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고 순한 느낌을 줍니다. 미국도 각 주마다 성향이나 성격이 다르고 심지어 말투도 다른데 탈보트에게는 유타 주의 약간은 고지식하면서도 순수한 그런 느낌이 흐릅니다. 고교 때 156km를 던졌던 그는 프로에 가서 기교파 투수로 변신했고 체인지업은 최고라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그가 걸어온 야구 인생과 프로로 들어선 과정, MLB에서도 알아준 체인지업을 익힌 순간, 한국행 결정 과정 등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 마운드에서는 용감하지만 평소에는 조용하고 온화한 성격의 탈보트가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며 미소짓고 있습니다. ⓒ민기자닷컴 >

-한국 생활은 어떤가. 문화나 음식 차이 등은.


▶음식은 대부분 정말 좋다. 나도 매콤한 음식을 좋아한다. 물론 아주 매운 것은 좀 어렵고 김치도 아직은 적응하지 못했지만 음식은 맛있다. 갈비는 최고다. 야채에 싸먹으면 정말 맛있다.

-미첼 R 탈보트가 본명인데 R은 무엇의 약자인가.


▶사실 그건 그냥 R이다. 할아버지의 이름이 Roy였는데 그 이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그냥 이니셜 R만 포함시킨 것이다.

-한국이나 혹은 아시아에 와본 적이 있었나.


▶아니 전혀 없었다. 태어나서 집에서 가장 먼 곳까지 온 것이다. (웃음) 도미니카나 캐나다에 간 적은 있었다.

-한국에 온 첫 인상은 어땠나.


▶추웠다. 아주 추웠다. (웃음) 1월이었나 정말 추웠던 기억만 생생하다. 유타는 가끔 영하로 떨어지고 눈도 오지만 그렇게 춥지는 않다.

-유타 주의 '세더 시티'가 고향인데 어떤 곳인가.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차로 3시간 반 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다. 인구가 2만 남짓 될까, 대구의 한 동네 정도 될까. (웃음) 유타 주 남쪽 끝에 위치한 곳이다.

-6남매라는데 형들도 야구를 했나.


▶형 셋과 누나 둘이 있다. 형들과 늘 함께 야구를 했다. 야구뿐 아니라 축구, 풋볼, 농구 등 모든 스포츠를 했다. 늘 형들과 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게 내게 도움이 됐던 것 같다. 항상 가장 어리고 작으니까 늘 더 힘을 내야했다.

-형들도 야구 선수가 있나.


▶대학까지 야구를 한 형이 있고, 다른 형은 고등학교 선수였다. 그러나 프로가 된 것은 나뿐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휴스턴 애스트로스에 드래프트됐다. 고등학교 때 대단히 잘 했던 모양이다.


▶솔직히 그렇게 잘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잠재력은 좋았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 대단히 빠른 공을 던졌었다. 체인지업도 상당히 좋았다. 그래서 뽑혔던 것 같다. 당시에는 뛰어난 투수는 아니었지만 좋은 지도자를 만나고 체계적으로 배우면 좋은 투수가 될 수 있다는 잠재력을 본 것 같다.

< 고2때 완성한 특유의 탈보트 체인지업. 둘째 손가락을 공에서 떼고 던집니다. ⓒ민기자닷컴 >

-체인지업은 언제 처음 배웠나.


▶고등학교 2학년 마치고 서머 베이스볼 리그에서 뛰었다. 그런데 당시까지도 평범한 서클 체인지업을 던졌는데 구속이 너무 빨랐다. 142km 정도가 나와 체인지업의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코치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그립을 조금 바꿔서 두 번째 손가락을 공에서 떼고 던져봤는데 갑자기 공의 움직임이 많이 떨어지면서 구속도 효과적으로 낮출 수 있었다. 첫 불펜부터 그 체인지업이 제대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탤보트 체인지업이 그렇게 탄생했다. (웃음)

-그래도 드래프트 2라운드라면 대단한데 고교 때 얼마나 빠른 공을 던진 건가. 체인지업이 140km를 넘었다니.


▶최고 구속은 96마일(약 155km) 정도 나왔던 것 같다. 그러나 프로에 가서는 구속을 평균 145km 정도로 떨구고 대신 움직임이 심하고 떨어지는 구종을 주로 던지게 했다. 비로소 투수로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구속은 그래서 떨어진 건가.


▶어떤 이유인지 그런 방식으로 던지다보니 최고 구속은 150km 정도로 떨어졌다. 여전히 가끔은 빠른 구속이 나오기도 한다. 작년에 완투를 한 적이 있는데 9회에 155km가 꾸준히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구속은 떨어졌다. 계속 그렇게 빠른 공을 던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왜 어쩌다 그렇게 나오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웃음)

-고교 때 성적은 어땠나. 기억나나.


▶기억은 전혀 없지만 엉망이었던 것은 안다. (웃음) 캐년뷰 고교에 다녔는데 우리 팀은 3학년이 둘밖에 없었고 아주 어리고 최약팀이었다.

-그래도 스카우트들은 당신의 존재를 알았었나보다.


▶우연한 기회가 왔다. 한 스카우트가 운전을 하고 어딘가로 가다가 야구 경기가 열리는 것을 보고 그냥 운동장에 들려봤다고 했다. 그날 마침 내가 던지고 있었다.

-당신을 보러온 것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다가 우연히 봤단 말인가.


▶그렇다. 시카고 화이트삭스 스카우트였는데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지나다 야구 경기가 열리는 것을 보고 잠깐 들렸다가 내가 던지는 것을 봤는데 곧바로 서류 작성을 하라고 하더니 여름에 LA에서 열리는 고등학생 토너먼트에 나를 초청했다. 그 토너먼트에는 모든 프로 팀의 스카우트들이 와서 선수를 지켜봤다. 그렇게 프로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고2땐가 그렇다.

-참 흥미로운 스토리다. 언제부터 프로 선수가 되고 싶었나.


▶어려서는 농구를 더 좋아했다. 그러나 재능은 분명히 야구였고, 아주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나는 메이저리그 선수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10세 때쯤.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하늘이 주신 재능도 있었던 것 같다.

-대학에서도 제안이 많았을 텐데.


▶고3학년 내내 서류를 쓰느라 정신없었다. 장학금 제안을 한 대학교가 수 백 개였다. 그리고 많은 프로팀의 필기시험도 봤다. 1,2,3라운드 후보 선수들은 야구 실력 뿐 아니라 정신력과 심리 상태 등을 알아보는 필기시험도 몇 차례나 본다. 결과를 내게 알려주지는 않지만 팀에서는 알고 있는 그런 시험인데 질문도 수없이 많았고 2시간 이상씩 걸린 것 같다.

-대학 대신 프로에 가기로 결정한 건가.


▶프로가 되고 싶었다. 빨리 메이저로 가려면 대학보다는 프로로 가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2002년에 드래프트됐지만 그 해에는 뛰지 않았다. 무슨 이유였나.


▶당시 MLB에 파업이 있을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1,2,3라운드에 뽑힌 선수들에게도 사이닝 보너스를 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대학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학 입학하기 이틀 전에 팀에서 전화가 왔다. 월요일이 개학이면 토요일에 전화가 왔는데 그저 안부 전화 정도였다. 나는 일단 2년제 딕시컬리지에 입학해 야구를 계속할 생각이었다. 야구가 아주 강한 학교였다.

-그러자 팀에서 마음을 바꾼건가.


▶그렇다. 대학을 간다고 하니까 정말 빠르게 모든 게 이루어졌다. 이틀 만에 협상을 하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꽤 괜찮은 사이닝 보너스도 많았다. (웃음)

-휴스턴 마이너에서 뛰다가 2006년 중반에 트레이드가 됐다. 벤 조브리스트와 함께 탬파베이로 가고 오브리 허프라는 당시 정상급 선수가 휴스턴으로 갔다. 트레이드를 예상했었나.


▶아니 전혀 몰랐고 충격이 정말 컸다. 당시 더블A에서 뛰고 있었고 미주리 주 스프링필드에 원정 가 있었다. 그런데 아침 8시경에 단장에게 전화가 와서 탬파베이로 트레이드됐다고 알려줬다.

-기분이 어땠나.


▶몹시 화가 났다. 휴스턴에서 드래프트됐고 꼭 그곳에서 메이저에 데뷔하고 싶었다.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고 구단 사람들과의 관계로 좋았다. 그러나 결국 탬파베이로 가서 더블A에서 시즌을 잘 마쳤다. (휴스턴 산하에서 6승3패 3.39를 기록한 탈보트는 탬파베이 산하고 가서 4승3패 1.90의 성적을 거뒀습니다.)

< 휴스턴이 드래프트한 탈보트는 탬파베이를 거쳐 2010는 클리블랜드에서 10승 투수 반열에 올랐습니다. >

-결국은 탬파베이에서 빅리그 데뷔전을 치른다. 기억이 생생할 텐데.


▶그렇다. 2008년이었다. 사실 빅리그에 처음 콜업된 것은 2008년 7월이었는데 그 때는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구원 투수 하나가 다쳐 메이저에 올라갔는데 휴식일 등이 겹치면서 뛸 기회가 없었고 바로 다음 날 다시 트리플A로 보내더라. 단 하루 동안의 빅리그 생활이었다. (웃음)
그리고 9월에 다시 올라갔는데 올라간 날 바로 구원 등판했다. 보스턴 레드삭스전이었다. 재미있었던 것은 경기 전 매든 감독이 내게 오늘은 던질 일이 없으니 경기를 즐기라고 했었다. (웃음) 그런데 선발 스캇 캐즈미어가 일찍 무너지자 곧바로 불펜으로 전화가 오더니 '탤보트 준비해!'라는 소리가 울렸다.

-첫 등판은 어땠나.


▶메이저리그 첫 홈런을 유킬리스에게 맞았고 주장 베리텍에게 첫 삼진을 빼앗았다. 톡톡히 신고식을 한 경기였다. (3이닝 동안 5안타 2홈런 3볼넷 2삼진으로 4실점했습니다.)

-그런데 그해 9월 이후에 한동안 빅리그 기회가 오질 않았다. (선발 1경기 포함 3경기를 던졌습니다.) 탬파베이에는 젊은 유망주 투수가 아주 많았는데.


▶그렇다. 데이빗 프라이스, 제프 니먼, 웨이드 데이비스 등 정말 좋은 투수들이 많았다. 모두 마이너에서 함께 좋은 피칭을 했고 경쟁이 치열했다. 그들에게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나에겐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2009년 시즌이 끝나고 다시 트레이드된다. 포수 켈리 쇼팩과 맞바꿔 클리블랜드로 갔는데 당신을 원하는 팀은 계속 있었다.


▶내가 재능이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살다보면 늘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상황에 놓이는 것이 중요한데 탬파베이에서는 그게 쉽지가 않았다. 나는 마이너리그 옵션도 다 끝났고 트레이드될 가능성이 컸다.

-클리블랜드에서 2010년은 정말 대단한 시즌이었다.


▶첫 등판 기억이 생생하다. 디트로이트 원정이었는데 초반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2010년 4월 10일, 1회와 3회에 각각 2실점) 내 스스로에게 '빨리 제대로 던지지 못하면 쫓겨나는 것은 시간문제다'라고 외쳤다. 그리고 편안하게 제구를 잡으면서 던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는 모든 것이 놀랍게 잘 되면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시즌 중반까지 8승인가를 거뒀다. (탈보트는 두 번째 등판에서 화이트삭스를 상대로 9이닝 2실점 1자책점의 완투승을 거둔 것을 비롯해 6월말까지 8승을 거둡니다.)

-그러나 중반을 넘어서면서 고전했다.


▶그 전해에 팔꿈치 부상으로 트리플A에서 많은 이닝을 던지지 못했다. (총 68.1이닝) 그래서 팀에서 관리를 해줬다. 투구수와 이닝을 제한했고 쉬려고 부상자 명단에도 갔다. 지친 것은 아니었지만 팀에서는 혹시 모를 부상과 그 다음해를 걱정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슬럼프도 왔고 하락세를 보이다가 시즌 막판에는 좋은 모습으로 마쳤다. (탤보트는 10승13패 4.41로 2010시즌을 마쳤습니다.)

-2010시즌에는 무엇이 달라진 건가. 정말 잘 던졌다.


▶특별한 변화보다는 빅리그 투수로 성장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사실 2,3년 전부터 빅리그 준비는 됐다고 생각했지만 기회가 오질 않았었다.

-특별히 바꾼 것은 없다는 말인가.


▶기술적으로 바꾼 것은 없고 타자들의 성향을 공부하고 그들이 타석에서 무엇을 하려는 지를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모든 투수는 매일 매일 배운다. 모든 상황과 타자의 성향과 마음이 다르니까 그런 상황들을 기억하면서 매일 배워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2011년에는 부진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부상이었다. 시작은 좋았다. 시즌 2차전 애너하임 에인절스와 경기에 8회까지 무실점으로 막고 9회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마쓰이를 상대하는데 첫 공을 던지니까 팔꿈치가 아팠다. 2구째는 더 아팠고 3구째를 참기 어렵게 아팠다. 결국 교체됐는데 그때부터 부상과의 싸움이었다. 그러다 제구력을 완전히 잃었다. 6주인가 7주 동안 재활을 하고 복귀했는데 너무 서둘렀던 것 같다. 트레이너는 말렸지만 팀은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고 나는 잘 던질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제구력이 엉망이었다. 기교파 투수인 나에게 제구력 난조는 재앙이었다. 다시 DL에 올랐고 마이너에서 재활 등판을 했는데 또 허리 통증이 왔다. 모든 것이 정리될 무렵 우발도 히메네스가 영입됐고 나는 40인 로스터에서 제외됐다. 내겐 더 이상 기회가 없었다.

-작년 시즌이 끝나고 FA가 됐고 결국 삼성 라이온스에서 뛰게 됐다. 한국행 소식에 많은 팬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오프 시즌에 적어도 절반의 빅리그 팀에서 연락이 왔다. 그러나 나의 부상과 제구력 난조 때문이었는지 메이저리그 계약을 보장하는 팀은 없었다. 마이너 계약에 메이저 캠프 초청 조건이었다. 그러다가 삼성에서 좋은 오퍼를 했다. 나는 내게 믿음을 주는 팀으로 간다는 신념이 있다. 나를 신임하는 팀에 가야 잘 던질 수 있다.

-결정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포기할 것도 많고.


▶그렇다. 내가 젊은 유망주는 아니지만 아직 많은 시즌을 뛸 수 있다. 그러나 나를 신임하는 팀에서 뛰기를 원했다. 전혀 모르는 지구의 다른 쪽에서 뛴다는 것이 생소한 도전이지만 그 길을 택하기로 했다.

-결혼은 했는데 아이는 있나.


▶이제 한 달 정도 있으면 첫 아기가 태어난다. 부인 줄리는 최근에 아기를 낳으려 미국으로 갔다. 올스타 때쯤이 예정일이라 잠깐 다녀올 것이다. 계약을 맺을 때 그 조항을 포함시켰는데 다행히 올스타 휴식기라 많이 비우지 않게 됐다. 태어날 아기는 딸이고 케이시라고 이름 지었다.

-부인도 한국행을 지지해줬나.


▶늘 나를 전폭 지지해주고 나를 따라 팀과 거주지도 많이 옮겨 다녔다. 그 생활이 분명히 어렵겠지만 늘 나의 가장 큰 지원자이다. 지난 2007년 12월에 결혼했다.

-한국에서의 선수 생활이 또 다른 디딤돌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럴 수도 있다. 궁극적인 목표는 메이저리그 무대에 다시 서는 것이고 그럴 자신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이 팀에서 열심히 잘 던지는 것이다.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지금 걱정할 일은 아니다.

-한국 야구에 대해 알고 있었나. 추신수에게 들은 말이 있나.


▶아니 거의 몰랐다. 한국에서 뛰게 될 줄은 전혀 몰랐으니 그런 것을 물어볼 일이 없었다. 시즌이 끝나고는 신수와 그의 부인 원미에게 많은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한국 팬도 아주 좋고 우리 가족을 잘 대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추신수는 어떤 선수이고 동료였나.


▶우선 투수로서는 꼭 뒤에 두고 싶은 선수다. 주자를 송구로 잡아내고 수비도 발군이고 공격으로 도와주고 그는 5툴 플레이어다. 작년에 어려운 시기도 겪었고 많이 힘겨워했다. 한국 팬들의 실망도 컸다고 하고 그들을 실망시켰다는 중압감과 신수의 좌절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큰 부상도 있었고 참 안타까운 시즌이었다. 그러나 신수는 정말 좋은 선수이자 좋은 사람이다. 늘 친절하고 좋은 친구다.

-한국 야구와 미국 야구는 어떻게 다른가.


▶한국에도 파워 히터가 있지만 대부분 밀어치기나 공을 어떻게든 맞추는 타자가 많다. 많은 번트와 (미국보다)10배는 많은 도루 등 적응할 것이 많다. 초반에는 도루를 수도 없이 내줘 투구 동작도 빠르게 하고 있다. 투구수도 급격히 늘어난다. 기아전에서는 세 타자를 상대하는데 30개 넘게 던진 적도 있다. 기아 1번 타자는 짐승이다. (웃음)

-체인지업은 한 가지를 던지나.


▶한가지이긴 한데 때로는 포심으로 때로는 투심으로 던진다. 그날 경기에 편한 것을 선택하는데 큰 차이는 없다. 그날 제구가 잘 되는 그립으로 잡는다.

-체인지업은 메이저에서 훨씬 효과적인 구질인데.


▶분명히 그렇다. 한국은 큰 스윙보다는 맞추는데 주력하니까 어떤 공을 던져도 맞춰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삼진 잡기도 쉽지가 않다.

-다른 구종은 무엇을 던지나.


▶패스트볼과 체인지업, 그리고 슬라이더, 커터, 커브볼을 던진다.

< 탈보트는 궁극적인 목표는 메이저 복귀지만 라이온스를 위해 최선의 피칭을 보인 후 팀이 원하면 내년에도 뛸 의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

-대구는 여름이 덥기로 유명한데 준비됐나. 체력관리는 어떻게 하나.


▶잘 버틸 수 있길 바란다. (웃음) 체력관리는 몸이 내게 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등판 다음날에는 장거리 달리기와 운동을 꽤 한다. 내겐 달리기가 아주 중요하다. 20분 이상 뛰어도 팔이 풀리지 않으면 계속 달린다.

-대구 운동장이 열악한데.


▶작은 운동장이긴 한데 팬이나 분위기는 좋다. (웃음)

-팬 문화도 미국과 많이 다른데.


▶팬들은 정말 좋다. (그의 첫 마디는 I love it!)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미국 팬도 야구장에서 가서 맥주 마시고 즐기는 편이지만 여기는 파티를 한다. 원정에서도 삼성 팬이 많고 늘 긍정적이고 열정적이다. 욕설을 담은 항의 편지를 보내는 팬도 없고. (웃음)

-과거에 항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나.


▶뉴욕에서 양키스전을 마치고 그런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에이로드를 맞춰 퇴장당한 후에 양키스 팬에게서 과격한 편지를 받았었다. (웃음) 어떤 미국 팬들은 자기 문제를 쏟아버리러 야구장에 가는 것 같기도 하다. (웃음) 한국 팬들은 열정적이고 즐겁다.

-생애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무엇인가.


▶아무래도 메이저리그 첫 승리다. 2010년 두 번째 등판 경기에서 화이트삭스를 상대로 완투승을 거뒀다. 잊을 수 없는 경기다.

-아직 28세인데 얼마나 더 선수 생활을 하고 싶은가.


▶던질 수 있는 한, 야구로 직업을 삼을 수 있는 한 계속 선수 생활을 하고 싶다. 대학에 돌아갈 일도 없고(웃음) 오랫동안 운동을 하고 싶다.

-삼성에서 오퍼를 하면 내년에도 뛸 생각이 있나.


▶물론이다. 한국 생활은 편하고 즐겁다. 원정도 멀지 않아 쉽고 야구장 바로 곁에 살아서 너무 편하다. 자동차도 필요 없고. 1주일에 한 번씩 쉬는 것도 아주 좋다. 내가 잘 던지기만 하면 된다.

-투구폼을 매년 바꾸는지 묻는 팬도 있었다.


▶투구폼을 바꾸지는 않지만 늘 적응하고 조정한다. 시즌이 흘러가면 몸도 바뀐다. 계속 승리하려면 한 시즌에 세 번은 새로운 투수로 태어나야 한다는 말도 있다. 투구폼을 바꾸는 것은 아니지만 변화와 적응은 필수다.

-포수 진갑용과는 어떻게 소통을 하고 호흡을 맞추나.


▶나는 한국어를 전혀 못하고 갑용도 영어에 능숙하지는 않지만 야구를 오래 했기 때문에 서로 무슨 말인지 안다. 결국 야구는 같다. 어려움은 없다.

-포수가 낸 사인을 바꾸는 경우도 거의 없는 것 같다.


▶때로는 내가 던지고 싶은 구질도 있지만 진갑용은 베테랑이고 영리하다. 서로 차이가 있을 때는 그가 원하는 것을 던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올해의 목표는 무엇인가.


▶계속해서 꾸준히 잘 던지고 싶다. 승패는 투수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퀄리티 스타트 혹은 적어도 팀에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 것이 늘 나의 목표다.

-탤보트에게 야구는 어떤 의미인가.


▶지난 10년간 야구는 나의 삶이었다. 나의 직업이자 나의 삶이며. 시즌 중이건 오프 시즌이건 어떻게 하면 야구를 잘 할 수 있느냐에 집중돼 있다. 헌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현재 나의 모든 것은 야구에 헌신한다.

올시즌 13경기에 선발로 나선 탈보트는 7승1패 3.70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7번의 퀄리티 스타트와 6이닝 이상 던진 것이 8번, 5이닝 이상 던진 것은 11번입니다. 삼성의 불펜이 기대에 못 미친 초반 그는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타자를 압도하는 강력한 구위를 자랑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구질과 경기 운영 능력을 발휘하면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합니다. 꾸준함을 대명사로 시즌 내내 사자 마운드를 지켜갈 투수로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