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완' 최동원의 특유의 동작. 그는 삼진을 잡거나 투구가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유니폼 끝에 스타킹을 잡곤 했다. 이 동작을 기억한다면 당신은 최동원과 동시대를 함께한, 지금껏 '야구'라는 공놀이를 지켜온 올드팬일 것이다

[1편] 최동원은 왜 MLB에 가지 못했나
[2편] 슬픈 미션, 최동원의 MLB행을 막아라! 
[3편] 철완 최동원? 옵션의 희생양이었다.

[3편에 이어]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 대한민국은 ‘일본에 이어 아시아 2번째 올림픽 개최국’이라는 자부심에 취해 있었고, 당장에라도 선진국이 될 것처럼 들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사내. 오직 최동원만은 올림픽 열기를 느낄 수 없었다. 반대였다.

최동원은 이해 6월 하순까지 연봉 협상 문제로 롯데와 대립각을 세운 통에 사직구장 마운드를 한 번도 밟지 못했다. 올림픽을 즐길 여유가 있을 리 만무했다. 가까스로 연봉 협상이 타결되며 후기리그부터 마운드에 올랐지만, 상처는 컸다.

이해 최동원은 7승 3세이브 3패 평균자책 2.05를 기록했다. 이전 최동원의 성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전해보다 승수가 7승이나 떨어진 건 ‘구위’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나이 탓도 아니었다.

그는 구단과의 기나긴 다툼 끝에 전기리그를 송두리째 쉴 수 밖에 없었다. 그 바람에 후기리그에만 출전하며 16경기에 등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등판 기회가 적다 보니 그만큼 승수가 떨어진 건 당연했다. 여기다 후기리그 복귀 전까지 주로 개인훈련만 한 터라, 당시 최동원은 ‘실전용’ 몸이 아니었다. 속구 구위가 예년만 못했던 것도 훈련량 부족 탓이 컸다.

그러나 세간의 평가는 가혹하리만치 냉정했다. 생전 최동원은 “돈과 명예는 둘째 치더라도 기다렸다는 듯 쏟아져 나온 ‘최동원도 이제 한물갔다’ ‘역시 자기밖에 모르는 선수’라는 평가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며 “알만한 야구관계자들까지 ‘어이, 동원이. 20승은 고사하고, 10승도 못 거뒀다는 게 말이 돼. 자네도 슬슬 은퇴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야?’하면서 날 퇴물 취급했다”고 회상했다.

정규 시즌이 끝나고. 최동원은 잠시 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최고 투수’라는 타이틀도 함께 반납한 채 격동의 중심으로 뛰어들었다. 바로 ‘프로야구 선수협의회(선수회)’ 창설이었다.

초대 선수회 회장으로 뽑힌 최동원, “선수는 구단의 소모품이 아니다.”

1988년 대전 유성에서 열린 선수회 창립총회 광경(사진=고 최동원)

1988년 9월 13일 충청남도 유성 온천장 호텔. 평소 관광버스가 즐비한 주차장에 서울, 대전, 인천, 대구, 부산, 광주 번호판을 단 자가용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차에서 내리는 이들도 일반 관광객이 아니었다. 그들은 TV에 자주 나오는 유명 프로야구 선수들이었다.

플레이오프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이들이 유성까지 내려온 이유는 ‘프로야구 선수협의회’을 발족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선수회 창립총회에 참석한 프로야구 선수들은 “‘선수 상호 간의 친목과 복지’를 위해 선수회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다”고 말했는데, 이날 회의 시작 전 배포된 회칙에도 ‘선수회는 회원 상호 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경조사에 공동 참여하며, 연금 제도를 개발하여 은퇴한 회원의 복지 증진에 주력하고 나아가 한국 프로야구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선수들은 선수회 창립총회에 앞서 회칙을 통과시키는 한편 회장단 선출 투표에 들어갔다. 무기명 비밀투표로 진행된 회장 선거엔 최동원(롯데), 이광은·신언호(MBC), 장효조·이만수(이상 삼성), 김성한·선동열(이상 해태) 등이 후보로 추천됐다.

이날의 하이라이트였던 회장 선출 투표는 최동원의 압승으로 끝났다. 최동원은 총투표수 141표 가운데 56표를 얻어 30표와 15표에 그친 이광은, 장효조를 제치고 선수회 초대 회장에 당선됐다.

최동원의 당선은 예정된 결과였다. 선수회 결성을 계획하고, 주도한 이가 다름아닌 그였기 때문이다. 김용철 전 롯데 감독은 “(최)동원이가 선봉장이 돼 선수회를 조직했다”며 “동원이가 없었다면 선수회 발족도, 지금의 선수협(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평했다.

사실이다. 최동원은 1988년 8월 초부터 은밀히 각 구단 고참 선수들과 접촉했고, 이때마다 선수회 필요성을 역설했다. 선수들은 ‘슈퍼스타’ 최동원이 앞장서 선수들의 권익 수호와 복리 증진을 외치자 흔쾌히 동참을 약속했다. 선수들의 반응이 호의적이자 최동원은 8월 중순부턴 이모부였던 이택규 변호사와 몇몇 야구해설가를 찾아가 자문을 구했고, 체육부와 노동부에 선수회 결성 적법성 여부 및 활동 한계 등을 질의하는 등 치밀한 준비를 이어갔다.

이때 최동원에게 절대적 도움을 준 이들이 가족이었다. 아버지 최윤식 씨는 아들이 선수회 결성을 위해 고군분투하자 모 회사 사우회 회칙을 얻어 이를 참고해 직접 선수회 회칙을 만들었고, 최동원의 동생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총회장 입구 경비를 맡았다. 총회에 소요되는 경비도 전액 최동원이 부담하며 선수들은 최동원과 그의 가족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사함을 나타냈다.

26년 전의 발족이었지만, 당시 선수회는 지금의 선수협과 큰 차이가 없을 만큼 선진적인 운영을 계획하고 있었다. 우선 선수회는 ‘KBO(한국야구위원회)에 등록된 선수’로 회원 자격을 규정해 1, 2군 선수가 차별 없이 선수회에 가입하고, 권익을 보호받을 수 있도록 했다.

집행부 역시 회장 1명, 부회장 1명, 이사 7명(각 구단 선수회 지부장), 대의원 35명(각 구단 5명씩)으로 구성해 전 구단 선수들이 함께 머릴 맞대도록 했다. 여기에 총무와 사무총장을 유급 직원으로 고용하기로 했는데, 이는 선수회 행정력을 강화하려는 조치였다.

‘독립 재정’의 기치를 든 것도 파격적이었다. 최동원은 매달 회원들이 내는 회비 3만 원과는 별도로 굵직한 스폰서를 구해 선수회 재정을 확충하려 했다. ‘선수회에 돈이 많아야 전·현직 선수들에게 더 많은 복지 혜택을 줄 수 있다’는 게 최동원의 생각이었다.

현재 선수협이 유급 사무총장 제도를 두고, 스폰서 발굴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도 독립 재정을 위한 몸부림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6년 전. 최동원은 이미 ‘독립 재정’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롯데 레전드인 김용희(사진 왼쪽부터), 김용철, 최동원, 유두열(사진=롯데)

선수들의 열성적인 참여와 선진적인 조직 형태를 갖췄지만, 이날 창립총회는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됐다. 이유가 있었다. KBO와 구단들의 반발 때문이었다.

구단들은 선수회 결성 움직임을 포착했을 때부터 ‘절대 불가’를 천명했다. 구단들은 “몇몇 선수가 ‘선수 상호 간의 친목과 복지’를 내세워 친목 모임을 만들 것처럼 움직이는데, 실제론 노동조합을 염두에 둔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다”며 “구단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지금. 만약 선수들이 노동조합을 만든다면 이는 프로야구 공멸로 이어질 수 있음을 명심해야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따지고 보면 구단들은 5년 전에도 똑같은 소릴 했다. 1984년 1월. 몇몇 선수가 주축이 돼 6개 구단 선수들이 모두 참가하는 선수회를 만들려 했다. 당시에도 선수들이 내건 선수회 결성 목적은 ‘선수 상호간 친목 도모와 복리증진’이었다. 그러나 정작 선수들이 선수회 결성을 통해 얻어내려고 한 건 ‘구단과의 대등한 위치’였다.

1982, 1983년 프로야구를 경험한 선수들은 말만 프로야구 선수지, 구단 방침과 요구를 일방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했다. 특히나 선수들에게 좋은 성적만을 강요할 뿐, 야구 인프라 확충·부상 및 재활 시스템 개선·연금 시행 등엔 전혀 관심 없는 구단의 태도에 큰 실망감을 나타냈다. 이에 선수들은 ‘6개 구단 선수들이 뭉쳐 한 소리를 내자’고 결의했고, 마침내 ‘(가칭) 한국 프로야구선수 친목회’ 결성에까지 이르렀다.

선수들은 ‘노동조합’이라는 말만 들어도 빨간색 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구단들을 의식해 ‘노조로 발전할 계획은 전혀 없다’는 전제를 달고서 선수 상호 간 친목 도모와 야구 보급을 위한 소년야구 지원, 보육원·양로원·전방부대 위문을 통한 사회봉사활동 전개 등의 활동 계획을 발표했다. 덧붙여 ‘10년 이상 현역으로 뛴 선수들이 은퇴할 때 미국,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처럼 종신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며 획기적인 연금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구단들은 “선수회가 결국 노조로 변질할 것”이라며 “선수회 결성을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고 목소릴 높였다. “선수들이 누차 “노조가 될 생각도, 노조로 변신할 계획도 없다”라고 항변했지만, 원체 구단들의 반발이 심해 결국 선수회는 발족하지 못했다.

1988년 구단들이 5년 전과 똑같은 레퍼토리로 선수회 결성에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강한 어조로 불가 방침을 밝히면 선수들이 5년 전처럼 선수회 결성을 포기하리라 내다본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선수들은 “또다시 선수회 결성에 실패하면 영원히 선수들의 구심체를 만들 수 없을 것”이라며 “구단들이 어떤 압박을 가해도 반드시 선수회를 결성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흥미로운 건 선수회 창립총회가 열리자, 정작 반발해야 할 구단들이 침묵을 지켰다는 것이다. 구단들은 선수회 창립총회 정보를 입수하고도 적극적으로 방해하지 않았다. 잠자코 지켜볼 뿐이었다. 총회가 끝났을 때도 직접적인 탄압에 나서지 않았다. 그저 자기 팀 대의원이나 이사를 통해 선수회 창립 목적을 묻거나 선수회 회칙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이렇듯 구단들이 ‘조용한 대응’에 나선 건 시대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다. 1987년 민주화 바람이 불며 ‘노동자 대투쟁’이 전개됐다. 그해 7월부터 9월까지 석 달 동안 3천341건의 쟁의가 발생했고, 사업장마다 노조가 결성됐다. 1년 후인 1988년에도 이 흐름이 계속돼 신규 노조가 4천 개나 생겼으며, 노조 가입자는 70만 명이나 불어났다.

사회적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구단들도 자칫 ‘노조 탄압’이란 인상을 줄까 우려해 적극적으로 선수회 결성 저지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선수들은 ‘선수회의 노조 전환’에도 긍정적인 자세를 취했다. ‘만약 선수회의 앞날이 순탄치 못해 노동조합처럼 될 경우 찬성할 것인가’하는 투표에서 141명 가운데 130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미국, 일본처럼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선수들의 결사체가 조직되며 선수들은 “드디어 우리가 구단의 소모품에서 진정한 파트너가 됐다”며 기뻐했다.

2군 저연봉자의 비참한 현실을 목도한 최동원과 구단들의 반격


젊은 시절 최동원은 많은 여성들로부터 사랑받는 최고 스타였다. 하지만, 슈퍼스타답지 않게 그는 외출할 때도 트레이닝복을 입고 다녔다. 시내에 나갈 때도 청바지나 트레이닝복을 입었다. 보다 못한 김용희가 최동원을 옷가게로 데려가 '신상 옷'을 사줄 정도였다. 그러나 며칠 지나면 또다시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훗날에야 김용희는 그 이유를 알았다. "동원이는 트레이닝복을 입으면서 자길 관리하려한 것 같다. 아무래도 운동복을 입고 있으면 딴짓을 하기 어렵고, 보는 사람들도 '아, 최동원이 운동 중이구나'하며 오해하지 않을 테니까. 동원이는 정말 자기 관리에 철저한 친구였다."(사진=고 최동원)

여기서 잠시. 당대 최고 슈퍼스타였던 최동원이 어째서 선수회 결성에 나섰는지 살펴보자.

사실 최동원이 선수회 결성에 나선 덴 롯데 영향이 컸다. 최동원은 실업 롯데 시절부터 계약금을 떼이고, 프로 롯데에 입단하고서도 해마다 연봉 협상에서 구단과 마찰을 빚으며 적지 않은 실망감과 회의감을 느꼈다.

1988년 최동원은 선수회 창립총회가 끝난 직후, 하일성 KBS 해설위원과 대담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최동원은 작심이라도 한 듯 이렇게 말했다.

“저를 ‘스타’라고 하지만, 사람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어요. 구단서 ‘쌍시옷’ 써가며 말하는 게 예사예요. 선수도 조직과 힘이 있어야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전 최동원은 기자에게 “구단 전무(단장)란 사람이 의족을 차고 다니는 아버지께 ‘X신 꼴값하네’하는 막말을 하지 않나, 학교 후배라는 이유만으로 내게 욕을 하며 ‘까라면 깔 것이지 뭔 잔말이 많아’하고 화를 내지 않나, 툭하면 기자들을 이용해 날 ‘이기적인 선수’로 몰지 않나,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날 일방적으로 몰아세웠다”고 회상하고서 “나보고 ‘슈퍼스타’라고들 했는데, 슈퍼스타인 내가 이토록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할 정도면 다른 선수들은 오죽했겠느냐”며 “선수회는 구단 횡포에 선수들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걸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렇다고 선수회를 ‘최동원의 한풀이’로 보는 건 무리가 있다. 최동원이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선수회를 행동으로 옮긴 직접적 계기는 2군 선수들의 열악한 환경을 지켜보고서였다.

2006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최동원은 “2군 선수들의 연봉을 알고 깜짝 놀랐다”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2군 포수가 내 공을 받아준 적이 있다. 수고했다고 고기를 사줬는데 ‘얼마 만에 먹는 고기인 줄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알고 보니 그 선수 연봉이 300만 원(당시 2군 최저 연봉)이었다. 300만 원으로 야구 장비 사고, 시골에 있는 부모님께 생활비 보내드리고, 동생들 학비 대주면 남는 돈이 없다고 했다. ‘1군이든 2군이든 프로라면 최소한 생계유지는 해줘야 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구단은 2군 선수들을 무슨 낙오자 취급하며 머슴처럼 부렸다. 그때 생각했다. ‘내가 최고 연봉을 받는 것도, 슈퍼스타를 대접을 받는 것도 뒤에서 고생하는 동료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음지에 있는 동료들을 위해 내가 먼저 움직이겠다’고 말이다.”

최동원은 은퇴 이후 생활고로 고생하는 전직 프로 선수들을 보며 연금제도가 얼마나 필요한지 절감했다고 했다. 그리고 선수회를 통해 전체 선수가 하나로 뭉쳐 동업자 정신을 공유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봤다. 그래야 선수들 간 과잉 충돌을 막고, ‘신사적인 야구’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최동원은 불우이웃돕기에 앞장선 야구인이었다

선수회 창립총회가 무사히 끝나자 최동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동원은 선수회 초대 회장 명의로 KBO와 7개 구단에 우편으로 인사장을 돌렸다. ‘선수들이 뭉쳐봤자 얼마나 뭉치겠어’하며 관망하던 구단들은 최동원의 인사장을 받고 내심 놀랐다. 선수회의 조직력이 예상외로 강하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7개 구단 사장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회의 소집을 요구했고, 한자리에 모이자마자 선수회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이때 가장 큰 목소리로 강경 대응을 주장한 이가 바로 롯데 박종환 전무였다.

사실 박 전무는 단장 임무를 수행하던 이라, 사장단 회의엔 참석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각 구단 사장들은 ‘최동원 잡는 매’로 박 전무를 활용할 요량으로, 특별히 회의에 참석하게 해줬다. 박 전무는 세 가지 강경안을 제시해 사장들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사장단 결정 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선수회에 참가한 선수들이나 구체적 활동을 하지 않았어도 회비를 납부한 선수는 내년 연봉 재계약 대상에서 제외한다.

둘째. 선수회와 관련돼 계약하지 않은 선수는 다른 구단에서 절대 데려갈 수 없으며, 만약 이런 선수를 받아들였을 때는 해당 구단과 경기를 하지 않는다.

셋째. 그럼에도 계속 선수들이 선수회를 고집한다면 구단 해체도 불사한다.

7개 구단 사장들은 결정 사항을 즉시 선수단에 전달했다. 구단들은 선수들에게 ‘선수회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선수 부인들을 모아 “남편이 ‘불순 단체’ 선수회에서 활동할 경우 어떤 불이익을 받을지 잘 생각하라”며 협박성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선수회 회장 최동원은 선수들에게 “흔들리지 말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KBO와 구단에도 “선수 상호 간 친목을 다지고, 연금 제도를 시행하자는 게 어째서 불순한 의도냐”고 따지고서 “정 의심되면 선수 대표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구단들은 최동원의 제안에 가타부타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대신 ‘살생부’를 발표했다. 살생부는 ‘뻔히 불이익이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선수회 1차 대의원 회의에 참석한 20명의 선수들에 대한 보복 조치였다. 구단들은 이 선수들과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롯데 - 유두열, 김용철, 최동원, 김민호, 한영준, 김용운, 윤학길
MBC - 신언호, 이광은, 유종겸, 김상훈, 오영일, 김용수, 박흥식
OB - 김경문, 김광수, 박종훈, 김진욱, 신경식
빙그레 - 유승안

구단들의 잇따른 강경책에 선수들은 동요했다. 선수회 이탈자가 속출했고, 대의원과 이사직을 포기하는 선수들도 늘었다. 아예 팀 단위로 선수회에서 탈퇴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1988년 10월 25일. 롯데 선수단은 훈련 재개 여부와 선수회 지부 설립 문제를 놓고 6시간에 걸친 마라톤 토론을 벌였다. 토론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찬반 투표를 벌였는데, 결과는 ‘훈련 재개 찬성, 선수회 롯데 지부 설립 반대’였다.

결국 ‘재계약 불가’ 명단에 포함된 7명 가운데 5명이 탈퇴 각서를 제출했다. 롯데는 선수회 회장이던 최동원에게까진 각서를 요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끝까지 각서 제출을 거부한 이는 누구였을까. 바로 김용철이었다.

김용철은 “선수단 찬반 투표에서 구단이 원하는 결과가 나왔는데 왜 굳이 각서까지 요구하는 것이냐”며 각서 제출에 불응했다.

롯데는 최동원, 김용철 처리를 두고 장고에 들어갔다. 11월이 되자 언론에선 약속이라도 한 듯 최동원 트레이드설이 튀어나왔다. 그 가운데 ‘롯데가 삼성에 최동원을 주고, 삼성이 롯데에 장효조를 주는 1대 1 트레이드를 준비 중’이란 소문이 꽤 설득력 있게 돌았다. 장효조 역시 삼성에선 ‘구단 말을 잘 듣지 않는 선수’로 낙인 찍힌 상태였다.

그때까지도 최동원은 롯데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내다봤다. 최동원의 말을 액면 그대로 쓰자면 “수백만 부산 시민과 롯데 팬들이 버티고 있는데 어떻게 최동원을 버릴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었다.

롯데의 보복과 재기를 위한 몸부림

삼성에서 롯데로 트레이드된 김시진(사진 맨왼쪽)과 롯데 박종환 전무(작고, 사진 맨 오른쪽)가 악수를 나누고 있다. 박 전무는 프로야구 창설에 큰 도움을 준 이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야구 연수를 떠나 선진야구를 배워오기도 했다. 생전 최동원과 극심한 갈등을 빚었던 그는 지인들에게 "동원이가 미워서 그런 게 아니라 당시엔 그렇게 해야하는 게 내 일이었기 때문"이라며 털어놨다고 한다.

1988년 11월 23일. 잠에 빠져 있던 최동원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최동원은 “새벽 6시에 누가 전화를…”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상대는 그가 잘 알고 지내던 기자였다. 그 기자는 최동원의 목소릴 듣자마자 “트레이드로 삼성행이 결정됐는데 현재 심경이 어떠냐”고 물었다.

최동원은 “뭐요? 트레이드요? 금시초문인데요”하며 “오전 10시 30분부터 팀 훈련 시작이니 그때 구단에 가서 정식으로 듣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최동원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 시간 이상 멍하니 앉아 있었다고 한다.

생전 최동원은 “지나친 농담이거나 잘못된 소문을 전달한 것으로 생각했다”며 “그때까지도 롯데가 날 버릴 리 없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팀 훈련 시작에 앞서 구단 사무실을 찾았을 때. 최동원은 구단 고위층으로부터 “일이 그렇게 됐다. 그동안 수고했다”는 짧은 작별 인사를 듣는다.

최동원은 “잠시 공황 상태에 빠졌지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알겠습니다’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회상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길고 길었던 롯데와의 인연 혹은 악연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대의 트레이드’라 불린 롯데-삼성의 트레이드는 롯데 최동원, 오명록(이상 투수), 김성현(포수)이 삼성으로 가고, 삼성 김시진, 전용권(이상 투수), 오대석(유격수), 허규옥(외야수)이 롯데로 가는 3대 4 트레이드로 막을 내렸다.

삼성은 최동원 영입으로 ‘큰 경기에 약하다는 징크스’를 깨고 싶었다. 롯데는 최동원을 내보내며 선수회 사건으로 불거진 팀 내 갈등을 봉합하길 바랐다. 그러나 최동원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트레이드의 설계자’로 박종환 전무를 지목하고서 “선수회 건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그리고 구단 고위층의 개인감정 때문에 이뤄진 트레이드에 따를 수 없다. 절대 부산을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자취를 감췄다.

롯데는 “최동원이 트레이드에 순순히 응할 것처럼 행동했다가 무책임하게 사라졌다”고 비난을 쏟아내고서 “선수회 건에 대한 보복이나 개인감정 때문에 최동원을 트레이드했다는 건 억지 중의 억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동원의 트레이드가 이뤄지고 한 달 뒤. 롯데는 끝까지 선수회 탈퇴 각서를 쓰지 않은 김용철을 삼성에 보내고, 삼성으로부터 장효조를 받는 또 한 번의 메가톤급 트레이드를 강행했다. 김용철 트레이드로 롯데의 ‘선수회 건 보복 차원이나 개인감정 때문에 최동원을 트레이드한 건 분명한 오해’라는 주장은 힘을 잃게 됐다.

당황한 건 삼성이었다. 삼성은 최동원에게 ‘최고 대우’를 약속하며 구단 행사 안내문을 꾸준히 발송하는 등 최동원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1989년 3월까지 최동원이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삼성은 2월분 보류 수당 지급 의사를 밝히기까지 했다.

‘트레이드가 철회되지 않는 한 은퇴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한 최동원은 마산에서 비밀리에 개인훈련을 진행하다 미국으로 날아가 시즌 전까지 머물렀다. 최동원과 절친했던 한 야구인은 “(최)동원이 형이 미국에서 좋아하지도 않던 술을 매일 마신다는 소릴 들었다”며 “한 번은 전화통화를 하는데 ‘어떻게 롯데가 내한테 이럴 수 있노’하며 분노를 토해냈다”고 전했다.

삼성 유니폼을 입은 최동원. 1990년 그는 사진에서 보듯 체중이 10kg이상 증가해 있었다
(사진=삼성)

1989시즌이 5월에 접어들어서도 최동원은 삼성 유니폼을 입지 않았다. 그러다 최동원이 5월 25일에 결혼하며 조금씩 돌파구가 열렸다. 최동원의 아버지 최윤식 씨는 그즈음 삼성 관계자와 만나 아들의 삼성 입단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최동원 역시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복귀 요구’ 전화를 받고서 삼성행을 결심하고 있었다.

결국 최동원은 그해 6월 23일 삼성과 입단 계약을 체결한다. 현역선수 마지막 등록일을 일주일 앞두고서였다. 삼성은 최동원에게 전해 연봉보다 90만 원이 오른 9천만 원을 제시했고, 최동원은 “삼성이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에 오를 경우 최선을 다해 던지겠다”고 약속했다.

1988, 1989년 2년 연속 전반기를 생략한 채 후반기서부터 등장하게 된 최동원은 예상대로 좋은 투구를 선보이지 못했다. 전성기 시절의 불같은 강속구는 온데간데없고, 변화구 각도 눈에 띄게 둔해졌다. 여기다 체중까지 10kg이나 불어 ‘날렵한 최동원’을 기억했던 대구팬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1989년 후반기에 참가한 최동원은 8경기에 등판해 1승 2패 평균자책 2.10을 기록하며 굴곡 많던 시즌을 마감했다. 참담한 성적을 거두자 최동원은 다음 시즌 명예 회복을 노렸다. 시즌이 끝나자 일찌감치 개인훈련에 들어갔고, 삼성 스프링캠프에선 누구보다 열심히 몸을 만들었다. 덕분에 몸무게도 전성기 시절의 체중인 80kg으로 돌아왔다.

최동원은 시대에 맞는 투구 변화도 받아들였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산하 트리플A에서 투수코치를 역임했던 마티 디메리트 코치로부터 스플리터를 전수받았고, 그외에도 새로운 변화구를 익히며 재기를 위해 몸부림쳤다. 최동원은 1990시즌을 앞두고 “유니폼을 입은 이상 절대 팬들을 실망하게 하지않겠다”고 다짐했다.

1990년 4월 11일. 최동원에겐 중요한 날이었다. 바로 ‘친정팀’ 롯데와의 경기에 선발투수로 내정된 까닭이었다. 최동원은 자신을 버린 친정팀을 향해 당시 결정이 잘못됐음을 실력으로 증명할 참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전개됐다.

최동원은 1회 초 김민호에게 2점 홈런을 맞고, 2회에 다시 1실점하며 2이닝도 던지지 못하고 2회 1사에 강판당했다. ‘최고 투수’ 최동원으로선 치욕의 순간이었다. 그를 더욱 초라하게 만든 건 롯데 신인 투수 박동희(작고)의 빛나는 호투였다.

이 경기에서 박동희는 6회부터 등판해 9회까지 4이닝을 던져 1피안타, 1실점을 기록하며 세이브를 따냈다. 특히나 14타자를 상대로 탈삼진을 무려 10개나 빼앗았는데, 이 가운데 6개는 ‘6타자 연속 탈삼진’이었다.

박동희가 시속 151km의 강속구를 뿌리며 화려한 데뷔 무대를 장식하자 언론은 최동원을 ‘지는 해’ 박동희를 ‘떠오르는 해’로 표현했다. 원체 박동희의 데뷔 투구 인상이 강렬해선지 롯데 팬들도 최동원을 그리워하기보단 ‘떠오르는 해’ 박동희의 미래에 더 집중했다.

1990년 4월 12일자 기사. 롯데 박동희의 화려한 데뷔 투구 소식과 함께 하단엔 최동원의 부진을 전하는 기사가 동시에 실려있다

최동원의 롯데 시절 팀 동료이자 경남고 3년 선배인 김용희는 ‘삼성 투수 최동원’의 공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롯데에서 함께 뛸 때 자체 청·백전에서 가끔 동원이 공을 쳐본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동원이 공이 정말 좋았다. 워낙 공이 빠르고, 커브도 날카롭게 떨어져 공략하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1990년 상대 투수로 만난 동원이는 과거의 그 최동원이 아니었다. 속구 구위가 예전만큼 위력적이지 못했고, 변화구도 죄다 밋밋했다. 나도 모르게 ‘우리 동원이가 우짜다 이리 됐노’하며 한숨이 나오곤 했다.”

이해 22경기에 등판한 최동원은 6승 5패 1세이브 5.28을 기록한다. 계속 승수는 떨어졌어도 평균자책은 항상 2점대 이하였던 최동원으로선 5점대 평균자책이 무거운 의미로 다가왔다. 이는 삼성도 마찬가지였다. 삼성은 그해 12월 최동원에게 “재계약이 어렵다”는 의사를 비밀리에 전한다.

1991년 롯데 유니폼을 다시 입을 뻔했던 최동원


영원한 '11번' 최동원

삼성은 최동원에게 ‘재계약 포기’를 통보하고도 대외적으론 “최동원은 우리 선수”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삼성은 최동원을 보류선수, 즉 재계약 대상자로 묶어두고 있었다. 그 이면엔 삼성의 배려가 숨어 있었다.

삼성은 최동원 측으로부터 “명예롭게 롯데로 돌아가고 싶다”는 요청을 받은 터였다. 만약 최동원이 삼성에서 방출돼 자유계약선수로 풀려 롯데 유니폼을 입는다면 ‘백기 투항’의 모양새가 될 게 자명했다. 그러나 트레이드 형식으로 롯데로 돌아간다면 ‘팀 대 팀’의 교환으로 어느 정도 최동원의 자존심을 살려줄 수 있었다. 그래서 삼성은 최동원을 형식상 보류선수로 묶어두던 차였다.

최동원의 아버지 최윤식 씨는 1991년 1월 롯데 구단 사무실을 찾았다. 롯데 민제영 사장과 만난 최 씨는 “동원이가 현역생활의 마지막을 롯데에서 끝낼 수 있게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민 사장이 “알았다”고 답하며 최동원의 롯데행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듯했다.

생전 최동원은 “롯데 최고위층도 ‘OK’ 사인을 내줬다”며 “롯데 복귀를 위해 야간 투구훈련을 진행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최동원의 롯데행은 결국 좌절됐다. 당시 야구계엔 “롯데 강병철 감독의 반대로 최동원의 롯데행이 무산됐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강 감독은 23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동원이 아버지가 날 찾아온 적이 있다”며 입을 뗐다.

“1991년 2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유류파동으로 롯데는 국외 전지훈련을 떠나지 못하고, 부산 해운대에 스프링캠프를 차려놓고 있었다. 하루는 최윤식 씨가 캠프로 날 찾아와 ‘동원이가 롯데로 돌아와 현역으로 뛰고 싶어한다. 지금 열심히 훈련 중’이라고 말했다. 그때 내가 ‘아버님. 우리 현실을 직시합시다’라고 했다. 동원이 아버지가 가만히 계시기에 ‘동원이 나이도 있고, 동원이가 그냥 선수였습니까? 한국 최고의 투수 아니었습니까. 제 생각엔 동원이가 갈 길은 현역 선수가 아니라 지도자라고 봅니다. 삼성에서 은퇴하는 것보다 롯데에서 은퇴하는 게 보기에도 좋고, 동원이한테도 도움이 될 것 같으니 그리하십시다’라고 했다.”

강 감독은 최 씨에게 최동원 은퇴식과 관련한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아버님. 동원이를 개막전 하루만 선수로 등록시킵시다. 개막전엔 사직구장이 꽉 찰 거 아닙니까. 그때 은퇴 경기 겸 은퇴식을 치르고서 일본 롯데로 지도자 유학을 떠나면 안 좋겠습니까. 거기서 1년 정도 지도자 수업을 받고서 귀국하면 얼마나 모양새가 좋겠습니까. 제가 동원이를 위해 적극 노력하겠습니다”

강 감독은 “동원이 아버지가 ‘그건 동원이가 바라는 게 아닙니다. 계속 선수로 뛰길 바랍니다’라고 말하고서 자릴 떴다”며 “그 뒤로 연락이 없다가 2개월간 가량이 흐른 뒤 동원이가 은퇴한다는 소릴 들었다”고 말했다.

23년이 지난 지금. 강 감독은 “당시 동원이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눴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든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동원이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만약 그랬다면 전혀 다른 상황이 연출됐을지도 모른다. 사실 구단도 동원이가 현역으로 돌아오는 것에 대해선 ‘힘들다’는 반응이었다.

동원이가 은퇴를 발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단 사장, 단장과 만나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다 동원이 이야기가 나왔다. 구단 사장님이 ‘만약 동원이가 우리 팀에서 은퇴했으면 은퇴식도 성대하게 치러주고, 국외 지도자 연수도 보내줬을 텐데 참 아쉽네’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롯데 구단과 최동원의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롯데도 동원이한테 미안한 감정이 많을 때라, 잘만 이야기를 주고받았으면 동원이가 롯데 유니폼을 입고 지도자로 활약했을지 모른다.”

이상구 전 롯데 단장은 “강 감독이 최동원 감독을 코치로 영입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며 “그러나 최동원 측이 현역을 희망하며 더는 이야기가 진전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어차피 최동원이 두 달 뒤 은퇴를 발표했다면 그전에 어째서 강 감독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냐는 것이다.

생전 최동원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팬들께 항상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1991년은 베스트에서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롯데도 날 원하지 않는 것 같아 고민 끝에 ‘최동원이 몰락하는 걸 보여드리는 것’보단 어느 정도 괜찮을 때 ‘최동원’이라는 이름 석 자를 고이 간직하는 게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 은퇴를 결심하게 됐다.”

사실 최동원도 현역 지속에 대한 욕심은 없었다. 롯데에서 명예롭게 은퇴하길 바랐다. 연봉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 감독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며 오해가 생겼고, 그 오해로 인해 자존심에 상처를 받으며 롯데행을 단념한 것이었다.

최동원은 롯데행이 좌절되자 일본으로 야구 유학을 떠날 계획을 세웠다. 내심 다른 팀에서 뛸 마음이 남았는지 아니면 일본 프로야구에서 뛸 생각이 있었는지 최동원은 그해 3월까지 매일 10km 이상 로드워크를 하며 저녁에도 투구 훈련을 계속했다.

그러던 그해 4월. 최동원은 중대 결심을 하게 된다. 바로 그라운드를 떠나 정치권에 투신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정치에 투신한 최동원. 롯데 복귀 기회가 있었으나 다시 무산

부산시 광역의회 선거에 출마한 최동원의 '선거 포스터'(사진=고 최동원)

1991년은 최동원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해였다. 삼성과 사실상 결별 상태였던 최동원은 롯데행이 좌절되자 일본 유학을 준비했다. 그때 마침 정치권에서 러브콜이 오기 시작했다. 처음 구애를 펼친 건 집권 여당이던 민자당이었다. 민자당은 “최 선수가 김영삼 대통령의 경남고 후배이니 우리당 소속으로 초대 부산시 광역의원 선거에 나선다면 전폭적으로 지지하겠다”며 추파를 던졌다.

그러나 최동원은 민자당의 제의를 거절했다. 대신 야당이던 민주당을 선택했다. 당시 민주당은 3당 합당을 반대한 정치인들이 만든 미니 야당이었다. 당 규모와 지역 정서를 고려할 때 민주당 간판으론 당선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런데도 최동원은 “3당 합당의 부도덕성을 심판하려면 민주당 간판으로 출마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한술 더 떠 최동원은 김 대통령의 정치적 텃밭이던 부산 서구에 도전장을 냈다.

최동원의 둘째 동생인 최수원 KBO 심판위원은 “당시 서구엔 구덕야구장과 경남고가 있어 형의 출마지로 상징성이 있었다”며 “워낙 형의 인기가 좋아 김 대통령의 텃밭이라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회상했다.

최동원은 “룰과 규칙의 중요성이 잘 드러나는 게 운동이다. 룰과 규칙이 존중되는 정치 구조를 만들겠다”며 출마의 변을 밝혔다.

‘깨끗하고 돈 안 드는 선거’를 외쳤던 최동원은 선거운동 기간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최 심판은 “우리 가족 빼고 선거 운동원이 6, 7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 6, 7명도 내 친구들이나 학교 후배들이었다”며 “지금 생각해도 운동원이 태부족해 참 힘든 선거였다”고 기억했다.

최동원은 마운드 위에서처럼 투혼을 불살랐다. 그러나 결과는 낙선이었다.

최 심판은 “형은 어렸을 때부터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며 “정치에 입문한 것도 그런 성향이 작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최동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현역 시절에도 늘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고, 그 도전이 성공할 때 쾌감을 느꼈다”며 “광역의회 선거에 나간 것도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차원이었다”고 설명했다.

물론 ‘선수회 파동’으로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던 아픈 기억이 정치 투신에 큰 영향을 준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최동원은 “구단들의 탄압으로 선수회가 와해하고, 중심 선수들이 차례로 보복당하는 걸 보면서 ‘야구계의 모순이 곧 우리 사회의 모순’이라는 걸 깨달았다”며 “야구판이 변하려면 정치판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현실적 결론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최 심판은 “만약 그때 형이 당선됐다면 형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운명은 최동원이 다른 인생의 궤도를 도는 걸 원하지 않았다.

2010년 '날려라 홈런왕'이란 프로그램에 출연할 때의 최동원(맨 뒷줄 왼쪽). 공개 테스트에서 뽑힌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장면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선거에서 낙선한 최동원은 방황하기 시작한다. 그는 한동안 야구계를 떠나 방송 예능인으로 살았고, 야구계로 돌아온 이후엔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2000년이 다가오도록 그라운드 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구단들은 ‘최동원’하면 강성 이미지를 떠올렸고, 그에 대해 ‘다루기 까다로운 야구인’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구단도 최동원을 지도자로 영입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2000년이 되자 1991년에 이어 다시 롯데 복귀 기회가 찾아왔다. 이상구 전 롯데 단장은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2000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즈음 최 감독이 방송 활동도 뜸하게 할 때였다. 하루는 내게 연락이 와 ‘롯데에서 지도자를 한 번 했으면 좋겠습니다. 조동래 구단주 대행님을 만나뵐 수 있을까요?’하고 물었다. 마침 구단주 대행이 최 감독의 경남고 대선배고, 야인으로 있던 최 감독을 안타까워하고 있던 차라, 자연스럽게 만남이 성사됐다.”

최동원과 조 구단주 대행의 만남은 양측이 양보한 결과였다. 최동원은 자존심을 꺾고 ‘친정’ 롯데를 찾은 터였고, 조 구단주 대행은 사장 시절 최동원과 불협화음을 빚던 과거를 잊고 그와의 독대를 받아들인 터였다. 이 전 단장은 최동원의 롯데 복귀를 예상했다.

그러나 결과는 ‘무산’이었다.

“최 감독이 사무실에 나가자 조 구단주 대행이 날 불렀다. 짐짓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동원이가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 같다’고 했다. 무슨 소린가 했더니 구단주 대행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조 구단주 대행은 최동원이 “열심히 선수들을 지도할 테니 저를 코치로 써주십시오”하며 저자세로 나올지 예상했다. 그러나 최동원은 “제가 지도자 생활을 하면 롯데에서 해야지 어디서 하겠습니까”하며 당당하게 나왔다. 조 구단주 대행은 이 전 단장에게 “동원이를 코치로 불러줄 데가 어딨나? 아무 데도 없지 않나. 그러면 머릴 숙일 줄도 알아야 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 같다”고 평하고서 최동원과의 만남을 없었던 일로 했다.

이 전 단장은 훗날 최동원이 KBO 경기 감독위원이 됐을 때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 인연으로 2009년 7월 4일 사직구장 시구를 최동원에게 맡겼다. 그것도 롯데 유니폼을 입고 하는 시구였다. 1988년을 끝으로 롯데 유니폼을 입지 못했던 최동원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시구자로 나섰고, 시구가 끝나자 “친정팀 유니폼을 다시 입게 돼 밤잠을 설칠 만큼 설레였다. 시구 시 날 향해 박수를 쳐주신 부산 롯데 팬들을 보고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최동원과 롯데의 오랜 갈등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천국의 그라운드'로 돌아간 최동원

2009년 최동원이 롯데 유니폼을 입고 시구하는 장면. 최동원에게 롯데는 영광과 좌절, 환희와 한을 동시에 안겨준 팀이었다. 그러나 2006년 이후엔 최동원과 화해하며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롯데는 최동원이 세상을 떠나자 물심양면으로 최동원 관련 기념사업을 도왔고, 현재도 최동원 관련 일에 관해선 정성을 다해 돕고 있다. 최동원의 장례를 한화 혼자서 진행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최동원의 유가족들은 "한화와 롯데 프런트분들이 힘을 합쳐 장례가 끝날 때까지 밤을 세가며 도와주셨다"며 "두 구단 관계자분들에게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사진=롯데)

최동원이 현장으로 복귀한 건 2000년이었다. 물론 롯데는 아니었다. 한화였다. 당시 한화 사령탑이던 이광환 감독이 애를 쓴 덕분이었다. 평소 최동원이 야구계를 겉돌던 걸 안타까워했던 이 감독은 2000년 11월 코칭스태프를 개편하며 투수코치로 최동원을 영입했다.

최동원은 지도자 복귀가 결정되자 몹시 기뻐했다. 그의 인생에 ‘지도자’는 처음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투수코치’ 최동원은 롱런하지 못했다. 2001년 한 시즌만 투수코치로 일하고 물러났다. 다시 야인이 된 최동원은 잠시 야구해설가로 돌아갔고, 2004년 12월 다시 현장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때도 그를 받아준 팀은 한화였다.

최동원은 “김인식 감독님이 한화 사령탑으로 부임하며 내게 현장 복귀 기회를 주셨다”고 말했는데, 김 감독은 이후 최동원의 인생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줬다.

2006년 한화 2군 감독으로 승격한 최동원은 후배들 지도에 올인했다. 꼭 한 번은 감독이 되고 싶어했던 최동원은 비록 2군 감독이라도 주변에서 ‘최 감독님’하고 부르는 걸 몹시 뿌듯해했다. 당시 기자와 만난 최동원은 밝은 표정으로 “선수들과 함께 있으니까 마음이 편하다. 내 경험과 기술을 후배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보람이 많다”며 “진작에 지도자가 됐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병마가 찾아온 건 그즈음이었다. 최동원은 “배가 아프다”는 말을 자주 했다. 처음엔 스트레스성 위염인지 알았다. 그러나 병원 정밀진단 결과 대장암 판정이 나왔다. 다행히 암은 초기였다. 최동원은 복강경 수술을 통해 악성 종양을 제거한 뒤 5일 만에 퇴원했다.

당시 최동원은 “병원에서 ‘간단한 수술이라, 오래오래 사시는 덴 아무 지장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며 기자 앞에서 껑충껑충 뛰는 시범을 보여주며 “봤죠? 아무렇지도 않습니다”하고 해맑게 웃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최동원은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를 받고 있었다. 최동원의 둘째 동생인 최수원 심판은 “형이 수술 뒤 일주일에 한 번씩 항암 치료를 받았다”며 “하루는 형이 ‘항암 주사를 맞고 나면 2, 3일간 정신이 몽롱하고, 밥도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말했다.

사실 기자도 최동원을 오해한 적이 있었다. 2007년 한화 2군을 취재했을 때다. 한화의 모 베테랑 선수는 기자에게 “최 감독님이 현역시절 ‘악바리’였던 것으로 아는데, 여기선 가끔 경기 중에 멍하게 앉아 계실 때가 있다. 두 세 번 정도 경기 시작 후에 구장에 도착하신 적도 있다”며 “2군 감독 말고도 따로 하시는 일이 있는 모양”이라고 귀띔했다.

‘지도자 최동원’의 능력을 의심하던 이들이 많았기에 베테랑 선수의 귀띔은 적지 않은 실망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최근에야 알게 됐다. 당시 최동원은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와 싸우고 있었고,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기어이 야구장으로 돌아와 선수들을 지도했다는 것을 말이다. 

사직구장 벽면에 새겨진 최동원 기념비(사진=롯데)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 기자와 만난 최동원은 “투병 사실을 알고 계시던 김인식 감독님의 배려가 없었다면 병원과 야구장을 오가지 못했을 것”이라며 자신에게 처음으로 ‘감독’ 타이틀을 안겨준 김 감독을 “평생의 은인”으로 부르며 감사함을 표했다.

최동원은 자신의 암 수술을 아내와 김 감독을 제외하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가족에게도 숨겼다.

최 심판은 “원체 자존심이 강한 양반이라, 자신이 암 수술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걸 창피해했다”며 “혹여 어머니가 아시면 불효를 범하는 것이라 생각해 동생들이 알았을 때도 단단히 입단속을 시켰다”고 회상했다.

한화 2군 감독으로 있으며 최동원은 조금씩 원기를 찾았다. 그래도 야구장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그땐 운동도 자주 했다는 게 지인들의 기억이다.

그러나 2008년을 끝으로 한화 2군 감독에서 물러나며 최동원은 또 다시 야인이 된다. 기자가 최동원을 자주 만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MBC SPORTS+에서 방영하던 ‘날려라 홈런왕’이라는 프로그램에 최동원은 리틀야구팀 감독으로 출연했다. 기자도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사실 그때 최동원은 다시 암과 싸우고 있었다. 병원에서 “거의 완치됐다”고 진단했던 암은 뼈로 전이된 상태였다. 최동원은 다시 수술대에 올라 암을 제거했다. 그러나 한사코 “항암 치료는 하지 못하겠다”고 버텼다. 기자의 생각엔 항암 치료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날려라 홈런왕’에 출연하던 야구소년들을 지도하는 걸 그만두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게 그는 투병 때문에 2년 전 자신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감독직에서 물러난 아픈 기억이 있었다.

최동원은 항암 치료를 거부한 채 민간 대체요법에 매달렸다. 산에 들어가 좋은 공기를 마시며, 몸에 좋은 먹거리를 찾아 전국을 돈 것도 그때였다. 처음엔 호전되는가 싶었다. 그러다 자꾸 살이 빠지고 컨디션이 좋지 않아지자 병원을 찾았고, 의사는 얼음처럼 냉정한 진단 결과를 설명했다.

“‘현재 시점에선 수술이 힘들다. 항암 치료가 대안인데, 환자분이 매우 힘들어하실까 봐 걱정’이라고 했다. 형은 앞으로의 일을 예상한 듯 항암 치료를 사양하고, 천천히 인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최 심판의 증언이다.

경남고-군산상고의 '레전드 리매치'에 참가한 최동원. 무척 수척해진 그를 보고 많은 야구팬이 깜짝 놀랐다. 최동원은 이때 이미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있었다

2011년 7월 22일. 최 심판은 무심코 TV로 눈을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집에서 요양 중인 것으로 알았던 형이 유니폼을 입고 목동구장에 나와 있던 것이었다. 그날 최동원은 목동구장에서 열리는 경남고-군산상고의 ‘레전드 리매치’에 경남고 대표로 참가한 터였다.

“난 형이 ‘레전드 리매치’에 참가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거기다 형 상태가 이토록 악화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불과 이틀 전까지 ‘몸 관리 잘하고 있다. 걱정하지 마라’고 했던 형이었다. 그런데 TV에 나오는 형은 동생인 내가 봐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야위어 있었다. 경기가 끝나고서 안타까운 마음에 형수님께 ‘아니 형수님. 형이 왜 저런 모습으로 나가시도록 두신 거예요. 그래도 최동원 이름 석 자로 사신 양반인데’하며 하소연했다. 그랬더니 형수가 뭐라고 하셨는 줄 아나?”

최동원의 투병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던 아내는 남편이 ‘레전드 리매치’에 참가하려 하자 처음엔 만류했다. 그러나 최동원은 이미 경기에 참가하려고 아내 몰래 그 아픈 몸을 이끌고 손수 차를 몰아 병원을 다녀온 터였다. 최동원은 의사에게 “다른 건 필요 없고, 배에 찬 복수만 뽑아달라”고 부탁했고, 복수가 어느 정도 빠지자 경기 출전을 결심하고 있었다. 그래도 아내는 남편을 말렸다. 그러나 남편의 한마디에 더는 만류하지 못했다.

“도련님. 저라고 왜 안 말렸겠어요. 그런데 형님이…그러시는 거예요. ‘유니폼을 입을 수 있는 게 그날이 마지막일 것 같다. 팬들이 날 보고 ’최동원 몸이 안좋다‘는 걸 알게 되셔도 마지막으로 유니폼을 입고 있는 날 그분들께 보여드리는 게 예의인 것 같다’고….”

‘레전드 리매치’가 끝나고 이틀 후. 최동원은 병세가 악화하며 병원에 입원한다. 그때부터 최동원은 암과의 마지막 싸움을 펼친다. 그러나 이때도 최동원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투병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기자에게도 “무리한 다이어트로 몸이 좀 상했다”며 농을 던졌다.

최 심판은 “워낙 자존심이 강하고, 약한 모습을 보여주길 싫어하셨던 분이라, 친한 지인들한테도 투병 사실을 알리지 않으셨다”며 “그 바람에 혼자서 마지막을 쓸쓸하게 정리하고 계셨다”고 회상했다.

대구구장에서 열린 롯데-삼성전에 앞서 고 최동원 감독의 명복을 비는 메시지가 전광판에 뜬 장면(사진=삼성)

단 한 사람 예외가 있긴 했다. 이만수 SK 감독(당시 감독대행)이었다.

평소 최동원과 절친한 사이였던 이 감독은 추석 때면 항상 최동원에게 안부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이번엔 최동원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예감이 좋지 않았던 이 감독은 최동원에게 재차 전화를 걸었고, 최동원의 아내가 전화를 받자 “동원이랑 통화가 안 되네요? 무슨 일 있습니까?”하며 친구의 안부를 물었다.

최동원의 아내는 처음엔 말을 돌렸다. 그러다 이 감독이 계속 묻자 결국 남편이 위중하다는 사실을 알렸다. 추석 전날. 이 감독은 혼자서 병원을 찾아왔다. 마침 최동원 가족이 병실에 있던 터라, 허겁지겁 달려온 이 감독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 감독은 친구 최동원을 보고서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최동원은 이미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늘 강철처럼 강인했던 친구가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가느다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 이 감독으로선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이 감독은 최동원의 볼을 만지며 ‘엉엉’ 울었다. 그리고 연방 “이제 와 미안하다, 동원아. 정말 미안타”하며 자신의 가슴을 쳤다고 한다. 그때 기적이 연출됐다.

“이 감독님이 형 볼을 만지며 울고 있을 때였다. 의식이 없던 형이 가늘게 눈을 뜨는 게 보였다. 그리고서 떨리는 손으로 이 감독님의 볼을 만지기 시작했다.” 최 심판의 기억이다.

이 감독은 다음날엔 아내와 함께 병실을 찾았다. 그리고 다음날에도 혼자 병실을 찾아와 오랫동안 친구의 얼굴을 보다가 야구장으로 돌아갔다. 친구 이만수가 마지막을 지켜준 덕분일까. 최동원은 그날 새벽 눈을 감았다. 향년 53세.

한때 ‘철완’으로 불렸던 최동원이 ‘불멸의 투수’가 되는 순간이었다. 

고 최동원 감독이 잠들어 있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청아공원
(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최동원이 타계하기 두 달 전. 그는 기자에게 아버지 최윤식 씨 이야기를 들려주며 “요즘 들어 자꾸 뵙고 싶어지네”하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최윤식 씨는 최동원이 현역에서 은퇴한 뒤 별다른 사회 활동을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야구이론이 해박하고, 최동원의 매니저와 에이전트를 겸할 만큼 프로 스포츠의 이해도가 높았던 그였지만, 아들이 마운드를 내려오자 그 역시 뒤를 따랐다. 최 심판은 “아버지에게 형은 모든 것이었다. 그런 형이 은퇴하자 아버지께서 많이 허탈해하셨다”며 “집안에서 소일할 수밖에 없던 건강상의 사정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한국전쟁 당시 다리 부상을 당했던 최윤식 씨는 부상이 악화하며 최동원이 중학생일 때 다리 절단 수술을 받았다. 그때부터 무릎 아래에 의족을 차고 다녔다. 지금이야 의족이 많이 좋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재질이 딱딱해 최 씨는 의족을 찰 때마다 절단된 무릎에 양말을 다섯 개씩 끼우고, 의족면에 솜뭉치를 넣고 다녔다. 그래도 저녁이면 무릎에 피가 고여 최윤식 씨는 항상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최동원은 “아버지니까 가능한 ‘투혼’이었다”며 눈시울을 붉히곤 했다.

최동원이 아버지 최윤식 씨 말에 군말 없이 따랐던 것도 그런 아버지의 아픔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생전 최동원은 “내가 중학생일 때 아버지가 수술 이후, 술을 많이 드시기 시작했다. 고통과 좌절감이 그만큼 크셨던 것 같다. 하루는 보다 못한 내가 ‘아버지, 아버지가 술을 끊기만 하시면 제가 아버지가 하자는 데로 다하겠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며 “아버지도 나도 그 약속을 평생 지켰다”고 회상했다.

2003년 최윤식 씨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쯤 두 부자는 ‘천국의 그라운드’에서 그들만의 게임을 펼치고 있을 것이다.(끝)

'불멸의 투수' 최동원은 청아공원에서 영면을 취하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지금껏 최동원 고 한화 2군 감독의 이야기를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고 최 감독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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