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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짐=반재민 기자] 1995년 창단부터 약 22년간 삼성화재의 영광과 좌절을 함께한 신치용(62) 삼성화재 배구단 단장이 52년간의 배구인생을 마감했다.

신치용 감독은 1995년 삼성화재의 창단감독으로 부임한 이래 슈퍼리그 66연승을 포함해 슈퍼리그 9연패와 V리그 초대 우승감독, 2007-2008시즌부터 2013-2014시즌까지 V리그 7연패라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이뤄냈다.

2014-2015 자신의 제자인 김세진 감독의 OK 저축은행에 패하며 감독직에서 물러나 단장직을 수행하던 신치용 단장은 2017년 모기업의 경영방침에 따라 삼성화재의 상임고문으로 물러나 현장을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신치용 감독의 배구인생 52년, 삼성화재를 이끌었던 영광의 22년 동안 많은 선수들이 그의 손을 거쳐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 했다. 그중에서도 V리그 출범 이후 신치용 감독이 거쳐간 외국인 선수들도 빼놓을 수는 없다.

신치용 감독은 외국인 선수 선발에 있어서 철저한 원칙을 세웠다. 먼저 팀에 헌신할 수 있는지, 그리고 한국에 잘 적응할 수 있는지, 그리고 키워낼 가능성이 있는지였다. 이러한 신 단장의 원칙은 평범했던 선수를 V리그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탈바꿈 시켰고, 삼성왕조의 주역이 되었다.

이번 'V-포커스' 시간에는 삼성화재 신화창조의 주역 신치용 감독과 함께했던 6명의 외국인 선수들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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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쉐 (본명: 카를로스 세자르 다 실바, 브라질, 2005년)

신치용 감독과 처음으로 함께했던 외국인 선수는 배구팬들에게도 생소한 이름 아쉐다. 브라질 국가대표 출신의 윙 스파이커였던 아쉐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브라질 국가대표 지냈고, 2002년에는 일본 도레이에서 득점상까지 받았을 정도로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고 있던 선수였다.

외국인 선수 도입 초기에는 모기업 삼성의 경영방침대로 경력이 화려한 외국인 선수를 선발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한 방침속에서 아쉐는 일찌감치 삼성화재의 낙점을 받아 9월에 계약을 완료하며, V리그 출범 이후 외국인 1호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시즌 전 전지훈련에서부터 화려한 공격력으로 신진식과 김세진의 부담감을 덜어줄 수 있을 것으로 보였지만, 막상 시즌이 시작하자 공격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서브 리시브가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또한, 한국에 올 때부터 안고 있었던 허리와 무릎부상이 악화되었고, 결국 신치용 감독은 시즌 도중 아쉐를 퇴출하고 새로운 외국인 선수를 뽑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3개월 만이었다. 신 감독의 첫 외국인은 처절한 실패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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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윌리엄 프리디 (미국, 2005-2006 시즌)

아쉐를 퇴출하고 데려온 외국인 선수는 미국 국가대표 출신의 레프트 윌리엄 프리디였다.

배구팬들은 프리디의 등장에 대해 놀라워했다. 2000년부터 미국 국가대표를 지냈으며, 삼성화재 입단 직전에 있었던 2005 그랜드챔피언스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을 만큼 기량이 전성기에 달해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배구팬들의 예상과는 달리 프리디는 좀처럼 한국무대에 적응하지 못했다. 세터와의 호흡은 계속해서 어긋났고, 팀 훈련에서도 불성실한 모습으로 신 감독과 자주 언쟁을 벌였다.

결정적으로 당시 라이벌인 현대캐피탈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던 숀 루니와 맞붙은 챔피언결정전에서는 루니와 박철우를 비롯한 장신 군단의 높이에 완전히 압도당하며  자신보다 한수 아래로 여겼던 루니가 챔피언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것을 봐야만 했다.

짧은 6개월간의 한국생활을 끝내고 그리스 헬레닉 리그인 올림피아코스로 이적한 프리디는 이후 2008년 미국 대표팀을 베이징 금메달과 2016년 리우 올림픽 동메달로 이끄는 등 미국배구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클럽 팀에서도 명문 구단인 제니트-카잔에서 활약하는 등 인상적인 커리어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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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레안드로 (본명 레안드로 아라우조 다 실바, 브라질, 2006-2007 시즌)

아쉐와 프리디의 대실패 이후 신치용 감독은 외국인 선수의 영입기조를 바꾸게 되었다. 명성은 조금 떨어지더라도 팀에 헌신할 수 있는 외국인 선수로 선회한 것이었다. 이러한 기조를 바탕으로 데려온 첫 번째 외국인 선수가 바로 레안드로였다.

브라질 청소년 국가대표를 지냈지만, 상파울루 등 브라질에서만 클럽팀 커리어를 쌓은 레안드로는 신치용 감독의 부름을 받고 삼성화재에서 자신의 첫 해외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개막전이었던 현대캐피탈과 경기에서 49점을 내리 꽂는 폭발적인 득점력을 보인 레안드로는 삼성화재 팬들로부터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평가와 함께 루니와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하지만, 삼성화재는 레안드로의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준우승에 머물러야만 했다. 결정적일 때마다 범하는 공격과 서브 범실이 약점으로 지적되었지만, 공격력은 최고였기에 신치용 감독은 재계약을 추진했다.

하지만, 레안드로는 19만 달러의 기존 연봉에 약 1.5배에 달하는 28만 달러의 연봉에 일본 도레이 애로우즈로 이적했고, 일본에서도 괴물이라는 별명에 걸맞는 공격력을 보여주며 팀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2009-2010년 후반기에 대한항공의 소방수 역할로 입단해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끈 레안드로는 2016년 V리그 트라이아웃에 신청서를 제출해 세 번째 한국진출을 노크하는 등 한국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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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안젤코 추크 (보스니아-크로아티아, 2007-2009년)

레안드로를 일본으로 보내고 새로이 데려온 외국인 선수는 크로아티아의 안젤코 추크였다. 당시 삼성화재는 미국의 공격수 커트 토펠과 협상을 벌이고 있었지만, 현대캐피탈이 토펠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된 자원이 바로 안젤코였다.

2m의 신장을 가진 공격수 안젤코는 크로아티아 리그 믈라도스 자그레브에서 활약하며 3년 연속 MVP를 차지했던 선수였고, 연봉 또한 10만 달러로 저렴했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외국인 선수를 영입한 삼성화재에 팬들은 의구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KOVO컵에서도 4경기 59득점에 그치며 실망스러운 성적을 남기며 시즌 중 퇴출예상 1순위라는 불명예도 떠안아야 했던 안젤코였다. 신치용 감독은 그 당시의 기억에 대해 “맨땅에 헤딩을 하는 기분이었다. 주위에서는 무늬만 외국인 선수를 데려와서 꼴찌를 해 다음 드래프트 최대어인 문성민을 데려오는 작전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었을 정도였다.”라고 회상했다. 도중 퇴출을 고려했지만, 신 감독은 안젤코의 성실성을 높게 평가했다. 다른 선수의 범실도 자신의 책임이라 이야기하는 안젤코에게서 가능성을 보았다고 신 감독은 이야기했다.

그리고 신 감독의 예상은 적중했다. 개막전 현대캐피탈과의 경기에서 47득점을 폭발시키며 3대0 셧아웃 승리를 이끈 안젤코는 시즌 내내 가공할만한 득점력으로 시즌 750득점으로 득점 1위, 공격 성공률 1위라는 놀라운 기량으로 팀의 V-리그 두 번째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삼성화재와 재계약을 맺은 안젤코는 34경기, 885득점이라는 폭발적인 득점력을 보여주며 팀의 2연패를 이끌었다.

2009-2010시즌 삼성화재를 떠나 일본 V리그의 도요타로 이적한 안젤코는 2011-2012시즌 한국전력 캡코 45(현 한국전력 빅스톰)를 통해 한국무대에 복귀해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끄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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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빈 슈미트 (캐나다, 2009-2012년)

2009-2010 시즌 삼성화재는 V리그 2연패의 주역인 안젤코가 떠나며 우승 가능성이 희박한 팀으로 분류되었다. 게다가 안젤코의 대체 선수로 영입된 가빈은 농구선수 출신으로 배구경력이 얼마되지 않은데다가 이미 입단하기 2년 전 현대캐피탈과 LIG 손해보험의 입단테스트에서 고배를 마셨던 선수였다.

하지만, 신치용 감독은 역시 가빈의 성실한 훈련자세와 노력을 높이 사 계약을 성사시켰다. 계약 체결 당시 가빈의 몸값은 약 17만 달러였지만, 여느 외국인 선수와는 다르게 팀 훈련이 끝난 후 장비정리를 국내선수들과 함께 했고, 팀의 승리를 위해 몸을 던지는 허슬 플레이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즌이 시작되자 가빈은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상대팀 코트에 맹폭을 퍼부었다. 2009-2010시즌 1110점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으로 V리그 최초의 1000득점 돌파라는 기록까지 남겨 안젤코를 능가하는 외국인 선수로 발돋움한 가빈은 챔피언결정전을 홀로 책임지며 팀의 3연패를 이끌었다.

특히 2010-2011 시즌은 가빈 혼자 우승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즌이었다. 당시 삼성화재는 위기를 겪고 있었다. 팀의 수비를 책임지던 석진욱이 십자인대 파열로 이탈했고, 가빈 또한 자신에게 집중되는 서브에 고전했다. 하지만, 가빈의 공격력은 여전했고, 3위로 출전한 플레이오프에서부터 폭발적인 득점력을 보인 끝에 또다시 삼성화재를 챔피언결정전 우승에 올려놓았고, 이듬해인 2011-2012 시즌에도 평균 32.7점, 공격 성공률 59.3%의 활약으로 삼성화재를 통합우승에 올려놓았다.

삼성화재에 있던 3년동안 3번의 챔피언결정전에서 모두 우승, MVP를 차지한 가빈은 2012년 시즌을 마친 후 러시아 리그의 이스크라 오틴트소브로 떠나게 되었다.

삼성을 떠난 이후에도 가빈은 캐나다 국가대표팀에서 주전 공격수로 활약했으며, 클럽팀에서도 러시아와 터키를 거쳐 현재는 일본 도레이 애로우즈로 둥지를 틀어 자신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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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레오 (본명: 레오나르도 레이바 마르티네스. 쿠바. 2012-2015년)

가빈은 러시아로 떠났다. 그리고 경쟁팀들은 안젤코와 가빈의 예를 본받듯 앞다투어 공격력이 뛰어난 외국인선수 영입에 열을 올렸다. 현대캐피탈의 아가메즈가 그랬고, 한국전력의 비소토, 대한항공의 마이클 산체스, LIG 손해보험의 오레올 까메호와 에드가가 그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신치용 감독은 역시 네임벨류에 연연하지 않고, 절실함이 묻어있는 외국인 선수를 영입했다. 바로 쿠바의 레오 마르티네스였다. 쿠바 청소년 대표팀과 국가대표팀을 지낸 레오는 자유를 위해 푸에르토리코로 망명을 했지만, 2년간 출전을 하지못하는 중징계를 받고 한동안 배구에서 손을 놓고 지내야했다.

징계가 해제되고 푸에르토리코 리그에서 MVP와 득점상을 수상할 정도로 기량을 인정받아 꿈에 그리던 러시아로 무대를 옮겼지만, 쟁쟁한 선수들 틈바구니에서 레오가 살아남기에는 쉽지 않았다. 그렇게 힘든 나날을 보내던 와중 삼성화재에서 연락이 왔다. 한국으로 가자는 제안이었다.

레오는 낯선 동양의 나라에서의 도전을 택했다. 비록 한 시즌 임대였지만, 가족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가장의 책임감으로 레오는 한국에서 악착같이 배구를 해나갔다. 그리고 그 간절함은 성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떤 볼이 오더라도 처리할 수 있는 클러치 능력에 폭발적인 점프력, 게다가 적재적소에 터지는 서브까지 레오를 막을 수 있는 팀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2012-2013 시즌 중반 삼성화재는 쿠바의 해외여행 자유화에 따라 레오의 가족들을 모두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구단의 헌신에 실력으로 보답한 레오는 한국에서의 첫 시즌을 30경기 867득점, 공격성공률 59.7%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팀의 6연패와 정규리그 MVP , 공격상, 득점상 등을 휩쓸었다. 

이듬해 삼성화재는 레오를 완전이적으로 영입했고, 안정감을 찾은 레오는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된 실력으로 상대코트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현대캐피탈에서는 최고의 외국인 선수 아가메즈를 데려오며 삼성화재와 치열한 경쟁을 펼쳤고, 삼성화재는 박철우가 2라운드 손가락 부상을 당하며 전열에서 이탈, 3라운드 마지막 경기까지 결장하면서 레오에게 부담감을 가중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레오는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해냈다. 공격점유율이 거의 60%에 육박하는 극한의 몰아주기 속에서도 레오는 한번도 불평불만을 터뜨리지 않고 점유율과 비슷한 58.43%의 가공할만 한 공격력으로 팀을 V리그 7연패라는 전인미답의 기록으로 이끌었다. 득점상, 공격상, 정규리그 MVP는 덤이었다.

비록 2014-2015 시즌 OK 저축은행의 시몬에 밀려 우승에 실패하고, 2015년을 끝으로 한국무대를 떠났지만, 레오는 삼성화재와 한국배구의 역사에 있어 큰 족적을 남겼다. 레오의 활약이 가빈보다 더욱 빛났던 점은 팀의 수비를 책임져주던 석진욱의 은퇴와 여오현의 이적으로 수비력이 이전보다 더욱 떨어졌고, 레오와 짝을 맞춘 보조 공격수 박철우의 부상과 입대로 거의 레오 혼자만의 공격력으로 이뤄낸 성과였기에 그가 이룬 기록들은 더욱 빛날 수 있었다.

■ 우승과 몰아주기 배구, 딜레마에 서있었던 신치용 감독

프리디 이후 신치용 감독을 거쳐간 외국인 선수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공격점유율이 높고, 점유율에 못지않게 공격성공률 또한 높다는 것이다. 정규리그 우승을 향한 분수령에서도, 플레이오프, 챔피언결정전에서도 삼성화재 외국인 선수들의 공격점유율은 50%를 상회했다.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활약과 '시스템 배구'라는 용어를 가진 몰아주기 배구로 이뤄낸 7번의 우승은 삼성화재와 신치용 단장에게는 크나큰 영광을 주었을지는 몰라도 배구팬들에게는 한국배구를 후퇴시켰다는 비난도 같이 받게 만들고 있는 요인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항간에서는 선수의 극한까지 끌어올려 공격을 시켜, 선수 혹사라는 비난도 거세게 일고 있지만, 만약 혹사였다면 레안드로 이후에 영입된 선수들이 2년 넘게 삼성화재에서 뛸 수 있었을까라는 반론 역시 만만치 않다.

신치용 감독의 몰아주기식 배구에 대해 배구인들의 반응은 어떨까? 삼성왕조의 서막을 알렸던 인물이자 현재 삼성화재를 이끌고 있는 신진식 감독은 인터뷰에서 "대학시절부터 서브권이 있던 시절 혼자 100개씩 넘게 때렸었다. 요즘 70개, 80개 한다고 해서 몰아주기 배구라는 건 말이 안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현재 대한항공을 이끌고 있는 박기원 감독 역시 "자기 팀의 우승을 위해서는 최고의 감독이라 생각한다. 신 감독은 자기 팀에 있는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고 준비한 것이다. 그것은 인정해줘야 하는 부분이다."라며 신치용 감독에 대해 평가했다.

과연, 신치용 단장의 배구인생과 함께한 이 여섯명의 외국인 선수들이 과연 대한민국 배구에 있어 어떠한 영향을 남겼을까? 그리고 그들이 본 신치용 단장은 어떤 사람이자 감독이었을까? 사뭇 궁금해지는 요즘이다.

사진=삼성화재, KOVO 제공
반재민 기자(press@monstergroup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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