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오랫동안 사랑했던 첫사랑을 보내는 심정이라고 할까, 그런 애잔한 마음이 나를 감싼다. 국민타자, 합법적인 병역 면제 브로커, 라이언킹 등 다양한 별명이 붙어있는 이승엽 선수. 이제 우리나이로 38살에 접어든 백전노장이다. 그와 함께 한 대표팀 경기는 참 행복한 추억을 우리 야구팬들에게 주었다. 그런 그가 이제 드디어 국가대표라는 중책을 영원히 벗는다.

그가 없었다면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2006년 WBC 4강, 2008년 베이징 옹림픽 우승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고비 때마다 그야말로 단비 같은 존재였다. 나는 지금도 베이징 올림픽 준결승전 일본과의 피를 말리는 승부를 잊지 못한다. 손에 땀을 쥐는 접전의 승부를 우리팀에게 돌린 것은 그의 투런 홈런이었다. 아 그때 그 감격이란…

우리 야구팬들은 이승엽이란 선수에게 국제 대회는 물론 국내 대회에서도 여러 번 신세를 졌다. 국제대회에서의 좋은 성적은 물론 2003년 한 시즌 아시아 홈런신기록을 갈아치운 그가 있었기에 프로야구는 오랜 침체기를 접고 부활의 날개짓을 준비할 수 있었다. 그가 기록할 56번째 홈런의 홈런볼을 줍기 위해 당시 상섬 라이언즈의 경기가 열리는 야구장에는 수백개의 잠자리채들이 집결하였다. 당시 내야석보다 앉기 어려운 곳이 외야석이었다. 그가 깨어버렸던 기록의 보유자는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 왕정치의 1964년 시즌 55개 홈런이었다. 그의 가치는 그렇게 대단한 것이었다.

일본에 진출하기 전 이승엽 선수의 국내 리그 활약은 대단했다. 1997년, 1999년, 2001년, 2002년, 2003년 과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숫자일까? 그 해는 이승엽 선수가 페넌트 레이스 MVP를 차지한 해다. 정말 대단하지 않는가? 아직까지 그는 국내 프로야구 타자 부분에서 전인미답의 기록을 보유한 인물이다.

ファイル:YG-Lee-Seung-Yeop.jpg<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4번타자로 활약한던 이승엽 선수, 사진: 위키피디아(일본어판) >

그는 일본에서도 많은 활약을 하였다. 2005년 재팬시리즈에서 지바 롯데가 우승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이승엽이었다. 당시 그는 상식에 맞지 않는 논공행상 때문에 재팬시리즈 MVP를 놓치는 불운을 겪었다. 2006년 그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4번 타자로 자리를 바꾸면서 엄청난 활약을 한다. 타율 3할2푼3리로 리그 2위, 홈런 41개로 2위를 차지한다. 사실 시즌 후반기에 있었던 약간의 부상이 아니었다면 홈런왕은 달성되었을 것이다. 8년간의 일본 생활을 마치고 2012년 친정팀인 삼성으로 복귀한 그는 복귀 첫 해부터 빼어난 활약을 한다. 그는 생애 첫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하며 건재를 알렸다.

파일:Lee Seung-Yeop.jpg< 2011년 오릭스 시절의 이승엽 선수, 사진: 위키피디아(일본어판) >

이승엽 선수는 대선수다. 그는 6일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하면서 취재진들과의 일문일답에 성심껏 응대하였다. 그러면서 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고 또 숙연하게 만든 말을 하나 했다. ”변명은 필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우리 야구팬이 아니 우리 국민들에게 그가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다. 38살의 나이에도 대타도 좋고 심부름을 해도 좋다는 각오로 흔쾌히 대표팀에 함류하고 맹활약을 하였던 그가 아닌가? 대표팀 합류를 거부하기 위해 온갖 핑계를 하던 후배들과는 그는 차원이 다른 선수다.

즐겁고 행복한 만남을 아쉬움으로 보내는 우리 야구팬들의 마음은 아프기만 하다. 하지만 이제 우리 모두 그를 놓아주고 그의 앞날에 무궁한 건승이 있기를 기원할 시간이다. “이승엽 선수, 너무 고마웠습니다. 정말 당신과 같이 한 시간은 행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