의 경우 더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정말 위험한 범죄자들의 경우 격투기를 배우지 않아도 매우 치명적인 도구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격투기를 배워서 더 위험해지는 것을 너무 걱정하기 보다는 언제고 범죄자가 될 수 있는 갈림길에 선 젊은이들이 격투기와의 접촉을 통해 밝은 길을 걸을 수 있게 되는 가능성에 주목하는 편이 긍정적이라 볼 수 있다. 

이한근이라는 전직 파이터가 있다. 그는 한때 1대 존 가티와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나 2008~2009년 사이에 종합격투기를 알게 되었고, 2009년 39세의 나이로 데뷔해 김종대를 눕혔고 유망주이던 윤덕노에게 판정승을 거두었다. 그 역시 격투라는 길을 통해 밝은 세계로 나왔다. 당시의 인터뷰들을 보면 보통 사람처럼 죄 짓지 않으면서 먹고 살았으면 한다는 것과, 결혼을 해야 할 텐데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현재 그는 체육관을 열어 지도자의 길을 걷는 중이다. 결혼도 했다. 더 많은 이한근이 조금 더 일찍 케이지에서 길을 찾게 된다면 그것을 가지고 이 스포츠의 훌륭한 점을 국가와 기업에 어필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종합격투기 지도자들과 선수들이 교정시설과 접촉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운이 좋을 경우 기가 막힌 스토리를 가진 인재를 발굴 할 수 있을 것이다. 실력도 엄청나고 사연도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으며 본성도 알고 보면 호감형인 스타파이터를 발굴해서 그 선수를 취재하려고 매일같이 몰려드는 취재진들을 향해 '줄을 서시오'라고 외치는 그림. 그리고 나라에서도 그런 활동을 그냥 두고만 볼게 아니라는 정책적 판단으로 뭔가 민관 합작으로 프로젝트를 가동하여 다들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사는 동화 같은 일이 혹시 일어날지 누가 알 것인가. 승리는 오직 도전하는 자만이 쟁취 할 수 있고 결과는 시작을 해야 손에 쥘 수 있는 법 아니던가. 

제품 랭킹 TOP 0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