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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아시아=조형규 기자] 베트남전 징집을 거부한 대가로 오랜 공백기를 가진 故 무하마드 알리. 그런 그는 1974년 킨사샤에서 언더독의 입장으로 링에 올라 챔피언 조지 포먼에게 도전했지만 상황은 쉽지 않았다. 대부분 전문가가 챔피언의 승리를 점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리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8라운드 15초를 남긴 상황에서 결국 포먼을 쓰러뜨렸다. ‘왕의 귀환’을 알리는 펀치였다.

폭력성 논란에 휩싸이며 단체의 존속이 위태롭던 시절, UFC는 TUF(디 얼티밋 파이터)라는 격투 리얼리티 쇼를 기획했다. 야심차게 기획한 이 프로그램의 초대 결승전 주인공은 포레스트 그리핀과 스테판 보너. 마지막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두 젊은 파이터는 후진 기어를 넣는 법을 잊었다.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싸운 덕분에 UFC는 극적으로 기사회생할 수 있었고, 훗날 UFC는 이들을 모두 명예의 전당에 입성시켰다.

이처럼 격투 스포츠의 역사에 아로새겨진 경기에는 저마다 사연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일련의 과정에 스토리가 부여될 때 경기는 비로소 강한 생명력을 얻는다. 물론 시합 자체로도 좋은 경기는 많지만, 스토리텔링까지 곁들여질 때 역사는 주저하지 않고 ‘명승부’라는 타이틀을 내어준다.

프로레슬링은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스포츠다. 양 선수가 링 위에서 펼치는 공방의 합과 경기의 결과가 정해져 있다. 따라서 얼핏 보기에는 프로레슬링에서의 스토리텔링이 굉장히 간편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단체의 오너, 혹은 임원 같은 사람들이 각본부터 경기의 과정과 승패의 결과까지 모두 좌지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문일까. 프로레슬링에서는 각본을 넘어 선수간의 진짜 사연이 담긴 승부가 탄생할 때 더욱 빛이 난다. 자유롭게 이야기를 창조할 수 있지만, 그만큼 팬들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진짜 스토리텔링이 만들어지기 어렵다는 것은 역설적이기까지 하다.

지난 5일 어린이날 KBS 아레나에서 개최된 ‘WWA(한국프로레슬링연맹) 뉴 제너레이션’의 극동 헤비급 챔피언십 토너먼트 결승전은 그래서 더욱 감동적인 명승부였다.


■ 한국 프로레슬링 연맹의 젊은 피, 김민호-조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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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호와 조경호는 32세의 동갑내기 친구이자 WWA 소속의 프로레슬러다. 사석에서도 굉장히 친한 사이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친구라는 관계를 벗어나 프로레슬러 대 프로레슬러로 이들을 설명하는 것은 조금 다르다. 김민호는 유일한 20대 프로레슬러로 WWA에서 10년을 버텼고, 조경호는 호주에서 미국을 거쳐 일본까지 세계 각지를 돌며 한국으로 역수입된 케이스다. 막강한 파워와 피지컬, 그리고 고도의 테크닉과 화려한 쇼맨십으로 설명되는 이들의 극명한 경기 스타일 또한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스타일이 전혀 다른 이들은 마침 동갑내기 친구이자 WWA의 가장 어린 프로레슬러였다. 이 부분은 둘을 자연스레 막내이자 동료라는 카테고리로 묶어놓았다. ‘2015 WWA 포에버 챔피언’에서는 마루후지 나오미치와 키타미야 미츠히로에 맞서는 태그팀으로 링에 올랐고, 방송을 비롯한 각종 미디어에도 줄곧 동료라는 위치로 함께 출연하곤 했다. 국내 프로레슬링 팬들은 자연스레 이들을 경쟁자가 아닌, 친구이자 동료로 인식해왔다.

카메라의 불이 꺼지고 무대 아래로 내려와도 이들의 역할은 비슷했다. WWA의 가장 젊은 프로레슬러로서 허드렛일부터 선수 섭외까지, 이들의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WA 흥행 구성에서 그동안 김민호와 조경호의 비중은 크지 않았다. 주로 의미 없는 1~2시합에 출전하거나 태그팀으로 패배하는 역할을 도맡아 했다. 이들은 가장 젊은 프로레슬러이기도 했지만, 후배이자 막내였기 때문이다.


■ 김일-이왕표-노지심을 잇는 극동 헤비급 타이틀의 네 번째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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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난 5일 열린 ‘WWA 뉴 제너레이션’은 개최 직전부터 불안감이 맴돌았다. 경기 이틀 전까지 최종 대진을 확정 짓지 못했기 때문.

특히 노지심이 반납하기로 한 WWA 극동 헤비급 타이틀이 도마 위에 올랐다. WWA 극동 헤비급 타이틀전이 단판으로 열릴지, 혹은 토너먼트가 될지조차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경기 하루 직전 뒤늦게 4강 토너먼트로 확정됐는데, 여기엔 김민호와 조경호 모두 4강 시드에 포진해있었다.

각자 1, 2시합에서 시호와 요코야마를 꺾고 결승에 오른 조경호와 김민호에겐 두 가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이날 열린 극동 헤비급 타이틀 토너먼트 결승전이 양 선수 모두 WWA에서의 첫 코메인이벤트였기 때문. 그리고 이 결승전 시합은 김민호와 조경호의 10년 커리어를 통틀어 태그팀이 아닌 난생처음 적으로 맞붙는 경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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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맞붙는 싱글 매치인 탓이었을까. 두 선수 모두 경기 분위기가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선역 파워하우스인 김민호, 그리고 최근 건방진 악역으로서의 경기운영이 물에 오른 조경호였으나 경기는 전형적인 롤 대결로 흘러가진 않았다. 조경호의 빠른 초반 공방에 김민호가 충분히 응수했고, 양측 모두 브레인버스터와 저먼수플렉스 같은 큰 기술을 모두 막아냈다. 선악의 롤보다 생애 첫 WWA 벨트를 향한 열망, 그리고 젊은 두 선수의 경쟁에 포커스가 맞춰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경기의 온도도 점차 높아만 갔다. 김민호는 기습적인 머신건 촙으로 조경호를 당혹케 했고, 조경호는 그런 김민호의 촙을 후지와리 암바로 연결하는 센스를 선보였다.

무엇보다도 이 경기에서는 WWA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경기가 과열되면서 본격적인 장외 난투와 함께 위험한 범프가 연결된 것. 처음에는 어린이날이라는 특성을 고려해 관중들의 참여를 유도하며 가볍게 시작한 장외 난투였지만, 경기의 후반부는 아찔한 스턴트로 마무리됐다. 링 밖의 김민호를 향해 조경호가 선택한 기술은 바로 링 포스트 꼭대기에서 맨바닥의 장외로 날린 스완턴밤이었다.


■ 조경호의 스턴트와 김민호의 기지가 빛난 혈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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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우리가 보는 해외의 메이저 프로레슬링 경기장에는 장외에 매트가 설치되어 있다. 따라서 선수들은 링 바깥으로 떨어지는 기술을 구사해도 매트가 충격을 흡수해준다. 그러나 WWA에서는 장외에 그 어떠한 시설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선수가 받아내던가, 아니면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는 셈이 된다.

과연 당시 상황은 어땠을까. 조경호는 스포츠아시아와의 인터뷰에서 이날 “장외 스완턴밤을 사용한 직후 바로 엄청난 통증이 왔다”고 밝혔다.

실제로도 조경호는 이 직후 선수의 실제 상태를 확인하러 온 스태프에게 ‘X사인’(프로레슬링 경기 중 실제로 부상을 입어 경기를 진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됐을 때 시합 불가 의사를 알리는 수신호)을 보냈다고 한다. 심지어 조경호는 지난 1월에 경기 중 부상을 입고 허리디스크 악화로 잠정은퇴까지 고려했던 상황. 상태가 심각 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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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두 선수의 공통된 답변이 이어졌다. “첫 싱글 매치이자 타이틀전을 이대로 허무하게 끝낼 순 없다”며 기억을 더듬은 김민호와 조경호는 극적인 기지를 발휘해 경기를 이어갔다. 김민호는 순간적인 센스로 장외 20 카운트를 초기화시키며 영리하게 조경호를 다시 링으로 올려보냈다. 그렇게 속개된 경기에서 조경호는 끝내 김민호의 핀을 킥아웃 했고, 부상 속에서도 기어코 또다시 스완턴밤을 터뜨리는 투혼을 발휘했다.

하지만 조경호는 이날 결국 승리를 가져가지 못했다. 피니시를 성공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통증으로 곧바로 핀을 이어가지 못한 것. 극심한 허리 부상으로 봉인한 스완턴밤을 두 번이나 사용한 대가는 혹독했다. 곧바로 정신을 회복한 김민호는 조경호가 특유의 사각 로프 반동 시도를 포착했고, 기습적인 레인메이커를 터뜨렸다.

깔끔한 3카운트 핀 폴 승으로 제4대 극동 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한 김민호였지만, 그 순간 그는 눈물을 먼저 흘렸다. 그러나 김민호는 그것이 생애 첫 타이틀에 대한 기쁨의 눈물은 아니었다고 했다. 10년의 세월이 오버랩 되면서 오랜 시간 친구이자 동료로, 또 막내로 단체를 지켜오면서 함께 링 위에서 모든 것을 쏟아낸 조경호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었다. 벨트를 허리에 감은 김민호가 그래서 마이크를 잡고 가장 먼저 남긴 말도 바로 이 한 마디였다. "경호야, 넌 정말 최고다."


■ 프로레슬링의 명승부는 화려함이 아닌 진심을 모두 담아낸 승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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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좋은 프로레슬링 시합을 만드는 데는 선수 간의 상성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에 앞서는 것이 바로 풍부한 경험이다. 싱글 매치로 단 한 번도 호흡을 맞춰보지 않은 프로레슬러들이 첫 시합에서, 그것도 타이틀이 걸린 경기에서 좋은 공방을 만들기란 쉽지 않다. 김민호와 조경호로서는 시작 전부터 큰 리스크를 안고 경기에 임한 셈이다.

실제로도 두 선수는 경기가 생각했던 대로 잘 풀리진 않았다고 고백했다. 김민호는 "우리가 아무리 서로 잘 안다고 하더라도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싸운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렇다 보니 서로 예상치 못한 공격도 주고받았고. 다음에 또 싸운다면 더 격렬하고 많은 기술이 터지지 않을까"라며 아쉬운 속내를 드러냈다.

조경호 또한 "사실 내용 자체가 다 좋았던 건 아니다. 오히려 내 스타일은 많이 안 나왔다. 내 사이드로 경기를 끌고 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김민호의 페이스에 말려 들어간 느낌이 컸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경기에는 두 선수의 진심이 담겨있었다. 프로레슬러라는 이름으로 10년이라는 긴 커리어를 이어가기가 쉽지 않은 국내 상황에서 김민호와 조경호는 끝까지 버티며 겨우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왔다. 타이틀 앞에서 이들은 동료, 친구라는 이름을 내려놓고 오로지 프로레슬러 대 프로레슬러로서 서로에게 몸을 던졌다.

벨트를 두고 펼쳐지는 시합에서 두 선수는 그동안 자신들이 원하고 또 보여주고 싶었던 간절함을 링 위에서 모두 쏟아냈다. 김민호와 조경호는 "서로가 오랜 시간 겪어온 다른 경험들을 일대일 시합으로 부딪힐 수 있는 게 이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만큼 서로 마음을 가득 담아 주고받는 시합이 됐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각자 다른 길을 걸어온 친구지만 이들은 같은 처지에서 함께 오랜 시간 제자리를 묵묵히 지켜왔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단체의 그 어떠한 입김이나 각본도 없었다. 링 위에서 자신을 증명하며 지금까지 이 악물고 버텨온 두 젊은 청춘의 지난 세월 그 자체가 각본이 됐고, 또 이야기가 됐다. 김민호와 조경호는 프로레슬러로서 자신이 담아낼 수 있는 모든 혼을 경기에 실었다. 

이들의 진심은 경기를 보는 사람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됐다. 실제로 현장에서는 이들의 경기 후 눈물을 흘리는 팬들도 있었다. 국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적지 않은 프로레슬링 팬들이 '국내 프로레슬링 역사상 최고의 명경기다'라며 호평을 쏟아냈다. 칭찬에 조금은 인색했던 이왕표도 "이 시합은 최고였다"며 두 선수에게 극찬을 보냈다고 한다.


■ 극동 헤비급 챔피언 김민호와 향후 벨트의 향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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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레슬링은 마술이다. '마술에는 트릭이 있다'는 명제는 모든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마술이 펼쳐지는 그 순간 만큼은 이를 믿게 되고 또 진심을 담아 탄성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프로레슬링도 마찬가지다. 선수들이 주고받는 기술에는 공방의 합이 존재한다. 모든 승패와 결과가 정해져 있고, 이를 각본으로 만들어 경기를 마치 하나의 드라마처럼 구성한다. 하지만 선수들은 링 위에서 몸을 내던지는 그 짧은 시간 만큼은 관객들이 믿고, 또 진심으로 열광하게끔 만든다. 이는 모든 프로레슬러의 숙명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5일 열린 WWA 극동 헤비급 타이틀전은 국내 프로레슬링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만한 기념비적인 경기다. 김민호와 조경호는 그들이 10년의 커리어를 통해 쌓아온 진심을 경기 안에 모두 녹여냈다. 이 진심이 고스란히 전달됐기 때문에 관객들은 환호할 수 있었고, 또 눈물도 흘릴 수 있었다.

김일-이왕표-노지심에 이어 제4대 WWA 극동 헤비급 챔피언이 된 김민호의 눈은 이제 올가을을 겨냥하고 있다. WWA가 다가오는 10월에 전국 투어 흥행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김민호의 1차 방어전 상대가 누가 될진 아직 알 수 없다. 조경호와의 2차전이 될 수도 있고, 전혀 새로운 선수를 상대로 방어전을 치를 수도 있다. 조경호 또한 과연 어떤 경기에 투입될지는 정해진 바가 없다.

하지만 이들이 지난 5일 경기에서 보여준 그 진심과 열정을 다가오는 10월 대회에서도 고스란히 녹여낼 수 있길. 그리고 이것이 한층 더 성숙한 열매로 결실을 맺길 기원할 따름이다. 

[글·사진] 조형규 기자 (press@monstergroup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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