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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87일 오전 11, 저마다 있던 일손을 잠시 놓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텔레비전 수상기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집에 있던 사람들은 드르륵 소리가 정겹던 거실의 텔레비전 앞으로, 역과 공항의 사람들은 대합실에 놓여있던 텔레비전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은 모두 한 곳, 회색 유도 매트로 향해있었다앞서 금메달의 기회가 있었던 김재엽황정오는 은메달에 그치며 대한민국 유도사상 첫 금메달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져있는 상태. TV에 펼쳐진 그 매트 위에는 유도 71kg 급의 안병근, 그가 서 있었다


상대는 83년 세계선수권대회 은메달리스트 이탈리아의 유도 영웅 에치오 감바, 이미 4강전에서 혈전을 치루고 올라와 지칠대로 지친 상태. 하지만, 물러설 곳은 없었다. 마침내 경기는 시작되었고 210초가 지난 순간, 그의 손이 감바의 소매로 향했다.

 

그 이후 32년이 지났다. 잡아챈 감바의 소매는 안병근의 미래를 어떻게 바꿔놓았을까? 용인대학교의 안병근 교수를 그의 모교 용인대학교 무도대학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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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 대표팀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로는 현재 용인대학교 경기지도학과 교수로 있습니다.

 

학교에서 주로 어떤 것을 가르치나요?

- 현재 학생들의 실기수업을 맡아서 지도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학생들과 연습도 하고, 대표선수들이나 유도부 선수들이 연습할 때 지도도 해주면서 즐겁게 교직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교수 이외에 다른 일도 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 현재 대한유도협회의 선수강화위원장도 같이하고 있습니다. 선수들이 훈련을 잘하고 대회를 잘 치룰 수 있도록 조언을 해주는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거칠 것이 없었던 유도소년

 

유도에 처음 입문했던 계기를 알고 싶습니다.

- 대구의 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정규 수업시간의 과정에 유도 과목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유도를 처음 접하기 시작했고, 1학년 2학기에 들어가서 형님이 유도를 전문적으로 해보는게 어떻겠냐는 권유를 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유도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계성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청소년 대표는 물론 국가대표 상비군에 당당히 뽑히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의 훈련은 어땠습니까?

- 사실 그때는 막내였던 시기였기 때문에 선배들에게 보고 배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코치와 감독 선생님의 말도 중요했지만, 그 당시에는 선배들의 말이 무엇보다도 더 소중했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선배들이 가르쳐 준 것을 토대로 훈련을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때의 훈련과 지금의 훈련의 가장 큰 차이점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 아무래도 그 당시에는 정확한 운동 프로그램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선배들이 가르쳐주는 노하우에 의존해서 트레이닝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것이 단적으로 드러날 때가 바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할 때였는데, 세트라든지 중량이라든지 그런 요소가 저에게 맞지 않더라도 선배의 말을 따라서 무조건 해야할 때가 있었습니다.

 

계성고 3학년 시절인 1980년에 하와이에서 열렸던 제1회 범태평양배 유도선수권 대회에 나가셨습니다. 당시 느낌은 어땠습니까?

- 당시 모스크바 올림픽 1차 선발전 때 고등학생이었는데도 3위를 차지 했었습니다. 이후 태릉선수촌에 입소해서 자체 평가전을 거친 끝에 그 대회를 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죠. 당시에 어린 나이에 시니어 대회를 나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 대회에 나가서 동메달을 차지했는데, 학교에서도 제 성과에 대해 매우 크게 여겨주었기 때문에 정말 기분이 좋았었습니다.

 

1982년과 1983년 세계 청소년 선수권, 세계 대학 선수권에 연달아 출전하셨습니다.

- 당시 체급을 71kg로 맞춰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82년에 출전하고 1년 후에 83년 대회에 참가를 하려고 했는데 포클랜드 전쟁으로 인해서 아르헨티나에서 열리려던 대회가 무산이 되는 바람에 핀란드에 있었던 대학 선수권 대회에 출전 했습니다. 당시에 어려운 상대를 모두 꺾고 올라가다, 비교적 쉬운 상대를 만나 탈락을 했는데 과정은 좋았지만 결과적으로 메달을 따지 못했기 때문에 좀 씁쓸한 감정이 조금은 있었습니다.

 

84년 올림픽의 금메달의 밑거름이 되어준 여러 대회 가운데 어떤 대회가 가장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 어떤 대회든지 준비기간을 위해 강도 높은 훈련을 하고 상대 선수의 정보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대회는 844월에 열렸던 아시아 유도선수권 대회였습니다. 당시에 준결승에서 일본 선수에 패하고 동메달을 차지했었습니다. 그때 패자부활전을 준비하는데, 어떤 한국분께서 저에게 수고했어라는 한마디를 해주셨습니다. 저는 답례로 인사를 했는데 그 분이 내가 볼 때는 안 동무가 완전히 이긴 시합이야라고 말씀을 해주셔서 매우 놀랐습니다. 듣기로는 북한 유도의 서기장 급이라고 들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경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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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84LA 올림픽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그 당시에 국가대표 선발 과정부터 LA에 가기까지 어떤 대회보다 힘겨웠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LA까지 가게 되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 83년 모스코바 세계선수권 대회를 앞두고 KAL기 피격 사건이 터지게 되면서 그 대회를 보이콧 하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대표팀에 간염이 전염병처럼 퍼졌습니다. 저도 간염에 걸렸기 때문에 선수촌을 나와서 개인훈련을 해야 했는데,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다행히 저의 모교인 유도교(지금의 용인대학교)에서 개인훈련을 허가해 주었고, 일본 전지훈련까지 동행을 하게 해주면서 몸을 잘 만들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또한 국가대표 신분이었기 때문에 대한체육회에서 따로 식비를 지급해줬고, 개인훈련을 함과 동시에충분한 음식 섭취를 통해 선발전과 아시아선수권을 준비했고 좋은 결과를 내서 미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보더라도 당시에는 금메달까지 갈 것이라 확신을 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이 봐도 메달권까지 갈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금메달까지 갈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었습니다.

 

개인훈련을 했던 것 중에 가장 도움이 되었던 운동은 무엇이었나요?

- 고향인 대구에 내려갔을 당시 아침부터 혼자 산에 올라가서 나무에 고무줄을 매달고 그것을 당기는 운동을 했습니다. 당시에 1000개씩 당겼는데,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당시 영하 10도의 날씨였음에도 땀을 비오듯 흘렸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오면 그 땀들이 더 얼어버렸을 정도로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것이 도움이 되었는지 이후의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되었고 금메달도 딸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올림픽 당시의 상대가 1회전에는 아일랜드의 키에런 폴러 (당시에는 키란) 2회전에서는 엘살바도르의 후안 바르가스, 3회전에서는 일본의 나카니시 준결승전에서는 영국의 브라운, 마지막 결승전에서는 이탈리아의 명 선수였던 에치오 감바였습니다. 어떤 선수가 가장 힘들었습니까?

- 8강에서 만났던 나카니시 선수가 매우 기억에 남습니다. 그 선수가 83년 세계선수권 우승자였는데 대진이 나왔을 당시에 그 선수에게 어려움을 겪지 않을까 예상을 했는데 잘 풀어나가서 승리를 따내고 준결승전 결승전에 거쳐서 금메달을 따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나카니시 선수는 지도를 2번이나 받을 정도로 소극적으로 경기를 했는데요 나카니시 선수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던 비법 같은 것이라도 있었나요?

- 무조건 공격적으로 가자는 작전이 통했습니다. 공격적으로 가져가기 위해 저돌적으로 잡기 싸움을 가져갔고 나카니시 선수는 저의 공격적인 모습에 당황했는지 뒤로 물러서다가 계속 지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8강전 이후 공격적인 경기운영을 하면서 금메달을 딸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결승전 상대인 에치오 감바 선수를 상대로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경기를 풀어나가며 금메달을 따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어땠나요?

- 초반에는 호각세로 풀어나갔습니다. 그러다가 2분 10초에 주특기인 업어치기로 효과를 얻어냈고 3분에는 누르기로 효과를 다시한번 얻어내면서 이기게 되었는데, 그 당시의 영상을 보다보면 감회가 새롭습니다.

 

경기가 끝나는 순간 어떤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나요?

- 경기가 끝나고 아무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내가 정말 금메달을 땄나 이런 생각만 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어렸을 때 지도했던 선생님들과 가족들, 동료들이 많이 생각이 났습니다.

 

86년에 은퇴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87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다시 돌아오셨는데요 게다가 71kg 이었던 체중을 78kg까지 올려서 출전을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 체중 감량에 매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후 86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고나서 더 이상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지도자 생활을 하기 위해 은퇴를 했지만, 나이가 젊다보니 학생들과 훈련을 하다보면, 체급을 올려서 출전을 해도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변에서도 체급을 올려서 출전을 해도 된다는 권유도 있어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훈련량이 그때보단 적었고 상대 선수 정보력도 없었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내진 못했지만, 후회는 없었습니다.

 

이후에 유도교(지금의 용인대학교) 교수가 되셨습니다. 선수 시절부터 지도자 공부를 계속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 지도자는 1985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조교 생활을 시작했고, 88년부터 전임강사를 시작했습니다. 이후에 학교에 적을 두고 생활하면서, 국가대표 코치와 감독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안병근 교수님이 코치시절에 가르쳤던 여자유도의 김미정, 조민선 선수 남자 유도의 전기영 선수가 92년 바르셀로나, 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안병근 코치의 공이 매우 컸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당시에 열악했던 여자유도가 메달을 딴 것이 매우 고무적이었습니다. 그때가 여자유도가 처음 종목이 채택되면서 남자선수들과 훈련을 할 수밖에 없던 환경이었는데 금메달을 따냈다는게 가장 좋았습니다.

 

이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대표팀을 맡지 않으셨는데 공교롭게도 안병근 교수님이 계시지 않았던 시드니 대회에서는 한 개의 금메달도 따내지 못했습니다.

- 당시에 조인철 선수가 참 아쉬웠습니다. 당시 상대였던 다키모토 선수가 이전에 이겼던 상대였기 때문에 충분히 금메달을 딸 것이라 생각을 했는데 힘을 써보지 못하고 패하는 것을 보면서 역시 금메달은 하늘이 정해주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이후 베이징 올림픽에서 대표팀을 맡으셔서 최민호 선수를 금메달리스트로 만드셨습니다. 안병근 교수님만의 지도철학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철학을 가지고 제자들을 가르치시나요?

- 저는 선수들과 같이 호흡하면서 지도하는 편입니다. 코치시절에는 선수들과 직접 경기도 하면서 올림픽에 한번 더 나갈 수 있었고, 이후에는 선수들의 좋은 성적을 위해 최선을 다해 연습에 응했습니다.

 

선수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점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 저는 선수들에게 기본기를 가장 강조합니다. 유도는 기본기 하나에 승부가 갈리는 스포츠이기 때문에 잡기와 같은 기본기를 철저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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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의 유도, 그리고 2016년의 유도


1984년부터 2016년까지 대한민국 유도가 많은 발전을 이뤄냈습니다. 안병근 교수님이 느끼시는 1984년의 유도와 2016년의 유도, 어떤 느낌인지 궁금합니다

- 아무래도 여자유도의 발전이 매우 눈에 띕니다. 제가 코치를 할 때만 하더라도 여자유도는 남자와 통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훈련도 남자 선수들과 같이 훈련했습니다. 지금은 이원희, 최민호 코치를 필두로 한 코치진들이 여자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기 때문에 여자유도를 한번 주목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요즘은 훈련 프로그램이 많이 진화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어떤 방식으로 국가대표 훈련이 진행되나요?

- 저희가 활약하던 시절에 비해 좋아졌습니다. 최근 스포츠는 운동 생리나 심리와 같은 과학적인 측면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예전의 체력과 정신력만을 중시하던 것에 비해 유도 기술이 매우 상향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스포츠과학연구소의 연구원들과 체력 트레이너들이 선수에 맞는 훈련 프로그램과 대회에 맞는 스케줄을 정해주면 선수들이 그것에 맞춰서 대회를 준비하게 되기 때문에 매우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경기력을 끌어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웨이트 트레이닝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 일주일에 목요일과 금요일을 제외하고 하게 되는데 보통 오전 1030분에 시작해서 12시까지 합니다. 시간은 적은 편이지만, 운동 강도가 일반적인 웨이트 트레이닝에 비해 상당히 높습니다. 게다가 웨이트 전의 준비시간까지 포함한다면 2시간 정도를 웨이트에 할애한다고 보면 됩니다.

 

이번 올림픽 유도의 메달 전망은 어떻게 보시나요?

- 이번 대회 같은 경우에는 전 체급에 걸쳐서 세계적인 실력을 갖춘 선수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대회 당일의 컨디션만 잘 조절한다면, 금메달 수확도 문제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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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유도를 이끌어 나갈 기대주 안바울 선수>


이번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중에 금메달을 딸 확률이 가장 높은 선수들을 꼽아주신다면 어떤 선수를 꼽을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 지난해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66kg의 안바울과 90kg의 곽동한, 동메달을 획득한 73kg의 안창림을 유력한 선수로 보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60kg의 김원진 여자유도에는 70kg의 김성연, 48kg의 정보경 63kg의 박지윤이 국제대회에서 꾸준한 성적을 내고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번에 이승수 선수가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는데 성공했습니다. 훈련 파트너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로 올라섰는데요 안병근 교수님이 본 이승수 선수는 어떤 선수였나요?

- 이승수 선수는 경기체육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 제가 잠재성을 알아보고 스카우트를 한 선수였습니다. 그만큼 가능성이 큰 선수였죠. 대학에 들어가서도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번 대회 국가대표에 선발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예상대로 국가대표에 선발되었습니다.

 

코치진 구성도 올해 최고의 코치진으로 짜여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수님도 이에 동의하시는지 궁금합니다.

- 남자팀 같은 경우에는 지난 런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송대남 코치와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최민호 코치가 잘 지도를 하고 있고, 여자부 같은 경우에는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이원희 코치 그리고 김미란 코치와 지난 올림픽 동메달 리스트 조준호 트레이너가 잘 지도를 하고 있고, 서정복 총감독이 잘 총괄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대회 준비는 착실하게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리우 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이 가장 중요할 때라고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대회를 앞두고 중점을 둬야할 점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부상 관리입니다. 예전에도 부상 때문에 메달 문턱에서 주저앉는 선수들을 많이 봤기 때문에 첫째도 둘째도 부상을 조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체력훈련과 전술훈련의 마무리 단계를 잘 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번 리우 올림픽에 나서는 후배들에게 격려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 후배들에게 이 한마디만 해주고 싶습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자기의 할 일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이 뜻과 같이 올림픽까지 열심히 운동하고, 때를 기다린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모두들 선전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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