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BAN 조회 수 : 4489

2023.06.08 19:25

NBA, 미국 고등학교 농구 선수 55만 명 중에 단 60명 만이 들어갈 수 있는 꿈의 무대, 0.0109%의 확률을 뚫은 선수들은 부와 명예를 얻게 됩니다. 현재 NBA에는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리그를 이끌고 있습니다. 스테판 커리도 있고 르브론 제임스도 있죠. 그리고 괴물 니콜라 요키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이애미 히트의 지미 버틀러를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주류에 불과했던 지미 버틀러를 왜 주목해야 하냐구요? 지금부터 파란만장한 그의 스토리를 들려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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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파이널로 올라가기엔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내년에 같은 상황으로 돌아갔을 때 우리는 해낼 것입니다."
지난 2022년, NBA 컨퍼런스 파이널 7차전 끝에 탈락의 고배를 마신 마이애미 히트의 에이스 지미 버틀러는 경기 후 이 말을 남기고 다음 시즌을 기약해야 했죠. 그리고 1년 후 버틀러는 자신의 말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ESPN이 예측한 파이널 진출 가능성은 단 3%, 케일럽 마틴, 맥스 스트러스, 게이브 빈센트, 던컨 로빈슨... NBA에서 외면을 받은 Undrafted (드래프트 미지명 선수)들과 NBA 올스타는 커녕 가장 작은 선수들로 만들어낸 반란, 난공불락 보스턴의 TD가든을 침묵에 빠뜨린 마이애미 히트, 그 마이애미를 이끄는 지미 버틀러의 인생은 출생부터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떠났고, 그는 어머니의 품에서 자랐습니다. 하지만 버틀러가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그를 버렸죠. "난 너를 좋아하지 않아." 지미 버틀러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히는 어머니의 말이 그를 더욱 슬프게 했습니다. 그렇게 버틀러는 혼자가 되었고, 친구의 집을 전전하는 떠돌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 시절까지 떠돌이 생활을 이어갔지만, 미래에 대한 생각도 갖고 있었습니다. 풋볼 선수를 꿈꿨지만 더운 여름날, 보호 장구를 끼고 축구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에어컨이 있는 실내 스포츠인 농구로 자신의 진로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농구 선수로서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던 그의 인생에 귀인이 찾아오게 됩니다. 바로 친구 조던 레슬리를 만나게 되면서 부터입니다.

당시 같은 학교의 풋볼 선수였던 레슬리는 버틀러와 농구 대결을 하며 친해졌고, 버틀러를 그의 집에 머물게 했습니다. 레슬리의 부모는 그를 완전히 믿지는 못했지만, 레슬리와 그의 동생들이 버틀러를 아끼는 것을 본 후 버틀러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톰볼 고등학교 졸업 이후 버틀러는 대학교의 오퍼가 없었기 때문에 타일러 주니어 칼리지에서 1년을 보내게 됩니다. 타일러 주니어 칼리지까지의 삶에 대해 버틀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 지 묻는다면 제 대답은 이겁니다. 저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기 싫어요. 그건 저에게 끝장이라는 의미에요. 예전의 저는 저는 전문대에 가야 했고, 더 이상 갈 곳이 없었습니다." - 지미 버틀러 (너클헤드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하지만, 버틀러는 낙담하지 않고 1년 동안 좋은 실력을 코트에서 보여주며 정식 대학교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선수생활 이후의 삶도 생각하는 것이 중요했던 양어머니는 드웨인 웨이드가 나온 마켓 대학교를 추천했고, 버틀러는 그 대학교로 진로를 정하게 됩니다. 그 진로가 버틀러의 인생을 또 한번 바꾸는 전환점이 됩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버틀러를 견뎌낸 것은 긍정의 힘이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버틀러가 고난을 극복해낸 나름의 방식이었습니다. 긍정적인 자세와 함께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는 버틀러를 더욱 강하게 했고,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의 의지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신이 내린 천재가 아닙니다. 최고의 슈터도 아니고 최고의 핸들러도 아니죠. 가장 운동신경이 강한 것도 아닙니다. 가장 빠르지도 않지만, 전 항상 싸웁니다. 전 아무도 두렵지 않아요. 누구도 저에게 겁을 줄 수 없습니다." - 지미 버틀러
마켓 대학교에서도 버틀러가 주목을 받는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대학 선수들이 으레 그렇듯 첫 시즌은 벤치를 지키는 날이 많았고, 적응을 하지 못해 훈련장을 뛰쳐나가기도 했지만, 연습장에 가장 먼저 나와 가장 늦게 나오는 성실성을 본 버즈 윌리엄스 감독의 두터운 신뢰 속에 점점 출전 시간을 끌어올리게 됩니다.

다만, 그의 실력이 대학 무대를 주름잡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3년 동안 그의 대학교 성적은 평균 12득점, 5.5 리바운드, 1.1 스틸, 하지만 
졸업 시즌 평균 15.7득점 6.1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마켓 대학교의 에이스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 뿐만이 아닌 동료를 생각하고 동료들과 함께 이끄는 팀이라는 의미를 깨우치게 되었고, 버틀러는 대학교에서 여러 교훈들을 얻으며 약육강식의 NBA 사회로 나오게 됩니다.

2011년 열린 NBA 드래프트, 버틀러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죠, 
카이리 어빙, 카와이 레너드, 클레이 탐슨, 켐바 워커, 니콜라 부체비치... 기라성 같은 선수들은 버틀러를 더욱 작아지게 만들었죠. 드래프트에 뽑히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 듯 그는 현장에 가지 않고 집에 있었죠. 미지명에 대한 불안감이 그를 짓누를 즈음, TV에서 흘러나오는 데이비드 스턴 NBA 커미셔너의 멘트가 버틀러의 귓전을 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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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는 2011년 NBA 드래프트 30번째로 시카고 불스에 지명을 받아 프로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불스는 버틀러의 수비가 팀에 빠르게 기여할 수 있는 높은 에너지를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불스의 예상대로 버틀러의 초기 플레이 스타일은 강력한 수비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윙스팬이 202cm로 198cm의 신장에 비해 길지는 않았지만, 낮은 무게중심과 뛰어난 신체 밸런스, 민첩한 가로채기 능력과 함께 뛰어난 수비 이해도와 상대의 패스를 읽는 능력을 통해 자신의 수비 능력이 NBA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2014년 본격적으로 '슛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키우게 되면서 기존에 활용하던 드라이브 인을 통한 골 밑 플레이를 즐김과 동시에 특유의 수비력을 이용한 가로채기에 이은 속공과 함께 미드 레인지 점퍼를 활용해 득점의 비중을 높였죠. 그렇게 버틀러는 점점 자신의 존재감을 끌어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불스와 미네소타, 필라델피아를 거치면서 그의 기량은 원숙해졌고, 마이애미에서 버틀러의 공격력은 제대로 폭발했죠. 수비 전문 선수로 뽑은 30번째 드래프티의 놀라운 반전, 과연 버틀러를 최고의 선수로 만든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비결은 2013년 가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유망주였지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던 그는 트랜스포머에도 출연한 유명 영화배우 마크 윌버그와의 만남을 갖게 됩니다. 윌버그와 친분을 쌓게 된 버틀러는 새벽부터 자신을 가꾸기 위해 운동하는 윌버그의 모습을 보며 자극을 받게 됩니다. 이후 버틀러 역시 윌버그와 함께 새벽에 일어나 훈련을 하고 늦은 시간 집에 들어가는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2014-15 시즌을 앞두고 트레이닝을 하기 위해 마련한 그의 집에 TV와 인터넷은 없었습니다. 오직 농구공과 골대만 있었을 뿐이었죠. 그는 계속해서 슛을 던졌습니다.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훈련장이 그의 집이었고 쉼터였죠. 그렇게 버틀러는 수천 수만 번의 슛과 스킬 트레이닝,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자신의 기량을 키워나갔습니다. 스킬 트레이닝과 더불어 웨이트 트레이닝도 빼놓지 않았죠.

버틀러는 운동 만큼이나 식단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깨끗한 음식과 절제된 식단, 바로 깨끗하고 강한 근육을 만들 수 있는 첫 걸음이라는 것을 버틀러는 알고 있었습니다. 버틀러는 프로에 들어온 이후 10년 가까이 단백질과 탄수화물, 지방이 조화를 이룬 식단을 지키고 있습니다. 온갖 유혹을 이겨내고 자신의 식단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죠.

스타가 된 지금도 그는 여전히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납니다. 어떤 이에겐 지루하고 따분할 수도 있는 생활이지만 버틀러는 농구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이 지루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워크에씩은 마이애미 선수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논드래프티 선수들이 위주인 마이애미에서 버틀러는 구심점이 되어 선수들을 이끌어가는 정신적인 지주의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버틀러와 마이애미는 2022-23 NBA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거함 보스턴을 무너뜨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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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니콜라 요키치의 덴버 너기츠와 펼치는 NBA 파이널, 모두 덴버의 쉬운 우승을 예측했지만, 마이애미 선수들은 그들의 편견에 당당히 맞서고 있습니다. 버틀러가 알려주는 긍정의 정신으로 말이죠. 물론 어렵고 힘든 상황이 버틀러와 마이애미를 시험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겪은 큰 시련 그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의지와 농구에 대한 진심과 열정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버틀러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버틀러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선수, 스타가 되기엔 약간 부족한 선수라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우했던 과거를 딛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패배자였던 동료들과 함께 저 높은 곳, NBA 트로피를 향해 전진하는 모습은 그저 농구를 숫자로, 그림으로 바라본 사람들에게 많은 울림을 줄 것입니다. 
저의 인생에서 모두가 저를 의심했었죠. 제가 고등학생이었던 시절 사람들은 제가 농구를 하기에 작고 빠르지 않다고 했었어요. 만약 그들이 제 이야기를 알았다면 그들도 무엇이든지 가능한 것을 알았을 겁니다.” - 지미 버틀러 


NBA, 미국 고등학교 농구 선수 55만 명 중에 단 60명 만이 들어갈 수 있는 꿈의 무대, 0.0109%의 확률을 뚫은 선수들은 부와 명예를 얻게 됩니다. 현재 NBA에는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리그를 이끌고 있습니다. 스테판 커리도 있고 르브론 제임스도 있죠. 그리고 괴물 니콜라 요키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이애미 히트의 지미 버틀러를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주류에 불과했던 지미 버틀러를 왜 주목해야 하냐구요? 지금부터 파란만장한 그의 스토리를 들려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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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파이널로 올라가기엔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내년에 같은 상황으로 돌아갔을 때 우리는 해낼 것입니다."

지난 2022년, NBA 컨퍼런스 파이널 7차전 끝에 탈락의 고배를 마신 마이애미 히트의 에이스 지미 버틀러는 경기 후 이 말을 남기고 다음 시즌을 기약해야 했죠. 그리고 1년 후 버틀러는 자신의 말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ESPN이 예측한 파이널 진출 가능성은 단 3%, 케일럽 마틴, 맥스 스트러스, 게이브 빈센트, 던컨 로빈슨... NBA에서 외면을 받은 Undrafted (드래프트 미지명 선수)들과 NBA 올스타는 커녕 가장 작은 선수들로 만들어낸 반란, 난공불락 보스턴의 TD가든을 침묵에 빠뜨린 마이애미 히트, 그 마이애미를 이끄는 지미 버틀러의 인생은 출생부터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떠났고, 그는 어머니의 품에서 자랐습니다. 하지만 버틀러가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그를 버렸죠. "난 너를 좋아하지 않아." 지미 버틀러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히는 어머니의 말이 그를 더욱 슬프게 했습니다. 그렇게 버틀러는 혼자가 되었고, 친구의 집을 전전하는 떠돌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 시절까지 떠돌이 생활을 이어갔지만, 미래에 대한 생각도 갖고 있었습니다. 풋볼 선수를 꿈꿨지만 더운 여름날, 보호 장구를 끼고 축구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에어컨이 있는 실내 스포츠인 농구로 자신의 진로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농구 선수로서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던 그의 인생에 귀인이 찾아오게 됩니다. 바로 친구 조던 레슬리를 만나게 되면서 부터입니다.

당시 같은 학교의 풋볼 선수였던 레슬리는 버틀러와 농구 대결을 하며 친해졌고, 버틀러를 그의 집에 머물게 했습니다. 레슬리의 부모는 그를 완전히 믿지는 못했지만, 레슬리와 그의 동생들이 버틀러를 아끼는 것을 본 후 버틀러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톰볼 고등학교 졸업 이후 버틀러는 대학교의 오퍼가 없었기 때문에 타일러 주니어 칼리지에서 1년을 보내게 됩니다. 타일러 주니어 칼리지까지의 삶에 대해 버틀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 지 묻는다면 제 대답은 이겁니다. 저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기 싫어요. 그건 저에게 끝장이라는 의미에요. 예전의 저는 저는 전문대에 가야 했고, 더 이상 갈 곳이 없었습니다." - 지미 버틀러 (너클헤드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하지만, 버틀러는 낙담하지 않고 1년 동안 좋은 실력을 코트에서 보여주며 정식 대학교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선수생활 이후의 삶도 생각하는 것이 중요했던 양어머니는 드웨인 웨이드가 나온 마켓 대학교를 추천했고, 버틀러는 그 대학교로 진로를 정하게 됩니다. 그 진로가 버틀러의 인생을 또 한번 바꾸는 전환점이 됩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버틀러를 견뎌낸 것은 긍정의 힘이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버틀러가 고난을 극복해낸 나름의 방식이었습니다. 긍정적인 자세와 함께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는 버틀러를 더욱 강하게 했고,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의 의지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 신이 내린 천재가 아닙니다. 최고의 슈터도 아니고 최고의 핸들러도 아니죠. 가장 운동신경이 강한 것도 아닙니다. 가장 빠르지도 않지만, 전 항상 싸웁니다. 전 아무도 두렵지 않아요. 누구도 저에게 겁을 줄 수 없습니다." - 지미 버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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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켓 대학교에서도 버틀러가 주목을 받는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대학 선수들이 으레 그렇듯 첫 시즌은 벤치를 지키는 날이 많았고, 적응을 하지 못해 훈련장을 뛰쳐나가기도 했지만, 연습장에 가장 먼저 나와 가장 늦게 나오는 성실성을 본 버즈 윌리엄스 감독의 두터운 신뢰 속에 점점 출전 시간을 끌어올리게 됩니다.

다만, 그의 실력이 대학 무대를 주름잡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3년 동안 그의 대학교 성적은 평균 12득점, 5.5 리바운드, 1.1 스틸, 하지만 졸업 시즌 평균 15.7득점 6.1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마켓 대학교의 에이스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 뿐만이 아닌 동료를 생각하고 동료들과 함께 이끄는 팀이라는 의미를 깨우치게 되었고, 버틀러는 대학교에서 여러 교훈들을 얻으며 약육강식의 NBA 사회로 나오게 됩니다.

2011년 열린 NBA 드래프트, 버틀러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죠, 카이리 어빙, 카와이 레너드, 클레이 탐슨, 켐바 워커, 니콜라 부체비치... 기라성 같은 선수들은 버틀러를 더욱 작아지게 만들었죠. 드래프트에 뽑히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 듯 그는 현장에 가지 않고 집에 있었죠. 미지명에 대한 불안감이 그를 짓누를 즈음, TV에서 흘러나오는 데이비드 스턴 NBA 커미셔너의 멘트가 버틀러의 귓전을 때렸습니다.

"The Chicago Bulls Select Jimmy Butler from Marquette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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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는 2011년 NBA 드래프트 30번째로 시카고 불스에 지명을 받아 프로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불스는 버틀러의 수비가 팀에 빠르게 기여할 수 있는 높은 에너지를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불스의 예상대로 버틀러의 초기 플레이 스타일은 강력한 수비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윙스팬이 202cm로 198cm의 신장에 비해 길지는 않았지만, 낮은 무게중심과 뛰어난 신체 밸런스, 민첩한 가로채기 능력과 함께 뛰어난 수비 이해도와 상대의 패스를 읽는 능력을 통해 자신의 수비 능력이 NBA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2014년 본격적으로 '슛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키우게 되면서 기존에 활용하던 드라이브 인을 통한 골 밑 플레이를 즐김과 동시에 특유의 수비력을 이용한 가로채기에 이은 속공과 함께 미드 레인지 점퍼를 활용해 득점의 비중을 높였죠. 그렇게 버틀러는 점점 자신의 존재감을 끌어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불스와 미네소타, 필라델피아를 거치면서 그의 기량은 원숙해졌고, 마이애미에서 버틀러의 공격력은 제대로 폭발했죠. 수비 전문 선수로 뽑은 30번째 드래프티의 놀라운 반전, 과연 버틀러를 최고의 선수로 만든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비결은 2013년 가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유망주였지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던 그는 트랜스포머에도 출연한 유명 영화배우 마크 윌버그와의 만남을 갖게 됩니다. 윌버그와 친분을 쌓게 된 버틀러는 새벽부터 자신을 가꾸기 위해 운동하는 윌버그의 모습을 보며 자극을 받게 됩니다. 이후 버틀러 역시 윌버그와 함께 새벽에 일어나 훈련을 하고 늦은 시간 집에 들어가는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2014-15 시즌을 앞두고 트레이닝을 하기 위해 마련한 그의 집에 TV와 인터넷은 없었습니다. 오직 농구공과 골대만 있었을 뿐이었죠. 그는 계속해서 슛을 던졌습니다.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훈련장이 그의 집이었고 쉼터였죠. 그렇게 버틀러는 수천 수만 번의 슛과 스킬 트레이닝,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자신의 기량을 키워나갔습니다. 스킬 트레이닝과 더불어 웨이트 트레이닝도 빼놓지 않았죠.

버틀러는 운동 만큼이나 식단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깨끗한 음식과 절제된 식단, 바로 깨끗하고 강한 근육을 만들 수 있는 첫 걸음이라는 것을 버틀러는 알고 있었습니다. 버틀러는 프로에 들어온 이후 10년 가까이 단백질과 탄수화물, 지방이 조화를 이룬 식단을 지키고 있습니다. 온갖 유혹을 이겨내고 자신의 식단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죠.

스타가 된 지금도 그는 여전히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납니다. 어떤 이에겐 지루하고 따분할 수도 있는 생활이지만 버틀러는 농구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이 지루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워크에씩은 마이애미 선수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논드래프티 선수들이 위주인 마이애미에서 버틀러는 구심점이 되어 선수들을 이끌어가는 정신적인 지주의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버틀러와 마이애미는 2022-23 NBA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거함 보스턴을 무너뜨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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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니콜라 요키치의 덴버 너기츠와 펼치는 NBA 파이널, 모두 덴버의 쉬운 우승을 예측했지만, 마이애미 선수들은 그들의 편견에 당당히 맞서고 있습니다. 버틀러가 알려주는 긍정의 정신으로 말이죠. 물론 어렵고 힘든 상황이 버틀러와 마이애미를 시험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겪은 큰 시련 그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의지와 농구에 대한 진심과 열정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버틀러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버틀러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선수, 스타가 되기엔 약간 부족한 선수라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우했던 과거를 딛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패배자였던 동료들과 함께 저 높은 곳, NBA 트로피를 향해 전진하는 모습은 그저 농구를 숫자로, 그림으로 바라본 사람들에게 많은 울림을 줄 것입니다. 

“저의 인생에서 모두가 저를 의심했었죠. 제가 고등학생이었던 시절 사람들은 제가 농구를 하기에 작고 빠르지 않다고 했었어요. 만약 그들이 제 이야기를 알았다면 그들도 무엇이든지 가능한 것을 알았을 겁니다.” - 지미 버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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