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아시아=조형규 기자] 평범했던 프로레슬러 김주용이 오늘날 대중에게 사랑받는 노지심으로 탈바꿈하게 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김주용은 지난 1995년 선배들의 권유로 긴 머리를 모두 자르고 대머리가 됐다. 멋스럽게 콧수염을 길렀고, 이름도 노지심으로 바꿨다. 처음에는 속상한 마음에 눈물도 많이 흘렸다고. 하지만 그는 이내 노지심이라는 인물에 빠져들었다.


중국 고전 수호전의 등장인물인 노지심은 가공할 힘과 완력을 가진 승려다. 불같은 성격 때문에 사고를 치기도 하지만 의리가 강하고 인간미가 넘쳐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는 이런 노지심의 속성을 자신의 캐릭터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수호전을 다시 독파했고, 미디어를 통해 재해석된 노지심의 특징들을 낱낱이 파헤쳤다.


노지심의 노력은 경기에도 그대로 투영됐다. 그는 경기에서 무조건적인 강함을 어필하는 것에 얽매이지 않았다. 관객과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시대의 조류를 받아들인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관객들을 웃기고, 때로는 울리기도 하면서 함께 호흡하고 만족감을 선사하는 것에 중요한 가치를 부여했다. 아마 한국 프로레슬링 역사상 최초로 프로레슬러에 캐릭터와 개성을 창조한 선수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터뷰를 갈무리하면서 노지심에게 프로레슬링이란 어떤 의미인지, 또 프로레슬러의 역할과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해 물었다. 조금은 웃음기를 뺀 채로. 다음은 노지심과의 일문일답.



Q. 지금까지 인터뷰하면서 본명도 나왔지만, 현재 대중이 인지하는 '노지심'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링에 오른 게 정확히 언제인가.


ㅡ90년대 중반으로 기억한다. 아마 1995년도였을 거다.


Q. 이름을 바꾸고 링에 오른 특별한 계기가 있나?


ㅡ개인사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김주용이라는 이름이 너무 밋밋하지 않나. 또 흡사 들으면 여자 이름 같고. 그런데 당시 선배 중에 이왕표 회장님처럼 짓궂은 선배들이 '머리를 밀고 콧수염을 기르라'는 거다. 그때 이왕표 회장님 친구분까지 가세해서 엄청나게 바람을 넣었다. 거의 보름 넘게 날 꼬셨다.


Q. 결국 그렇게 해서 삭발을?


ㅡ그렇다. 잘리는 내 머리를 보고 있자니 정말 눈물 나더라. 펑펑 울면서 머리를 깎았다. 심지어 그렇게 울면서 삭발을 하는데 선배들은 옆에서 '이제 스님 다 됐다'며 무지하게 놀리고(웃음).


Q. 눈물의 속뜻은 무엇이었나.


ㅡ그냥 깎아도 슬픈데 멀쩡한 머리를 갑자기 밀면서 옆에서는 계속 놀리니 눈물이 안 나겠나. 게다가 그때는 아직도 철이 들지 않았을 때다. 내가 철이 조금 늦게 들어서(웃음).


Q. 혹시 종교도 불교인가(웃음).


ㅡ맞다. 과거에 불교 관련 회사도 다닌 적도 있다. 근데 이 '노지심'이라는 이름이 수호지에 나오는 스님이고 또 불교 이름이다. 원래 불교 이름은 함부로 쓸 수 없는데, 그때 큰스님께 내 사정을 모두 털어놓고 '제가 이렇게 해서 노지심이라는 이름을 쓰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여쭤봤다. 다행히 큰스님께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라면 괜찮다'고 해 주셔서 그렇게 노지심이라는 이름을 인정받았다.


Q. 어떻게 보면 프로레슬러 노지심의 인생을 바꾼 터닝포인트다.


ㅡ원래는 구레나룻과 턱수염까지 싹 다 기르려고 했다. 그런데 길러보니 이건 무슨 산적 같더라(웃음). 이러면 안 되겠다 싶었지.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노지심이라는 인물로 확고하게 캐릭터를 잡은 뒤 그에 대한 연구를 정말 많이 했다. 수호지도 계속해서 다시 읽었고, 드라마나 영화 같은 미디어로 재창조된 수호지를 통해 대중에게 노지심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보여지는가를 계속 파악했다.



Q. 이 정도로 치열한 고민이 담겨있는 줄은 몰랐다. 어떻게 보면 한국 프로레슬링에서 프로레슬러에게 캐릭터라는 생명력을 부여한 최초의 선수라고 평하고 싶다.


ㅡ계속 고민하고 연구하다 보니 노지심이라는 캐릭터가 딱 나오더라. 힘 좋고, 또 의리 있고. 게다가 외양적인 이미지까지 캐릭터가 나랑 딱 맞았다. 대신 구레나룻까지 기르면 흡사 산적 같아서 여자들이 모두 도망갈까봐 콧수염만 길렀다(웃음). 얼마나 깔끔하고 좋나. 지금은 잘 깎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노지심으로 방송을 한번 타기 시작하니깐 사람들도 단번에 날 기억하기 시작했다.


Q. 조금은 불편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사실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지만 일각에서는 프로레슬러를 희화화시킨다며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다. 노지심의 솔직한 생각이 궁금하다.


ㅡ솔직히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물론 프로레슬러로서 본업인 운동을 가장 열심히 해야겠지만 미디어를 통해 이미지를 알리는 것 또한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지금도 나는 후배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기회나 여건이 닿는 한 최대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이미지를 많이 심어주라고 추천한다. 대중에게 그렇게 자신을 어필해야 누군가 나중에 우연히 경기를 보게 되더라도 나를 떠올리고 기억하지 않겠나.


Q. 하긴, 누구보다도 노지심 본인이 가장 절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캐릭터가 바뀐 뒤로 미디어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면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엇이 있나. 


ㅡ매우 많다. 무엇보다도 품위 유지비가 많이 든다. 이 품위 유지가 단순히 금전적인 측면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과 소통하고 대중에게 각인이 되면서 모든 행동을 조심하게 되고 또 절제하게 된다. 지금도 나는 대회가 끝난 뒤 회식 자리에서도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멀쩡한 정신으로 주변 사람들을 챙겨야 하고, 또 내가 정한 선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기 때문이다. 사소한 행동 하나를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칠 지를 먼저 생각하고 행동한다.


Q. 캐릭터로서의 노지심도 그렇지만 프로레슬러 노지심으로서도 본인만의 개성이 확고하다. 무조건 강함을 어필하기보다는 대중과 친근하게 호흡할 수 있는 요소가 많기도 하고.


ㅡ정확히 봤다(웃음). 되도록 젊은 세대들도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기술들을 많이 연구했다.


Q. 과거의 것들을 답습하지만 않고 꾸준히 새로운 조류를 받아들였다. 김일의 원폭 박치기 같은 클래식한 기술부터 탄탄한 기본기와 테크닉이 필요한 저먼 수플렉스 홀드, 또 스터너처럼 현대의 흐름을 반영한 기술까지.


ㅡ맞다. 그렇게 해야 하고, 그런 기술들을 많이 받아들이면서 경기에서 보여줄 수 있어야 선수로서도 발전이 된다. 물론 올드스쿨 스타일로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경기를 펼치더라도 이 선수가 할 수 있는 자신만의 개성을 만들고, 또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좋은 프로레슬러가 아닐까.



Q. 경기부터 캐릭터까지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렇다면 프로레슬러 노지심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프로레슬링 경기의 철학은 무엇인가.


ㅡ프로레슬링은 전적으로 링에 올라가서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렸다. 아무리 레슬링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내가 어떻게 관객을 리드하고 경기를 풀어나가느냐에 따라서 관객들이 환호를 보낼 수도, 화를 낼 수도 있다. 유료 관객이건 무료 관객이건 결국 경기장에 오는 관객은 기본적으로 프로레슬링에 관심이 있고, 적어도 흥미가 생겨서 보러 오는 사람들 아닌가. 선수들은 그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 그 무언가는 화려한 기술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관객에게 어필하고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일 수도 있다.


Q. 미키 루크가 주연으로 열연한 '더 레슬러'라는 영화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프로레슬러는 관객의 환호를 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ㅡ맞다. 내 경기를 보면 웃길 때도 있고 반대로 사람들을 울리기도 하지만, 경기장에 입장할 때부터 집에 돌아갈 때까지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그런 게 없다면 사람들은 욕을 하고 돌아간다. 물론 10명의 관객이 왔는데 그들을 모두 100% 만족시킬 순 없다. 하지만 적어도 7명 정도는 흡족하게 만들어주면 한 사람의 관객이라도 그날 경기를 펼친 선수를 기억하고 또 그 캐릭터를 떠올리지 않을까? 관객과 호흡하며 그렇게 만드는 것이 바로 프로레슬러고 또 우리의 역할이다.


Q. 좋은 말 고맙다. 정말 명쾌하게 프로레슬러와 프로레슬링의 정의를 내렸다. 이제 거의 마무리다. 은퇴를 앞둔 이 시점에서 프로레슬러 노지심에게 프로레슬링이란 어떤 의미인가.


ㅡ프로레슬링은 인생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풍파를 겪었다. 그 시절 운동하는 사람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유혹 중 하나가 암흑가, 소위 말하는 조폭이었는데 사실 나도 30대 직전에는 운동에 회의를 느껴 잠시 방황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 날 선배들이 날 잡으러 다녔고, 그렇게 한 석 달 도망 다니다가 꼼짝없이 잡혀서 다시 운동했지(웃음). 그런데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말을 그때 절실히 느낀 것 같다. 또 그런 회한이 있어야 사람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프로레슬링은 이 노지심에게 있어서 인생 그 자체다.


Q. 그래도 대중은 영원히 프로레슬러 노지심을 기억할 거다. 그 누구보다도 프로레슬러를 친근하게 만들어줬고 또 사람들에게 많은 웃음과 행복을 선사했으니.


ㅡ그동안 많은 분이 프로레슬러 노지심에게 큰 사랑을 주셨다. 그렇게 노지심을 아껴준 것만큼 내가 고맙다는 이야기를 많이 전하지 못한 것 같아 후회될 정도로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정말 너무나 고맙다. 앞으로 보다 많은 후배들을 서포트 하면서 나보다 더 훌륭한 선수들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다시 보여드리고 싶다.


[사진] 장태현사진작가/김민호 선수 제공
조형규 기자(deux7d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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