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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디빌더 강경원, 그는 누구인가? 1999년 미스터 코리아에 등극한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 보디빌딩의 역사를 쓰고 있는 산 증인이 바로 강경원이다. 약 30여년에 가까운 그의 보디빌딩 인생에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다.


바로 IFBB PRO 리그이다. 2013년 IFBB(세계보디빌딩연맹) 산하의 대한보디빌딩협회에서 엘리트 보디빌더로서 20여 년간 유지해 온 선수생활을 넘어 새로운 무대로 진출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동안 수많은 시간을 간절히 바래오고 준비해 왔지만 기회조차 없었던 꿈의 무대로의 진출 자격을 얻기 위한 도전이었다.


2014년 3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보디빌딩 행사 중에 하나인 아놀드클래식 아마츄어 부문에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프롬 코리아”라는 말과 함께 오버롤(종합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로서 그는 대한민국 보디빌더로서 처음으로 바라고 바래왔던 프로의 자격을 획득한다. 그가 프로를 획득한 아놀드 클래식 대회가 전 세계 17만 이상의 관객이 방문하고 올림픽보다 더 큰 규모로 진행되는 행사인 만큼 이 대회를 통해 대한민국 보디빌더 강경원의 이름은 전 세계로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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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가 프로 자격을 획득하기까지 너무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미 전 세계 보디빌딩인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프로 자격을 획득한 그였지만, 그는 “프로임에도 프로라고 스스로를 지칭할 수 없었다.” 실제로 프로 자격을 상징하는 프로 카드를 받을 수 있는 모든 자격을 갖추었지만 그는 프로 카드를 받을 수 있는 당해에 프로 카드를 받아내지 못했다. 그는 프로 카드를 획득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봤지만, 2014년 12월 말까지도 결국 받아내지 못하고 거진 포기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새로운 도전에 대한 염원이 너무 컸던 나머지, 프로 카드 없이도 새로운 도전을 하겠다고 결심한 그는 미국에서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한국에서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미국행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를 회고해보면 "한국에서의 안정적인 삶도 중요하지만, 더이상 미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이를 더 먹기 전에 미국에서 프로 생활에 도전해 보고 싶었고 올림피아에 나가는 것보다 프로 선수가 되서 미국에서 운동을 해본다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올림피아에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몬스터짐을 통해서 시합을 알아보며, 정신적으로 힘든 부분은 아내의 도움으로 상당 부분 이겨낼 수 있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밀려오는 불안감은 감출 수 없었다. 오전에는 운동을 했지만 오후에는 좀처럼 운동이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응원해주는 가족과 제자들, 한국의 보디빌딩 팬들을 생각하며 다시금 자기 자신과의 승부에 임하게 된다.


2015년 1월 2주차부터 미국의 지역 시합 준비에 들어간 그는, 그해 4월 한국으로 치자면 시대회 정도인 로컬(뉴욕&뉴저지 메트로폴리탄 대회) 시합에 나가 오버롤을 차지하게 된다. 당시 그가 나갔던 대회에 출전했던 다른 선수들이 “왜 아놀드 클래식에서 오버롤을 한 프로가 아마츄어 대회에 나오느냐?”라는 항의를 하였고, 이를 통해 IFBB에서 그에 대한 재고가 이루어 졌고, 그에게 기적 같은 프로 카드가 나오게 된다. 이미 나왔어야 할 것을 뒤늦게 찾아오게 된 셈이 된 것이다.


프로 카드와 이산가족 상봉을 한 것처럼 만난 그는 올림피아 출전을 위한 점수 획득에 박차를 가한다. 때마침 가장 많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시합 중에 하나인 유로파 달라스 시합이 있었고 그 시합에 도전한 강경원은 그 시합에서도 오버롤을 차지하며 올림피아 출전 자격을 얻게 된다. 당시 유로파 달라스에 같이 출전한 강력한 경쟁상대 사미 알 하다드는 IFBB 아시아선수권이나 세계선수권에서 항상 그의 발목을 잡던 중량급의 간판 선수였다. 그런 그를 누르고 프로 무대에서 인정을 받은 강경원은 올림피아를 향한 준비에 임하게 된다.


당시 강경원을 본 세계 보디빌딩 팬들의 반응은 “몸매가 이쁘고 디테일이 잘 산다. 마치 아폴로형 빌더(근육의 미학을 잘 살려서 균형과 아름다움, 섬세함을 잘 강조한 미적 보디빌더)를 다시 보는 것 같다”라고 그를 칭찬했다. 또한, 그들은 “아놀드 슈워제너거의 영원한 라이벌이자 올림피아 2회 우승자인 프랭크 제인이나 숀 레이를 보는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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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원 트레이닝 캠프영상 바로가기


그가 걸어간 길은 너무도 험난한 길이었다. 그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이정인 선수(그레이트짐, 충북 괴산군청)의 말을 인용하면 “모두가 안 된다고 했고, 나 또한 형님의 선택에 있어서 반대하는 마음이었다.”라고 전했다. 실제로 한국 보디빌더 중에 가장 많은 연봉을 받고 있는 선수였고, 보디빌딩계에서 그의 지위와 그동안 꾸려온 생활의 안정감을 모두 포기해야 했다. “개척이 땅”에 가서 보디빌더로서 첫 시합을 나가던 마음으로 프로 무대를 향해 도전해야 하는 그의 입장을 볼 때 여러 가지 걸림돌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프로 무대로 향했다. 그가 대단한 것은 많은 선수들이 프로 무대에 대해서 꿈을 꾸지만 현실적인 부분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아 시도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는 프로 카드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오랜 염원을 이루지 위해 어려운 결정을 한 것이다.


프로 무대로 가서 올림피아 무대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그는 “25살 때, 거의 90%에 가까운 다이어트를 한 적이 있었다. 그 후로 이 정도로 다이어트를 해 본 적이 없는데, 2015년에는 1월부터 계속 그 이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그는 73년생으로 44세를 바라보고 있다. 불혹을 넘은 나이에 20년 전의 다이어트 상태를 연중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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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원 선수 운동 루틴 바로가기


보디빌더로서 다이어트를 해본 사람이라면 저 말의 의미를 알 것이다. 일반적인 다이어트가 아니고 시합 준비를 위한 다이어트 상태를 연중 유지하는 것은 너무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약점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자신의 약점을 보완해야 올림피아 무대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미국에서의 환경은 생각보다 좋지 못했다. 원래 프리웨이트 100%에 가까울 정도로 프리웨이트 위주로 운동을 하지만 머신뿐만 아니라 프리웨이트 기구도 몸에 맞지가 않았다. 운동에 대하여 그는 "한국보다 미국에서 운동을 하면 왠지 좋을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훈련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오히려 미국에서는 갖춰져 있지 않은 것들이 많아서 매우 힘이 듭니다."라고 말했다.


식단에 차이점은 별로 없다고 한다. 닭가슴살이나 소고기를 쉽게 구할 수 있고 소고기 가격이 싸서 한국에서보다 식단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크다고 한다. 다만, 항상 먹어오던 고구마는 얌(YAM)으로 대체해야 했다. 얌(YAM)을 먹어본 사람들은 얌이 고구마랑 많은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것이다. 한국에서 수입된 고구마를 사먹을 수 있지만 비싼 가격으로 인해 비용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무엇보다 불편한 것은 그동안 함께한 왼팔과 오른팔의 부재였다. 한국에서 운동할 때는 이정인, 오창민 선수가 항상 파트너가 돼서 운동을 했다. 말로 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도 이미 원하는 것을 파악하고 파트너쉽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고정된 파트너도 없을뿐더러 하나하나 가르치면서 운동을 해야 했다. 급하게 올림피아를 준비하는 만큼 피로감이 겹쳤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돌아가며 도와주는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았다.


올림피아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고 고국에서 팬들의 기대가 압박을 해왔다. 첫 무대인만큼 좋은 성적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올림피아 사회자인 밥 치케릴로가 “컨디셔닝만 잘하면 TOP 5안에 들겠다”라고 한 것이 기대감을 주었다. 이런 소식은 빠르게 한국 팬들에게 알려졌고 그에게 더 많은 기대감이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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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피아의 시작을 알리는 엑스포가 시작되었다. 평소에 겪어온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계체 후 3일 뒤에 시합까지 기간이 너무 힘들었다. 한국에서는 계체 후 그날 시합을 하거나 그 다음날 시합을 했고 휴식을 취하며 컨디션을 잘 조절하면 되었지만, 이 곳에서는 애니멀 부스에서 사인과 사진 촬영을 해야 했고, "MEET THE OLYMPIAN" 행사장에서 계속 자신의 부스를 지켜야 했다. 3일 동안 넘치는 식욕을 참는 것도 힘들었지만, 모든 과정이 첫 참가자인 그에게는 더욱 부담으로 다가왔다.


PREJUDGING(예선) 무대에 오른 순간, 리바운딩 되지 않은 자신의 몸 상태를 보면서 몸이 받은 스트레스에 대해서 직감했다. 당시 현장에서 “평소 리바운딩 되던 것보다 체중을 올리지 못했다. 준비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너무 받았고 처음 겪은 환경인만큼 지역 대회에서의 시합 체중도 복구하지 못했다. 계체 후 3kg정도 밖에 못 올렸다, 내가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있다.”라고 전했다.


당시 현장에 같이 있던 지인들은 “계체 전에 다른 선수들과 사이즈가 비슷했다. 하지만 계체 후에 시합에 오르기 직전 다른 선수들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라고 표현했다. 그는 자신의 약점이 조금이나마 보완되어 출전한 것에 만족하며 첫 올림피아를 마무리하였다. 현장에 함께한 가족과 동료들이 말을 이어가지 못하자 오히려 위로를 하며 욕심이 나긴 하지만 만족하고 포기할 줄 모르는 승부사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무대에 내려와서 결승이 끝나 순위가 정해진 후에 한 인터뷰에서 “한국 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겨드려 죄송하다. 하지만 이제 첫 도전이기 때문에 앞으로 더 열심히 해서 좋은 모습 보여드릴 것이다. 따뜻한 응원 한 마디 부탁드린다. 아내와 아들에게 미안하다. 나 하나만 보고 미국에 같이 와주었는데, 미국에 와서 1년간 그 흔한 캠핑도 한번 못 갔다. 아들이 한국에서 다니던 학원도 여건상 하나도 보내지 못했다. 지난달부터 풋볼을 시작했는데, 이제 캠핑도 가고 같이 지낼 수 있는 시간을 점차 늘려갈 것이다. 항상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또 감사한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보디빌더 강경원은 누구보다 변함없이 노력하는 대한민국의 대표 수도승이다. 이제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수도승으로서 외로운 길을 걷게 되었지만 한국이든 미국이든 그는 계속 보디빌딩 하나만을 위해 노력하며 살아갈 것이다. 앞으로 그의 염원은 올림피아 무대에서 열심히 활동하여 좋은 성적을 내는 것과 자신과 같은 꿈을 가진 후배들이 현실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교육을 하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멀리 미국에서 후배들을 위한 개척의 터를 가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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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2016년 3월 아놀드클래식에 출전한다. 이제는 아마츄어 부문이 아니라 프로 대회이다. 212 SHOWDOWN의 한 선수로서 선전하는 그의 모습을 기대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올해도 3월 아놀드클래식과 9월 올림피아에서 더욱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대한민국 보디빌딩 팬들의 응원이 필요할 시기이다.


 

MONSTERZYM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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