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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짐=조형규 기자] "저 새파랗게 어린 슬로베니아 친구는 누구지? 엄청난 재능인데."

사이클의 황제(였던) 랜스 암스트롱이 지난 2010년 열린 '투어다운언더(Tour Down Under)'에 출전했을 당시의 이야기다. 현재는 약물복용 전과가 드러나 과거의 모든 기록을 박탈당하며 영광을 잃어버린 몰락한 영웅이지만, 암스트롱은 당시만 해도 세계 최강의 라이더로 평가받던 챔피언이었다.

그런데 그런 챔피언에게 프로투어 무대 첫 출전한 어린 라이더가 겁도 없이 자신을 쫓아오고 있었다. 암스트롱은 당시 무턱대고 자신의 뒤에서 페달을 밟던 어린 초보 라이더에게 위와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그 어린 라이더의 정체는 바로 19세의 피터 사간(27, 보라-한스그로헤)이었다.

지난 9월 24일(한국 시간) UCI 월드로드레이스챔피언십 남자 엘리트 도로경기 부문에서 피터 사간이 자신의 세 번째 월드 타이틀을 획득했다. 사간의 이번 우승은 UCI 월드로드레이스챔피언십 사상 첫 3연패 기록이며, 동시에 최연소 3회 우승자라는 타이틀까지 갱신하게 됐다.

이 역사적인 기록에 슬로바키아 대통령은 축전까지 보내며 그를 국민적인 영웅으로 받들었다. 축구와 아이스하키는 슬로바키아 최고의 인기스포츠지만, 국민 스포츠 영웅 타이틀은 사이클 선수인 사간에게 주어졌다. 마치 우리나라의 김연아가 그랬던 것처럼.

전설의 탄생과 그 과정을 동시대에 살며 지켜본다는 것은 팬으로서도 굉장히 즐거운 일이다. 게다가 그가 이제 고작 27세의 젊은 라이더라는 사실은 그 전설이 여전히 무한한 확장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주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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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를 따라 밟기 시작한 자전거 페달

19세 당시의 사간을 처음 본 암스트롱은 그를 '슬로베니아 꼬마'라고 불렀는데 사실 사간의 국적은 슬로바키아다.(물론 암스트롱의 이 말은 당시 국적도 모를 정도로 소위 '갑툭튀'한 신인의 임팩트가 얼마나 컸는지를 역설하는 대목이다.)

슬로바키아는 동유럽에 위치한 작은 나라로 제조업이 산업기반이지만 경제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국민소득 또한 다른 유럽 국가들의 평균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로 면적은 남한의 절반가량에 불과하고, 국토 면적 대부분은 산악 지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흔히 유럽 하면 떠올리는 부유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고, 국민들의 기질은 굉장히 거친 편에 속한다.

이처럼 사간은 슬로바키아라는 국가적 특성과 작은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집안의 삼남매 중 막내라는 환경 속에서 태어났다. 분명 풍족한 삶은 아니었을 터. 하지만 특유의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 덕분에 사간은 큰 구김 없이 자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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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간이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한 것은 형인 유라이 사간의 영향이 컸다. 사이클 선수로 활동하던 형을 따라 9세 때 동네 클럽에서 페달을 밟기 시작한 것이 계기였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형을 보며 자라온 사간은 형제간의 정신적 교감이 굉장히 큰 편이다. 과거 소속팀이었던 리퀴가스-캐논데일 시절 재계약 조건으로 금액 인상이 아닌 형과 함께 리퀴가스 계약 연장을 제시한 것은 유명한 일화. 지난 7월 열린 투르 드 프랑스 스테이지 3에서도 우승 당시 사간은 “형이 투르 드 프랑스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줬죠. 자전거를 시작한 것도 형 때문이었어요. 저는 그저 형을 따라 타기 시작한 것에 불과합니다”고 말할 정도로 형제간의 우애가 좋다.

하지만 사간이 처음부터 전문적인 자전거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로드사이클도 탔지만 주로 산악자전거(MTB)를 더 많이 탔고, 장비 없이 그저 평범한 티셔츠에 테니스화만 걸친 채 굉장히 자유분방한 스타일로 자전거를 탔다. 주니어 시절에도 사간은 로드사이클이 아닌 MTB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뒤에 기술하겠지만 이 경험은 훗날 프로사이클 무대에서 사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준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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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자전거로 대회를 제패한 ‘터미네이터’

그런 그가 일약 전국구 스타로 떠오르게 된 사건이 하나 있었다. 바로 2007년 열린 슬로바키안 컵 대회다. 자국 대회에 참가한 사간은 당시 '벨로스프린트(Velosprint)'사로부터 자전거 스폰서십 계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한껏 들뜬 사간은 자신이 기존에 타고 있던 자전거를 팔았고, 그렇게 사간은 대회 당일까지 후원사의 자전거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황당하게도 벨로스프린트는 사간의 대회 일정에 맞춰 자전거를 후원하지 못했다. 그렇게 자전거 없이 대회 당일이 됐고, 사간은 누나가 타던 -무려 바구니가 달린- 생활자전거를 타고 경기장에 나타났다. 많은 이들이 손가락질 했지만 사간은 이 대회에서 열악한 기어비와 브레이크로 보란 듯이 우승을 차지한다. 이 사건은 많은 프로 사이클 팀들이 피터 사간이라는 유망주를 주목하게 된 시발점이 됐다.

이 시기의 사간은 로드사이클보다 험지를 달리는 종목에서 더욱 빛났다. 2008년 발 디솔에서 개최된 MTB 주니어 월드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같은 해 주니어 파리-루베에서는 사이클로크로스 주니어 종목에 출전해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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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사이클과 MTB, 사이클로크로스까지 자전거를 가리지 않는 다재다능한 기량의 유망주라는 소식이 점차 사이클 업계에 퍼지기 시작했다. 사간도 월드투어 프로팀 입단에 욕심이 났다. 당시 컨티넨탈 등급 팀 듀클라트레신-메리다 소속이었던 사간은 이듬해 명문 프로팀인 퀵스텝플로어스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어린 나이와 계약조건 불일치 등으로 사간은 테스트에서 탈락했다.

긍정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사간이지만 월드투어 프로팀 입단 좌절은 그에게 방황을 선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족의 응원으로 좌절감을 극복할 수 있었고, 이후 사간의 재능을 눈여겨 본 리퀴가스-도이모(2011년부터 리퀴가스-캐논데일)가 일찌감치 사간을 가로채갔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당시 사간을 영입한 리퀴가스의 계약 조건이다. 당시 사간의 계약에는 독특한 옵션이 붙었는데, ‘2년 간 MTB 선수 활동도 겸하며 크로스컨트리 대회에 출전하는 것’이었다. 리퀴가스의 스폰서인 캐논데일사의 자전거를 홍보하기 위한 일환이었는데, 이때 사간은 로드사이클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MTB 또한 굉장히 터프하고 공격적인 스타일로 타곤 했다. 그가 훈련을 하는 날이면 항상 타이어가 터지고 프레임이 파손되는 등 자전거가 성할 날이 없었고, 그런 그에게 팀은 ‘터미네이터’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 별명은 훗날 괴물 같은 모습으로 투어를 돌며 타이틀을 휩쓰는 그의 모습에 ‘투어미네이터’라는 이름으로까지 진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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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대 최강의 스프린터 전설을 쓰다

 리퀴가스 팀은 사간이 19세가 되던 해인 2010년, 투어다운언더를 통해 그를 첫 프로투어 무대에 출전시켰다. 여기서 사간은 암스트롱에게 눈도장을 찍었고, 이후 2010 파리-니스에서는 자신의 생애 첫 프로투어 스테이지 우승을 낚았다. 뒤이어 투어 오브 캘리포니아에서는 영 라이더 저지와 함께 최고의 스프린터에게 주어지는 포인트 저지까지 동시에 획득하면서 자신의 화려한 데뷔를 알렸다.

프로 데뷔시즌을 성대하게 마친 사간은 이듬해 부엘타 아 에스파냐로 그랜드투어 무대에도 데뷔한다. 부엘타 아 에스파냐는 투르 드 프랑스, 지로 디탈리아와 함께 세계 3대 그랜드투어로 꼽히는 가장 권위 있는 대회다. 처녀출전임에도 불구하고 사간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고, 압도적인 스프린트로 무려 3개의 스테이지 우승을 따내며 수퍼루키의 출연을 알렸다.

수퍼루키에서 최강의 스프린터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건 2012년부터였다. 부엘타 아 에스파냐에 이어 투르 드 프랑스에 데뷔한 사간은 첫 출전에 3개의 스테이지 우승을 휩쓸었다. 22세의 신인이었던 사간은 스테이지 1 우승을 시작으로 그린저지를 입수했고, 그후 마지막 스테이지 21이 끝날 때까지 단 한 차례도 포인트 선두를 내주지 않았다. 포인트 순위 2위였던 안드레 그라이펠과의 최종 스코어는 141점 차이. 당대 최강의 스프린터라는 타이틀이 그라이펠과 마크 캐번디시에서 사간으로 교체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젊은 스타 스프린터의 탄생에 세계가 열광했다. 화려한 투르 드 프랑스 데뷔를 알린 2012년의 활약에 힘입어 사간은 리퀴가스-캐논데일과 2년 계약 연장에 서명했는데, 이때의 계약 조건이 바로 ‘형과 함께 팀에 남는 것’이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사간은 과거 퀵스텝 입단이 좌절돼 방황하던 시절, 자신을 믿고 따라준 리퀴가스에 감사의 뜻을 전하며 “팀이 베푼 은혜에 꼭 보답하고 싶다”고 말해 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이후 사간은 불의의 사고로 실격처리를 당한 올해 대회를 제외하면 지난 2016년까지 투르 드 프랑스 5년 연속 그린저지를 획득했다. 이는 독일이 낳은 위대한 스프린터 에릭 자벨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많은 투르 드 프랑스 그린저지 획득 기록이다. 아쉽게도 자벨의 포인트 기록이 6연승이었던지라 연승기록 갱신은 무산됐지만, 최다승 기록의 전망은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2015년부터 사간은 자신의 커리어에 의미 있는 기록을 추가하기 시작했다. UCI 월드로드레이스챔피언십 개인 도로경기 우승으로 레인보우 저지를 수집하기 시작한 것. 사간은 지난 9월 24일 종료된 레이스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며 올해까지 3연승을 달성해 월드로드레이스챔피언십 역사상 최초로 3연패를 달성한 챔피언이 됐다. 이는 역대 3회 우승자 중 최연소 선수에 해당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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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복받은 재능의 슬로바키안 펀처

 스프린터답게 사간은 1일 경기인 원데이 레이스에 굉장히 강하다. 그랜드 투어를 비롯한 스테이지 경기에서는 개인 구간우승과 함께 포인트 저지 획득에 집중하지만, 월드로드레이스챔피언십을 비롯한 각종 내셔널 대회 같은 원데이 레이스에서는 우승을 쓸어 담으며 저력을 발휘한다. 

앞서 스프린터라고 설명했지만 조금 더 세세한 분류로 들어가면 사간은 ‘펀처’라고 불리는 스타일의 선수다. 뛰어난 스프린트 능력과 함께 일명 ‘낙타등’으로 표현되는 짧고 강한 오르막-내리막 반복 코스에 강점을 드러내는 유형이다. 특히 사간은 짧은 업힐 피니시 구간과 급격한 코너를 과감하게 빠져나가는 다운힐 능력에서 발군의 기량을 발휘한다.
 (물론 지속적인 업힐 등판능력을 전문 클라이머들과 비교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같은 스프린터 유형의 선수군에서는 수준급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사간의 이러한 파워는 어느 정도 타고난 영향이 크다. 사간의 리퀴가스 입단 초기, 코치였던 파울로 슬롱고가 받아든 신체 테스트 결과가 이를 잘 설명해준다. 다른 선수들보다 젖산분해가 빠른 것도 놀라웠지만, 젖산의 한계치를 유지하는 신체 능력이 압도적으로 우월하기 때문. 슬롱고는 사간의 테스트 결과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보통 프로 라이더들은 45초에서 1분 정도가 한계치입니다. 하지만 사간은 이를 1분 30초까지 유지할 수 있어요. 마지막 구간에서 피니시를 위한 더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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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젖산 분해능력은 통증을 느끼기 시작하는 지점을 현저히 늦춰주며 피로를 빠르게 회복시킨다. 또한 다른 선수에 비해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젖산 한계치는 더 많은 파워를 에너지로 전환시킬 수 있다. 극대화된 파워를 보다 더 꾸준히 지속하게 만드는 것에도 도움을 준다. 폭발적인 순간 스프린트 파워로 따지면 그라이펠이나 캐번디시가 더 뛰어나다는 평이 있지만, 사간에게는 이 힘을 훨씬 오래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셈. 뛰어난 내구력과 인내심을 바탕으로 어떻게 해서든 펠로톤에 따라붙는 모습을 보면 ‘재능과 노력의 결합’이 이토록 무섭다는 것을 느끼게 만든다.

지난 24일 월드로드레이스챔피언십의 마지막 다운힐 피니시 장면은 사간의 이러한 재능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사간은 5km 구간까지만 하더라도 순위 경쟁을 포기했던 상황이었지만 결국 마지막 1km 지점에서 펠로톤에 합류했다. 그 직후 알렉산더 크리스토프가 다소 빠른 시점에서 스프린트를 시도했는데, 긴 스프린트에 강하고 내리막 피니시였기 때문에 조금 더 일찍 승부수를 띄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간은 크리스토프 뒤에 바짝 붙은 채 인내심을 발휘하며 페이스를 놓치지 않았고, 마지막 50m를 남겨둔 상황에서 폭발적인 파워로 치고 나가며 결승선을 통과했다. 크리스토프의 고국에서 열린 노르웨이 홈팬들의 분위기에 찬물을 제대로 끼얹는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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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간의 퍼즐을 완성시킨 MTB 주니어 커리어

 앞서 사간이 꽤나 축복받은 신체를 타고 났다고 설명했지만 분명 알아둬야 할 점은 그가 오로지 타고난 재능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간은 선천적 자전거 마니아다. 그 누구보다도 안장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특히 휴식기에는 평소에 자주 타지 못한 MTB와 다운힐을 즐겨 타며 스릴을 만끽한다고 한다.

“제 꿈은 항상 산악자전거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로드바이크를 타고 있지만 제 시작은 산악자전거였죠. 다운힐도 굉장히 좋아하고, 그 순간 자유가 되는 느낌이 좋아요. 숲속을 달리는 것도 그렇고 테크닉적인 측면, 괜찮은 점프를 성공시켰을 때, 모든 부분이 좋습니다.”

주니어 시절 MTB 선수로 활동하며 체득한 테크닉은 프로 로드레이스 무대에서 사간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선사하기도 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바로 지난 2014년 열린 투어 오브 오만의 네 번째 스테이지에서 나왔다.

당시 3명으로 구성된 선두그룹에서 달리고 있던 사간은 코너구간 진입 직전 순간적인 재치를 발휘해 도로 사이의 연석을 바니홉(자전거를 들어 올려 토끼처럼 기물을 뛰어넘는 점프 테크닉)으로 뛰어넘었다. 반대편 도로로 건너가면서 인코스를 제대로 파고든 셈이 된 것. 비록 마지막에 따라잡히긴 했지만 이 장면에서 격차를 크게 벌리며 힘을 비축한 사간은 결국 스테이지 4의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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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적인 다운힐 또한 MTB 선수로 활동하던 경험의 산물이다. 지난 2015년 열린 투르 드 프랑스의 스테이지 16에서 보여준 사간의 과감한 다운힐 공략 테크닉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장면. 콜 드 망스의 악명 높은 내리막 코스는 지난 2003년 대회에서 요세바 벨로키가 크게 낙차하며 실려나간 구간이지만, 사간은 코너링에서도 브레이크를 거의 잡지 않고 다운힐 포지션을 유지한 채 유유히 구간을 빠져나갔다.

그 외에도 사간의 MTB 커리어 시절 본능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2016년 파리-루베 당시 코앞에서 벌어진 대형 집단 충돌사고를 바니홉으로 뛰어넘는다던가, 결승구간을 통과하며 윌리(무게중심을 자전거의 후방에 두어 앞바퀴를 공중으로 띄우고 뒷바퀴로만 주행하는 테크닉)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장면은 사간의 과감함과 파격적인 모습을 상징한다. 동시에 사간만의 유쾌하며 독창적인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에도 크게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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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 집필자 사간의 현재진행형 이야기

 아쉽게도 사간의 오는 2018 시즌 계획은 다소 불투명하다. 현재 임신 8개월 중인 아내 카타리나를 위해 당분간 아빠의 역할에 충실할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 

하지만 천성이 낙천적이고 계획도 즉흥적으로 바뀌는 사간의 성격 탓에 아직 어디로 튈지(?) 섣불리 예상하는 건 금물이다. 올해 투르 드 프랑스 스테이지 4에서 실격을 당한 직후에도 사간은 되레 “실격을 당한 건 아쉽지만 지금은 당장 모나코에 있는 아내를 만나러 갈 생각에 너무 기쁩니다. 이미 투르 일은 잊었으니, 다음 단계는 차근차근 생각해보죠”고 할 정도로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쉽게 순응하는 타입이다. 잘 크는 아이를 보며 갑자기 내년 시즌을 다시 의욕적으로 불태울 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장 무서운 점은 사간의 나이다. 이제 고작 27세에 불과한 1990년생의 이 젊은 라이더는 지난 9월 12일 캐나다의 그랑프리 드 퀘벡 우승을 차지하며 벌써 프로레이스 통산 100승을 돌파했다. 1980년생인 알레한드로 발베르데가 지난해 가까스로 100승을 달성한 것을 상기할 때 사간의 페이스는 실로 무서울 정도다. 현재 육체적 전성기가 한창 더 남은 20대라는 점은 사간의 전설이 아직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훗날 틴코프 삭소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스페인의 사이클 영웅 알베르토 콘타도르는 데뷔 시즌의 신인 사간을 보며 “엄청난 기량을 가진 신인이다. 훗날 나를 위협할 강력한 라이벌이 될 것”이라며 일찌감치 그의 가능성을 예견했다. 암스트롱은 “엄청난 재능”이라며 사간을 마음에 들어 했고, 캐번디시는 “한 세대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엄청난 라이더”라며 차세대 제왕의 탄생에 찬사를 보낸 바 있다.

분야를 막론하고 동시대를 살며 전설의 탄생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팬으로서 굉장히 즐거운 일이다. 이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선수들에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탄생을 지나 이제 후대에 전해질 이야기를 하나씩 집필해가고 있는 사간의 종착지는 과연 어디가 될까.

아마 우리는 이시대 최고의 사이클 레전드 탄생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중일지도 모른다.

[사진] ⓒUCI/ 피터 사간 인스타그램
조형규 기자(press@monstergroup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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