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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아시아=조형규 기자] 2006년 WWA 입단, 2008년 프로레슬링 데뷔전을 시작으로 10년 넘게 프로레슬러 커리어를 이어오고 있는 김민호에 대한 평가는 명확하다. 주변 지인들부터 동료 선수들, 팬들까지 모두 그의 한결같은 모습에 혀를 내두른다.

여기서 말하는 김민호의 한결같은 모습은 성실함을 의미한다. 2006년, 20세의 김민호는 프로레슬러가 되기 위해 이왕표 체육관에 매일 출근도장을 찍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는 아침 일찍 체육관에 가장 먼저 나타나 수백 번의 낙법과 스쿼트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묵묵히 해냈다. 

1년 365일 내내 계속된 그의 노력과 성실함은 결국 한사코 제자를 받지 않겠다던 선배들의 마음마저 움직였다. 그렇게 김민호는 노지심의 지도하에 프로레슬링 수련을 시작했고, 10년 후 마침내 스승이 가지고 있던 타이틀을 허리에 둘렀다.

김민호는 지금도 프로레슬링이 너무 좋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프로레슬링을 사랑해서 프로레슬러가 된 만큼 정체성도 강하다. 일상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가면서도 그는 여전히 퇴근 후 매일 세 시간씩 강도 높은 운동을 이어간다.

그 때문일까. 간혹 프로레슬러와 평범한 일상의 직장인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낄 때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러한 위기에서 다시 마음을 다잡게 해준 원동력도 바로 이 꾸준함과 성실성이었다. 김민호는 인터뷰 내내 "내 가장 큰 무기는 바로 꾸준함이었다"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다음은 스포츠아시아가 김일-이왕표-노지심에 이은 제4대 WWA 극동 헤비급 챔피언 김민호와 나눈 인터뷰 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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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정확한 프로레슬링 입문 시기가 언제였나.
ㅡ원래는 고등학생 때 (선수가 되기로 마음먹은 직후) 바로 프로레슬링을 배우고 싶었는데 당시 이왕표 체육관이 굉장히 먼 곳에 있었다. 통학하면서 가기엔 거리가 너무 멀더라. 그래서 어떤 운동이 프로레슬링에 도움이 되는지 물어봤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아마추어 레슬링과 유도였다. 그렇게 유도를 먼저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내 실력이 좋았는지, 체육관 관장님이 부모님께 연락해서 ‘민호 프로레슬링 시키지 말고 유도 계속해야 된다’고 엄청 말리기도 했다(웃음).

Q. 그런데도 불구하고 굳이 프로레슬링이라는 어려운 길을 택했다(웃음). 열정의 힘인가.
ㅡ그렇다. 나는 지금도 프로레슬링이 정말 좋다. 그렇게 유도를 하다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한국프로레슬링연맹(WWA)을 찾아갔다. 하지만 거기서도 곧바로 프로레슬링을 배우진 못했다.

Q. 무슨 이유인가?
ㅡ우여곡절이 많다. 당시 연맹 내부가 어수선한 상황이었는데, 더 이상 신인을 양성하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훈련 자체를 이어가기가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지. 그래서 처음 1년은 제대로 된 프로레슬링 훈련을 받지 못했다. 

Q. 그렇다면 그 1년 동안 대체 뭘 했나.
ㅡ별다른 포장이나 가식 없이 순수하게 내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프로레슬링이 정말 좋았으니깐. 2006년 스무 살 시절의 내 생활은 이왕표 피트니스 체육관에 매일같이 출근해서 매트 깔아놓고 혼자 낙법을 수백 번씩 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낙법이 끝나면 웨이트 트레이닝을 세 시간씩 이어갔고, 스쿼트도 매일 500개, 1000개씩 했다. 그걸 정확히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지켰다. 물론 사람인지라 일요일은 나도 쉬고(웃음).

Q. 결국 그 성실함이 마음을 움직였군.
ㅡ1년 동안 꾸준히 그런 모습을 보여드리니깐 마침내 노지심 대표님도 ‘그래, 넌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것 같다’고 하시더라. 그렇게 인정을 받고 노지심 대표님의 일대일 지도로 프로레슬링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다행히 훈련하면서 노지심 대표님도 내게서 가능성을 보신 것 같다. 그 후 ‘조금 더 큰물에서 배워보라’는 권유로 일본 프로레슬링 단체 노아(NOAH)로 건너가 반년 정도 연습생 생활을 하고 다시 한국으로 넘어왔다.

Q. 지금이야 신일본프로레스가 명실상부한 전 세계 2위, 일본의 톱 프로레슬링 단체이지만 당시만 해도 노아가 일본 프로레슬링의 넘버원 단체였다. 그만큼 경쟁이나 생활도 치열했을 것 같은데. 연습생 생활은 어땠나.
ㅡ맞다. 지금 신일본의 위치를 당시에는 노아가 차지하고 있었던 만큼 단체 내부에서의 프라이드가 대단했다. 게다가 코바시 켄타의 복귀전이 코앞이었고, 항상 무도관에서 흥행을 열면 매일 만원 관중 신기록을 갱신하던 상황이었으니깐. 덕분에 합숙소 내에서 선후배 간의 위계질서와 규율도 정말 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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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예를 들면?
ㅡ 청소, 밥, 설거지 같은 일상생활부터 선배들 준비운동에 필요한 모든 것까지 내가 다 도맡아 했다. 식사도 선배들이 모두 다 마친 후에야 겨우 먹고 정리하고. 완전 쌍팔년도 군대 같았다. 나중에 모리시마 타케시가 말해준 건데, 합숙소에서 생활하면서 연습생으로 그렇게 하드 트레이닝을 거친 선수는 내가 마지막이었다고 하더라. 그 후에는 더 이상 나 같은 훈련생을 받지 않았다고 들었다.

Q. 이런 말은 되도록 지양하려고 했는데 ‘나 때는 그랬어’라는 말이 정말로 나올 법하다(웃음). 그렇다면 노아에서 데뷔할 수도 있었을 텐데.
ㅡ실제로 WWA와 노아가 합동으로 흥행을 추진했었다. 마침 당시 내가 최초의 한국인 연습생이자 또 마지막 훈련생이었기 때문에 노아에서도 이슈를 만들고 싶어 했고. 그래서 WWA와 노아가 대립하는 형태로 큰 대회를 기획하고, 거기서 데뷔전을 치르는 것으로 예정을 잡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시기에 병역 문제가 겹쳤고, 설상가상으로 당시 노아의 미사와 미츠하루 사장이 경기 중 백드롭을 잘못 맞고 별세하면서 모두 없던 일이 됐다.

Q. 안타까운 사연이다. 그렇다면 데뷔전은 언제였나.
ㅡ정확히 2008년 4월 30일이다. 한국에서 노아 선수들이 여럿 참전하면서 열린 대회였는데 준비도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노아의 이토 아키히코 선배를 상대로 어설프게 데뷔전을 치렀다. 지금 다시 봐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경기다.

Q. 사실 그 경기 나도 봤다(웃음).
ㅡ솔직히 시합 당시라던가 끝난 직후에는 기억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영상을 돌려 보니깐 내 얼굴이 다 화끈거리더라. 등장부터 시합 끝날 때까지 정말 아무것도 못했다. 입장할 때는 아무런 어필도 못 했고, 시합 전 레프리가 체크할 때도 얼어서 멀뚱멀뚱 서 있었다. 경기 중에는 들어가야 할 기술도 안 들어가고. 마지막에는 보스턴 크랩으로 졌는데 서브미션이 들어올 때 전혀 방어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졌다. 정말 엄청나게 아팠다.

Q. 색다른 의미로 평생에 기억이 남을 경기가 된 것 같다(웃음). 그렇다면 정말 기억에 남는 시합을 꼽아본다면. 아, 이번에 치른 조경호와의 타이틀전을 제외하고.
ㅡ역시 모리시마 타케시와의 싱글 매치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물론 나는 기본적으로 모든 프로레슬러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월드클래스로 손꼽히는 엄청난 선수와의 싱글매치가, 그것도 막 데뷔한 신인 선수에게 주어진 거다. 다행히 부족한 당시 내 실력 이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경기를 만들었고, 그 사실 때문에 스스로 감격했다. 앞으로도 이런 엄청난 선수들과 또 겨룰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준 경기이기도 했다. 

Q. 그런 희망의 순간도 있지만, 삶이 항상 상향선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갑자기 우울한 이야기로 급반전을 줘서 미안한데, 혹시 프로레슬링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없었나.
ㅡ솔직히 매 순간 힘들었다. 내가 프로레슬링을 좋아하는 만큼 프로레슬러로서의 정체성도 강한 편이다. 그런 마인드로 자신감을 갖고 그렇게 행동하고 어필하고 싶은데, 사실 직장인이라는 일상으로 또 돌아와야 한다. 그 속에서 평범하게 행동하고 업무를 소화하고... 그때의 괴리감이 크다. 가장 힘든 부분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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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렇긴 하다. 사실 엘리트 체육이나 소수의 인기 프로스포츠가 아닌 이상에야 전업 선수로 활약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나.
ㅡ프로레슬링을 좋아하는 만큼 경기에 대한 갈증도 크다. 하지만 경기 자체가 많지 않다 보니 계속 이런 과정의 반복이었다. 왜 김일 선생님께서 ‘참을 인(忍)’ 이 한 글자를 남기고 떠나셨는지 지난 10년 동안 정말 처절하게 배웠다.

Q. 그런데도 프로레슬러로서의 삶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는.
ㅡ내 무기는 꾸준함이다. 20살 때도 그랬고, 노아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이 꾸준함을 무기로 일상에 지치지 않고 계속 선수로 링 위에 서고 싶다. 그리고 프로레슬러로서 내가 추구하는 것도 ‘프로레슬링을 잘 알지 못하는 라이트 팬에게도 감정이 전달되는 시합’이다.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내 감정을 전달하고, 또 그 속에서 감동을 만드는 그런 경기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Q. 이제 극동 헤비급 챔피언이라는 자리에 오른 만큼 그 의지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을까. 
ㅡ어쨌든 현재 내가 세대교체의 첫 주자로 스타트를 끊은 상태 아닌가. 그렇다고 이게 나 혼자 어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더 많은 후발주자들이 나왔으면 좋겠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힘을 모아 좋은 경기를 많이 만들고 싶다. 분명 대중에게 사랑받고 같이 호흡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다. 결국 프로레슬링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선수와 관객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프로레슬링을 만들고 싶다.

[사진] 김민호 선수 제공/조형규
조형규 기자 (deux7d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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