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jpg

[몬스터짐=조형규 기자] 프로레슬링 최대의 축제인 레슬매니아 33이 막을 내렸다.

지난 3일(한국 시각)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 캠핑 월드 센터에서 WWE의 가장 큰 행사인 서른세 번째 레슬매니아가 개최됐다. 

WWE 1년 농사의 수확제라고도 할 수 있는 레슬매니아는 올해도 역시 화려한 무대를 전면에 내세웠다. 특히 이번 해는 역대 레슬매니아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구조물 세트와 대량의 폭죽을 동원하여 장관을 연출했다. 풍성한 자본과 오랜 세월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한 WWE의 화려한 연출 능력을 마음껏 과시했다.

빛나는 무대만큼이나 주목을 받는 건 바로 링 위의 선수들이다. 그런데 올해 레슬매니아는 유독 출전 선수들이 가져간 명(明)과 암(暗)이 뚜렷했다. 반가운 얼굴들의 복귀, 그리고 레슬매니아 역사에 오랜 시간 회자될 아찔한 스턴트가 펼쳐지며 화려한 축포를 터뜨렸다. 동시에 실패한 세대교체와 박수칠 때 미처 떠나지 못한 노장의 안타까운 뒷모습이라는 그림자 또한 짙게 드리워진 대회였다. 


■ 재앙의 서막? 경기 직전까지 변경을 거듭한 대진표

2.jpg

먼저 레슬매니아 33을 다시 돌아보기 전에 경기 배치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한다. 대체로 대회 당 1~2개의 타이틀전이 열리는 종합격투기는 메인이벤트를 일찌감치 결정지은 상태에서 대회를 진행한다. 하지만 프로레슬링은 다르다. 제한된 시간의 생방송이라는 환경과 실시간 반응에 의해 순서가 유동적으로 변한다. 경기당 배정시간을 벗어나는 상황도 부지기수다. 따라서 프로레슬링은 무엇보다도 경기 현장 상황이 중요하며, 이러한 점들은 대진표의 순서가 당일에도 즉흥적으로 바뀔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번 레슬매니아 33의 대진 중 메인이벤트로 처음 기획된 카드는 단체의 양대 타이틀인 WWE 유니버설 챔피언십과 WWE 챔피언십이었다. 각각 골드버그 대 브록 레스너, 브레이 와이어트 대 랜디 오턴이라는 대진이었다.

하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처음 공개된 경기 순서와는 전혀 다른 배치가 이뤄졌다. 먼저 본행사 경기로 예정되어있던 딘 앰브로스와 배런 코빈의 인터콘티넨탈 챔피언십이 비방송용 킥오프 경기로 급하게 변경됐다. 또한 대회 중간에 배치될 것으로 보였던 AJ 스타일스와 셰인 맥마흔의 대결이 오프닝 경기로 열렸다.

많은 팬이 궁금해하던 WWE의 양대 타이틀전은 메인이벤트가 되지 못했다. 그 자리는 언더테이커와 로만 레인즈가 차지했다. 또한 일반 싱글 매치였던 이 경기는 즉석에서 ‘노 홀즈 바드(No Holds Barred, 무규칙 경기)’ 룰로 변경되어 진행됐다.

그리고 이러한 경기 배치는 결과적으로 엄청난 악재가 됐다. 하다못해 대진표의 순서만 잘 짰어도 최악의 상황은 예방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아쉬움을 남긴다.


■ 어느 해보다 많은 명장면을 만들어낸 레슬매니아 33

3.jpg

레슬매니아 33의 최종 대진은 지난 3월 29일(한국 시각) 미국 현지에서 방영된 WWE 스맥다운 라이브를 끝으로 모두 확정됐다. 경기 배정이 최종 완료된 시점에서 팬들의 반응도 극명하게 갈렸다. 일반 대중의 기대감과 마니아 팬들의 우려로 확연히 양분됐다. 하지만 AJ 스타일스와 셰인 맥마흔의 경기력에 대한 기대감, 골드버그와 브록 레스너의 결말에 대한 궁금증 등은 대부분 공통의 사항이기도 했다.

킥오프 경기가 끝난 뒤 레슬매니아의 포문을 연 건 바로 AJ 스타일스와 셰인 맥마흔이었다. 각각 ‘완전체 프로레슬러’와 ‘스턴트 영역의 전문가’라는 포지션 덕분에 대회의 열기가 한층 고조될 시점에 투입될 것이라는 예상을 벗어난 경기 배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두 선수가 온몸을 날린 덕분에 레슬매니아 33은 경쾌한 스타트를 끊을 수 있었다.

경기는 AJ 스타일스가 기본기 공방의 호흡을 노련하게 리드하는 가운데 셰인 맥마흔이 차근차근 스턴트를 쌓아가며 이를 따라가는 양상으로 진행됐다. AJ는 셰인이 마음껏 뛸 수 있도록 경기의 흐름을 조율했고, 판을 제대로 깔아준 상태에서의 셰인은 특유의 과감한 액션을 마음껏 선보였다. 링 포스트 꼭대기에서 맞은편으로 길게 점프하며 드롭킥을 선사하는 포스트 투 포스트, 장외에 설치된 구조물론 엘보 드롭을 날리는 립 오브 페이스, 그리고 공중에서 전방으로 270도 역회전하며 뛰어내리는 슈팅스타 프레스 같은 고난도 공중기술까지 총동원됐다. 시작부터 엄청난 장면이 속출했다.

4.jpg

두 번째 경기로 열린 크리스 제리코와 케빈 오웬스의 WWE US 챔피언십이 보기 좋게 기세를 이어갔다. 제리코와 오웬스는 악역의 포지션에서 경기의 스토리텔링을 더욱 섬세하게 다듬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다소 둔해 보이는 외양과는 달리 뛰어난 운동 신경을 자랑한다는 점 또한 마찬가지다.

최근 들어 세월의 흐름을 막지 못한 제리코의 육체적 능력 감소라는 리스크도 있었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내용은 수준급이었다. 특히 프로그 스플래시, 라이언설트, 문설트 프레스로 이어지는 화려한 공중기와 반격을 통해 속도감 넘치는 공방이 벌어졌다. 제리코는 나이를 망각한 것처럼 오웬스의 빠른 경기 템포를 무리 없이 읽었고, 큰 볼거리를 선사했다.


■ 충격의 하디 보이즈 복귀와 우려를 불식시킨 골드버그-레스너의 괴수대전

5.jpg

최고의 장면은 이후 열린 WWE RAW 태그팀 챔피언십에서 탄생했다. 당초 3자간 사다리 경기로 예정된 이 매치업이 즉석에서 4자간 경기로 변경됐는데, 마지막 출전팀이 하디 보이즈로 확정되며 깜짝 복귀를 알린 것.

하디 보이즈는 과거 WWE의 태그팀 중흥기를 이끌었던 주역이다. 흡입력 강한 카리스마와 화려한 스턴트 액션이 트레이드마크. 이들은 WWE를 떠난 후에도 TNA, ROH, 오메가 등 활발한 인디 단체 활동을 통해 여전히 현역에 가까운 기량을 유지해왔다. 그리고 복귀전으로 치러진 WWE RAW 태그팀 챔피언십에서도 다시 한번 극한의 스턴트 액션을 펼쳤다. 매트 하디는 사다리 꼭대기에서 칼 앤더슨에게 트위스트 오브 페이트를 사용하며 바닥으로 추락했고, 제프 하디는 장외에 설치된 사다리 위로 세자로와 셰이머스에게 마무리 기술인 스완턴 밤을 선물했다.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장면을 다수 연출한 하디 보이즈는 결국 WWE RAW 태그팀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통산 WWE 태그팀 챔피언 7회 등극이라는 진기록이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태그팀 디비전의 위상도 순식간에 급상승했다.

대회 중반까지도 이 흐름은 비교적 무난하게 이어졌다. 브레이 와이어트와 랜디 오턴의 WWE 챔피언십이 다소 단편적인 공방으로 지루함을 낳으며 분위기가 침체되기도 했다. 하지만 앞뒤로 배치된 경기들이 충분히 상쇄작용을 했다. 트리플 H와 세스 롤린스의 싱글 매치도 수준급이었고, 무엇보다도 큰 우려를 자아냈던 WWE 유니버설 챔피언십이 예상외로 성공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6.jpg

WWE 유니버설 챔피언십에 출전한 골드버그와 레스너는 모두 회당 출연료를 받는 파트타임 프로레슬러다. 지난해 서바이버 시리즈를 통해 WWE로 돌아온 골드버그는 복귀 직후만 하더라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스쿼시 매치만 치르는 탓에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팬들 또한 짧은 시간 안에 마무리되는 경기에 불만을 터뜨렸다. 설상가상으로 이번 레슬매니아가 골드버그의 계약상 마지막 경기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를 향한 환호는 어느덧 야유로 바뀌었다.

골드버그의 아킬레스건은 체력이다. 매번 스쿼시 경기만 치렀던 이유도 바로 이 부분에 있다. 레스너와 골드버그는 이처럼 장시간 경기를 가져가기 힘든 상황을 최대한 커버하기 위해 특유의 압도적인 완력을 전면에 내세워 경기를 운영했다. 비록 5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들은 시작부터 서로 치열하게 치고받는 총력전을 펼쳤다. 수차례 저먼 수플렉스와 스피어로 타이트하게 공방을 이어갔고, 그 과정에서 장외 바리케이트까지 무너지는 아찔한 범프도 이어졌다.

마치 영화 속 괴수들이 내일은 없는 것처럼 서로를 향해 돌격하는 양상 속에서 경기는 레스너의 승리와 함께 새 유니버설 챔피언 등극으로 마무리됐다. 민망할 정도의 야유를 쏟아내던 관객들의 반응은 경기가 끝나자 환호로 바뀌어 있었다. 거대한 육체가 서로 맞부딪히며 ‘짧고 굵게’라는 수식어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준 순간이었다.


■ 레슬매니아 33이 넘지 못한 마지막 9부능선 

7.jpg

그러나 레슬매니아 33은 마지막 능선을 넘지 못했다. 메인이벤트가 엄청난 역반응을 넘어 무반응을 낳았다. 로만 레인즈와 언더테이커의 경기는 단지 ‘경기력이 부족하지만 회사가 간판스타로 키우는 미남 선수’가 ‘WWE의 아이콘이자 레슬매니아의 상징적인 선수’를 꺾었기 때문에 일어난 거부 반응으로 설명하기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산적해 있다.

알려진 대로 로만 레인즈는 최근 WWE가 회사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푸시(선수를 띄워주기 위해 각본에서 강함을 어필하거나 연승을 하게 만드는 작업)하는 선수다. 준수한 외모와 보기 좋은 체격이 어린이와 여성 팬층에 강하게 어필했다. 그러나 그에 걸맞지 못한 경기력으로 매번 논란이 됐다. 특히 프로레슬링의 경기력을 중시하는 현장의 남성 관객들은 대부분 그에게 비관적인 반응을 보인다.

문제는 부족한 경기력의 레인즈와 호흡을 맞추는 상대방이 바로 고령의 언더테이커였다는 점이다. 

8.jpg

1990년 WWE에 입단한 언더테이커는 이후 단 한 번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단체를 위해 헌신한 선수다. 2m가 넘는 전형적인 거인 타입이었으나, 체격에 비해 대단히 빠르고 화려한 몸놀림을 자랑하는 프로레슬러다. 지난 2014년 레스너에게 1패를 거두긴 했으나, 그 전까지 매년 레슬매니아에 개근하며 21연승이라는 기록 또한 가지고 있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최근 3년 사이 그의 몸 상태가 급속도로 악화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누적된 각종 잔 부상이 그를 괴롭혔다. 스피드도 현저하게 떨어졌다. 이러한 가운데 프로레슬링 업계 전반에서도 이미 '이번 레슬매니아가 언더테이커의 마지막 은퇴 경기가 될 것'이라는 루머가 공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1965년생(일각에서는 1962년생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 나이로 53세인 언더테이커는 더이상 젊은 선수들을 상대로 경기를 리드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레인즈는 자신의 능력으로 이 상황을 극복해내지 못했다.


■ 자신을 증명하는 데 실패한 차세대 간판과 전설의 안타까운 퇴장

9.jpg

프로레슬링은 승자와 패자가 정해져 있는 장르다. 상대와 합을 맞추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한 경기력은 가장 기본적인 요소다. 특히 프로레슬링에서 경기를 리드하는 측의 미덕 중 하나는 바로 왕성한 활동량인데, 체력이 충분하지 않거나 경기를 읽는 감각이 부족한 선수들을 상대할 때 이러한 부분은 더욱 중요해진다. 기술을 걸거나 접수하는 모든 상황에서 상대를 향해 먼저 움직여 공방의 프로세스를 연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에서 레인즈는 여전히 초보적인 모습을 벗어나지 못했다. 기술 접수를 위해 링 중앙에 대기하고 있는 언더테이커를 향해 로프 반동으로 공격의 시동을 걸었으나, 상대와 부딪힌 직후 그 어떠한 기술도 구사하지 못했다. 결국 펀치로 상황을 대충 수습하거나 2회의 반동을 더 거쳐 결국 스피어로 마무리하는 등 관객들이 보기에도 민망한 상황이 이어졌다.

심지어 완력마저 부족했다. 레인즈는 언더테이커의 툼스톤 파일드라이버를 역으로 뒤집어 반격하는 리버설 과정에서 두 차례나 상대를 들어올리는 데 실패하며 촌극을 빚었다.(이 부분에서 추가적으로 그립을 제대로 연결하지 못한 실수도 있었다.) 스스로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결국, 경기는 중반부터 도저히 수습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10.jpg

안타까운 사실은 이 경기가 언더테이커의 은퇴전이 될 가능성이 유력하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 경기를 상대에게 헌납하며 세대교체라는 WWE의 대관식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언더테이커가 패배 직후 링 위에 자신의 모자와 오픈핑거 글러브, 그리고 검은색 코트를 고이 내려둔 채 경기장을 떠난 점이 이러한 사실을 암시한다.

선역임에도 불구하고 야유를 한몸에 받는 레인즈에게 이번 경기는 대단히 중요한 기점이었다. 쏟아지는 역반응을 감수하며 WWE를 상징하는 선수의 은퇴전을 제물로 세팅한 만큼, 그것을 최대한 살렸어야 했다. 하지만 회사의 전폭적인 지지와 언더테이커의 헌신이 무색하게도 레인즈는 기회를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 오히려 언더테이커의 패배와 감동적인 은퇴로 이어져야 할 레슬매니아의 엔딩에 찬물을 끼얹은 꼴이 됐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만 같던 언더테이커의 퇴장은 그렇게 두고두고 씁쓸한 마무리로 남았다.

물론 이것이 오롯이 레인즈만의 책임은 아니다. 경기력이 부족한 그를 철저히 제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세대교체의 대관식에 떠민 WWE의 전략에 공감하기 힘들고, 각본의 개연성 또한 없다는 점이 선행 지적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태의 책임에서 가장 큰 지분 또한 레인즈에게 있음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하다못해 경기 순서만이라도 메인이벤트가 아닌 허리 라인으로 배치했다면 작금의 극단적인 비난은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을 거라는 사실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 용두사미(龍頭蛇尾)··· but show must go on

last.jpg

거대한 무대 장치, 화려한 연출, 중반부까지 쾌조의 흐름을 보이며 수준 높은 경기들을 생산하던 WWE 레슬매니아 33은 결국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다.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이 심히 미약했다. 벽돌을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 올린 공든 탑도 결국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 

물론 무엇을 하건 레인즈에게 야유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이를 극적으로 뒤집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역반응이 더 심해지는 것은 막아야 했다. 그리고 이 결정적인 상황에서 레인즈의 경기력이 다시 발목을 잡았다. WWE 입장에서도 전 세계 프로레슬링 업계가 모두 주목하는 가장 큰 축제의 메인이벤트가 이렇게 끝나길 바라진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WWE의 가장 큰 사이클은 이렇게 또 한 번 순환을 마쳤다. 이제는 2018년에 펼쳐질 레슬매니아 34를 위해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좋은 쇼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한해 농사를 망친 WWE로서는 올 한해 다시 큰 숙제를 떠안게 됐다. 물론 그들이 생각하는 성공이 단순한 게이트 수익을 말하는 것이라면 72,245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이미 흡족할 만한 성적표를 받았다고 자평할 순 있겠지만 말이다.


[사진] ⓒWWE.com
조형규 기자(press@monstergroups.com)
[㈜몬스터그룹 몬스터짐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품 랭킹 TOP 0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