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위싸움이 한창이던 12월의 어느날, 정관장 레드 스파크스의 고희진 감독과 구단은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3라운드가 지나도록 좀처럼 기량을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던 아웃사이드 히터 지아를 어떤 방식으로 살릴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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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드 까지만 하더라도 아시아쿼터 아포짓 스파이커인 메가와 함께 쌍포를 이루며 활약하던 지아였지만, 1라운드 중반부터 상대의 수비에 막히는 모습을 보여주더니 범실까지 남발하며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특히 3라운드에서 39%까지 떨어진 공격종합 성공률은 정관장의 공격에 치명적으로 작용했고, 팀 순위 역시 기업은행과 함께 4위와 5위를 번갈아 맞바꾸며 6위 도로공사에 추격을 허용하는 위기까지 있었다.

지아에 대한 교체 여론도 있던 때였었지만, 고희진 감독은 "외국인 선수 둘은 문제가 전혀 없습니다. 믿고 가겠습니다." 라는 말로 지아에게 큰 신뢰를 보냈고 구단도 고희진 감독의 의견을 받아들이며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지아는 고희진 감독의 믿음에 보답했다. 팀의 주장이자 공수 겸장인 이소영이 본격적으로 전열에 복귀한 4라운드부터 지아는 40% 중반에 다다르는 공격성공률과 40%대의 리시브 효율을 기록하며 팀의 고공행진을 이끌었다. 미운오리였던 지아의 놀라운 반전이었다.

그렇게 정관장은 6년의 세월을 지나 7년만에 봄내음이 나는 체육관에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만년 최하위 팀, 용병 몰아주기 팀으로 비난을 받았던 지난날의 설움들을 한번에 날릴 수 있게 된 정관장의 유쾌한 반란이었다. 



고희진 감독은 부임 초기부터 잡음이 있었다. 정관장의 팬들은 고희진 감독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 했고, 고 감독은 한껏 높아진 팬들의 눈을 맞추기 위해 매일 끊임없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만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었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은 시기도 바로 이때였다.

최고의 외국인 선수 엘리자벳을 데려왔지만 단 1점차로 봄배구에 실패했던 지난해 봄, 고희진 감독은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올 시즌을 준비했다. 자신의 배구인생을 모두 건 고 감독은 여름 전지훈련부터 강도높은 훈련을 통해 선수들의 체력을 강화해나갔다.

고된 훈련이었지만 선수들의 체력은 이전보다 향상되었고, 어깨수술을 받은 이소영, 독감에 걸려 한 경기를 결장했던 지아 외에는 큰 부상 이슈없이 선수단은 6라운드까지 혹독한 일정을 소화해냈다.

외국인 선수들에게도 쏟는 정성은 엄청났다. 아시아 쿼터로 선발된 메가와티의 기량을 점검하기 위해 캄보디아까지 날아가 직접 경기를 지켜보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던 고 감독은 메가와티를 본 후 바로 아웃사이드 히터인 지아를 지명하며 구체적인 시즌 플랜을 짜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관장은 메가-지아-이소영으로 이어지는 V리그 최강급의 삼각편대를 만들어냈다.

물론 삼각편대가 만들어지기엔 시행착오는 반드시 거쳐야만 했다. 특히 2라운드와 3라운드에 들어서면서 상대팀들의 집중 견제가 시작되었고, 정관장은 연패를 당하며 중위권으로 추락했다. 외국인 교체와 더불어 감독 교체에 대한 여러가지 설들이 나온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어려운 시기에 정관장을 묶은 것은 '믿음'이었다. 고희진 감독이 지아를 믿었듯, 정관장의 수뇌부진 역시 고희진 감독을 믿었다. 그가 보여준 구체적인 플랜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시즌 내내 정관장 구단은 고희진 감독에 깊은 신뢰를 보냈고, 4라운드부터 그 끈끈한 믿음의 결과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희진 감독과 선수들은 정관장이 7년이 넘도록 밟아보지 못했던 무대를 밟는데 성공했다.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 차이만 있을 뿐 2024년에는 드디어 봄에 배구를 할 수 있다. 정관장 팬들이 오래도록 그려온 꿈을 드디어 이룬 것이다.

하지만, 정관장은 내친 김에 더욱 높은 곳을 바라본다. 단기전은 기세 싸움인 상황에서 최근 상승세에 오른 정관장이라면 충분히 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물론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까지의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시즌 내내 보여주었던 감독에 대한 믿음, 선수단에 대한 믿음이 이어진다면 12년 동안 숨죽여왔던 정관장의 포효가 되살아나기에 충분한 싸움이 될 것이다.

먼 길을 돌아 정관장에 찾아온 '대전의 봄', 벚꽃이 피는 계절 정관장의 앞에는 어떤 벚꽃길이 펼쳐져 있을까.  

사진=KOVO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