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 빛마루 방송지원센터에서 ‘PWF 인생공격 4’가 열렸다. 국내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프로레슬링 단체인 PWF가 주최한 이번 흥행은 일본의 랜즈엔드와 힘을 합쳐 여러 가지 기록들을 남겼다. 어떤 경기에선 챔피언이 바뀌기도 했고, 누군가는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기도 했다. 새로운 챔피언도 나왔다. 이날 현장에서 펼쳐진 뜨거운 열정의 산물을 텍스트로나마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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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아시아=조형규 기자] “프로레슬링, 최고!”

약 100여 명의 관객 앞에서 링 위에 오른 PWF 대표 겸 LOTW 챔피언인 김남석이 마지막으로 외친 말은 바로 ‘프로레슬링’, 그리고 ‘최고’라는 단어였다.

PWF는 현재 국내 남아있는 몇 안 되는 독립 프로레슬링 단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출범과 함께 지난 2013년부터 꾸준히 흥행을 개최해왔다. 자생 가능한 지속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동안 국내 프로레슬링이 봉착한 난제들을 하나둘 봉합해나가고 있는 단체이기도 하다.

그러한 PWF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개최하는 이벤트가 있다. 바로 ‘인생공격’ 시리즈다. WWE에 ‘레슬매니아’가, 신일본프로레슬링에 ‘레슬킹덤’이 있는 것처럼 인생공격은 PWF의 간판 흥행 타이틀이기도 하다. 마침 인생공격 시리즈의 개최 주기도 연간 사이클에 가까워 좋은 그림을 이룬다.

바로 PWF의 간판 이벤트인 인생공격의 네 번째 흥행이 지난달 21일 경기도 일산 빛마루 방송지원센터에서 열렸다. 로드 FC 미들급 잠정 챔피언이었던 최영의 형 사이 료지가 이끄는 일본 프로레슬링 단체 ‘랜즈엔드(LAND'S END)’가 이 흥행에 도움을 줬다. PWF, 그리고 김남석과의 우정을 과시한 료지는 인생공격 4를 위해 단체를 이끌고 직접 한국으로 건너왔다.

이날 료지가 랜즈엔드를 이끌고 한국을 찾은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바로 전일본프로레슬링 공인의 헤비급 타이틀 부활과 함께 새로운 챔피언을 가리는 8강 토너먼트의 무대가 바로 인생공격 4였기 때문이다. 프로레슬링의 본고장인 일본의 미디어들도 직접 건너와 열띤 취재를 이어갈 정도로 타이틀에 무게감이 실렸다.

그러한 발걸음에 보답하듯, PWF 소속의 프로레슬러들은 극한의 고통을 참아내며 온몸을 내던졌다. 링 위로 흩뿌려진 선명한 피와 뜨거운 땀방울로 만들어낸 PWF X 랜즈엔드의 네 번째 인생공격 현장을 찾았다.


■ 압도적 비주얼 선보인 보디가와 닥터몬즈 주니어의 고군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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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인생공격 4에서는 9경기 중 총 7경기가 모두 헤비급 챔피언십 8강 토너먼트로 꾸려졌다. 오프닝 경기도 8강 토너먼트의 제1경기로 열린 일본의 보디가 대 PWF의 닥터몬즈 주니어의 맞대결이었다. 

일본에서 건너온 보디가는 압도적인 비주얼을 자랑하는 헤비급 프로레슬러다. 노란색의 짧은 머리와 어마어마한 사이즈로 벌크업 된 근육질의 피지컬은 스캇 스타이너를 쏙 빼닮았다. 빅맨 파워하우스의 상징과도 같은 고릴라 프레스 슬램 같은 기술들은 관객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이에 맞서는 PWF의 닥터몬즈 주니어는 너무나 초라할 정도로 작았다. 완벽한 미스매치다. 하지만 이 둘은 전형적인 빅맨과 경량급 언더독의 구도로 드라마틱한 경기를 펼쳤다.

보디가의 파워풀한 공격에 아픔을 호소하며 코믹한 웃음을 선사했던 닥터몬즈 주니어의 반격은 그래서 더욱 집중도를 높일 수 있었다. 3연속 드롭킥으로 보디가를 결국 다운시켰고, 코너에 올라가 450도 스플래시를 성공시켰다. 비록 경기는 파워슬램으로 3카운트 핀 폴 패를 당한 닥터몬즈 주니어였지만, 보디가는 그런 그를 일으켜 세운 뒤 손을 들어줬다. 이어진 관객들의 박수갈채는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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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시합 역시 헤비급 챔피언십 8강 토너먼트의 제2경기로 치러졌다. 돌골스렌 베링온과 윤보익은 각각 몽골과 중국에서 온 선수로 소개됐는데, 재미있게도 양 선수 모두 감추고 싶은 것이 많았는지(?), 모두 복면을 쓰고 등장했다.

신장은 작지만 두껍고 단단한 윤보익 덕분에 링 액션의 임팩트는 강했다. 이따금씩 합이 맞지 않는 부분은 아쉬웠던 대목. 하지만 경기 자체는 파이팅 넘치는 움직임으로 제법 활기차게 진행됐다. 승부는 윤보익에게 초크슬램을 선사한 베링온이 3카운트 핀 폴 승으로 마무리됐다.


■ 한국의 남색 디노 ‘엉클’과 챔피언 마사시, 그리고 형제 대결

일본의 프로레슬링 단체인 DDT에는 남색 디노라는 프로레슬러가 있다. 여기서 남색은 ‘男色’의 한자어로,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남자를 탐하는 게이 기믹을 가지고 있다.(물론 실제 게이는 아니다) 경기 중 상대에게 키스를 날리거나 가슴을 더듬고, 상대의 고간을 공략하는 기술을 선보이며 큰 웃음을 선사한다.

하지만 남색 디노는 개그 캐릭터를 유지하면서도 수준급의 경기력을 보여주는 선수다. 덕분에 일본을 넘어 북미에서까지 사랑받는 프로레슬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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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프로레슬링 챔피언 다케다 마사시는 이날 또 한 명의 남색 디노를 만났다. 바로 비슷한 기믹을 가진 PWF 소속의 프로레슬러 엉클이다. 데스매치의 최강자로 항상 잔혹한 경기를 펼치던 마사시가 엉클에게 쩔쩔매던 모습은 그래서 더욱 생경한 장면이었다.

마사시와 엉클의 경기는 링을 벗어나 관객석까지 이어지며 체어샷이 난무하는 뜨거운 시합을 펼쳤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두 선수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씬스틸러로서 탁월한 역할을 보여준 엉클, 그리고 당황하면서도 호쾌한 타격기를 꽂아 넣는 마사시의 조합이 빛을 발했다. 리버스 유크래시로 핀 폴 승을 따낸 마사시가 경기 후 엉클에게 키스로 화답하는 장면까지. 두 선수는 각자의 롤에 충실했고, 큰 시너지 효과를 냈다.

8강전의 마지막 시드 경기는 바로 랜즈엔드의 대표 료지와 로드 FC 파이터 최영의 맞대결이었다. 정통 프로레슬러 대 종합격투기 파이터, 형과 동생의 대결이라는 색채감 선명한 대결이었다. 화려한 팬츠와 두툼한 레슬링 기어를 장착한 료지, 맨발에 오로지 파이트쇼츠만 걸친 최영의 겉모습만 봐도 상이한 스타일을 직감할 수 있었다. 관객들은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집안싸움”이라는 재미있는 챈트를 외치며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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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경기는 달랐다. 큰 웃음을 터뜨린 관객들의 얼굴에서 미소를 지울 정도로 격렬한 공방이 이어졌다.

이날 료지와 최영은 북미와 일본에서 간혹 볼 수 있었던 MMA 컨셉의 경기를 충실히 구현했다. 초반 캐치레슬링 위주로 진행되던 경기는 곧 관객석으로 무대를 옮겼다. 료지가 강하게 촙을 넣으면 최영은 복부 니킥으로 응수했다. 프로레슬러와 파이터라는 각자의 선명한 색깔을 대비시킨 장면이었다.

다시 링으로 돌아온 뒤에도 이 양상은 그대로였다. 최영이 길로틴 초크로 형을 공략하면 료지는 그 자세 그대로 최영을 들어 올려 버티컬 수플렉스로 화답했다. 타격기와 캐치레슬링, 서브미션 공방이 이어졌고, 특히 중간 중간 료지가 꽂아 넣는 수플렉스는 브레인버스터에 가까울 정도로 강렬한 임팩트를 안겼다. 크루시픽스 홀드로 핀 폴 승을 따낸 형 료지가 결국 헤비급 챔피언십 준결승에 진출했다.


■ 악역 챔프 vs 언더독 도전자 구도의 명경기 펼친 LOTW 타이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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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비급 챔피언십만큼 비중 있는 경기는 또 있었다. 바로 PWF의 양대 타이틀전이 이날 인생공격에서 모두 열린 것.

첫 타자로 나선 건 김남훈이었다. 지난 2015년 LOTC 챔피언에 오른 김남훈은 3년 가까이 벨트를 지키고 있는 타이틀 홀더다. 하지만 그는 이날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물론 김남훈이 핀을 시도할 때마다 경기 제한시간 15분 중 3분이 깎여나가고, 승자 없이 경기가 끝나면 타이틀을 빼앗긴다는 미심쩍은 룰이 달린 것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하지만 상대가 오랜 시간 PWF에 헌신해온 배드 릴 섭지였기에 이러한 과정은 용납될 수 있었다. 이날 김남훈을 꺾고 제2대 LOTC 챔피언에 등극한 배드 릴 섭지의 감격적인 승리를 향해 팬들은 아낌없이 “You deserve it” 챈트를 보냈다.

PWF의 또 다른 벨트이자 간판 프로레슬러 ‘하비몬즈’ 김남석의 LOTW 타이틀 또한 거센 도전을 받았다. 일본 바사라 출신의 도전자 아베 후미노리가 팬들의 응원을 업고 김남석의 타이틀을 집요하게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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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미노리는 빠른 스피드와 화려한 킥이 돋보이는 프로레슬러다. 현재 일본 프로레슬링 시장에서 떠오르는 신성으로 이름이 높다. 마침 악역 챔피언을 고수하는 김남석의 스타일 덕분에 후미노리는 언더독 도전자라는 포지션에서 스토리텔링까지 가미하며 멋진 경기를 펼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코메인이벤트인 LOTW 타이틀전은 예기치 못한 사고에도 불구하고 두 선수가 보여준 노련한 운영의 묘가 돋보이는 경기였다.

이날 경기 중 김남석은 장외에 쓰러진 후미노리의 상체에 의자를 세팅하고 다이빙 더블 풋스톰프를 시도했다. 그런데 해당 범프 과정에서 기술을 접수하던 후미노리의 머리가 찢어져 큰 출혈이 발생하는 사고가 터졌다. 경기 재개가 불투명한 상황이었지만 후미노리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을 언더독 도전자로서의 비장함을 부각시키는 장치로 활용하며 경기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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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석의 대처 또한 훌륭했다. 돌발 상황에서도 김남석은 당황하지 않고 후미노리의 안면에 흐른 피를 자신의 얼굴에 묻혀가며 악역 챔피언으로서의 기믹을 충실히 살렸다. 후미노리가 드래곤 스크류로 반격의 포문을 열고 다채로운 킥 공격으로 관객들의 호응을 끌어내면, 김남석은 리버스 엘리베이티드 DDT와 팝업 파워밤 등 큼직한 기술로 공세를 차단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반격과 치열한 공방이 계속됐다. 

경기는 피니시인 퍽키지 파일드라이버를 성공시킨 김남석이 또 한 번 타이틀을 방어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스토리라인이나 선수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이 처음 보는 사람들도 충분히 빠져들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장치를 배치한 덕분에 뛰어난 몰입감을 선사했다. 타이틀을 방어하는 강력한 악역 챔피언과 선역의 언더독 도전자라는 롤이 확실히 구분 지어졌고, 빠른 템포의 경기력과 노련한 운영이 돋보인 챔피언십다운 명경기였다.


■ 랜즈엔드의 사이 료지, 새 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다

마지막 메인이벤트는 헤비급 챔피언십 8강 토너먼트의 결승전으로 치러졌다. 각각 준결승에서 마사시와 베링온을 꺾고 올라온 료지와 보디가가 타이틀전의 주인공이 됐다.

료지와 보디가는 이미 앞서 두 경기나 치른 만큼 체력적인 한계가 커 보였다. 특히 앞선 경기에서 대일본프로레슬링 타이틀 홀더인 마사시를 상대한 료지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5~6m 높이의 난간까지 올라가는 위험한 범프를 시도했고, 무수한 장외난투 끝에 마사시로부터 무려 10차례 이상의 체어샷을 당해 반칙승으로 결승에 올라온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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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기진맥진한 두 선수의 경기는 서로의 약점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스타일로 전개됐다. 료지는 육중한 체구의 보디가를 쓰러뜨리기 위해 주로 오른 다리를 공략했고, 보디가는 앞선 경기에서 안면 타격으로 고생했던 료지의 후두부를 호시탐탐 노렸다.

체력적인 문제로 료지와 보디가는 중반까지 비교적 느릿느릿하게 경기를 풀어나갔다. 하지만 후반에 이르자 서로 가진 패를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다. 고각 백드롭과 버티컬 수플렉스를 서로 주고받았고, 이내 보디가가 스피어-래리어트로 핀을 시도했다.

하지만 료지는 이를 뒤집고 다시 라운드하우스킥과 니바로 반격하며 다시 보디가의 하체를 공략했다. 후반까지 서로의 셀링 포인트를 충실히 유지한 점이 돋보였는데, 결국 이 장면은 승리의 도화선이 됐다. 20분이 넘는 장기전 끝에 료지는 기어코 자신의 피니시인 아카가와 철교(러닝 니 스트라이크)를 성공시켰다.

8강 토너먼트 세 경기에서 모두 처절한 혈전을 치르고 올라온 료지가 마침내 전일본프로레슬링 공인 헤비급 타이틀을 거머쥐는 순간이었다.


■ 지속 가능한 프로레슬링···그 노력과 열정의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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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WF X 랜즈엔드의 인생공격 4 합동 흥행은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쳤다. 먼저 팬들의 펀딩이라는 도움이 있었다. 또한 한국에서 꼭 흥행을 열고 싶다는 료지의 강력한 의지 덕분에 랜즈엔드 측에서도 자비를 들여 PWF와 힘을 합쳤다.

비록 많은 관객이 자리를 채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날 경기에서 보여준 선수와 팬들의 열정은 좁은 공간을 메우기에 충분했다. 마침 일본의 주간 프로레슬링지에서도 직접 건너와 인생공격 흥행을 취재했고, 이날의 경기는 일본 팬들에게도 생생하게 소개될 수 있었다.

경기가 끝난 뒤 김남석은 “한국에서 프로레슬링 하기 어렵죠. 쉽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먼저 꺼냈다. 그래도 지속 가능한 자생력이라는 끈을 절대 잃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후 챔피언의 기믹을 벗고 단체의 대표로 돌아온 김남석은 경기장을 찾은 관객들에게 마지막으로 “프로레슬링, 최고!”를 같이 외쳐줄 것을 부탁했다.

이날 팬들과 함께 호흡하며 활짝 웃는 그의 얼굴에서 프로레슬링을 향한 순수한 열정을 발견한 사람은 비단 기자뿐만이 아닐 것이다. 

[사진] 일본 주간프로레슬링지 제공
조형규 기자(press@monstergroup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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