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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파이트=조형규 기자] 지난 2011년까지 전 세계 종합격투기 밴텀급의 왕좌는 도미닉 크루즈(31, 미국)가 차지하고 있었다. 상대를 거의 농락하다시피 하는 화려한 스텝의 대명사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한 챔피언의 집권을 끌어내린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무릎 부상으로 2011년을 끝으로 2년 넘게 옥타곤에 오르지 못했던 사이 헤난 바라오(29, 브라질)가 왕위를 계승했다. 잠정 타이틀을 무려 두 번이나 방어하고, 유라이아 페이버(37, 미국)에게 공식 1차 방어를 치른 시점에서 바라오를 막아설 파이터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바라오는 랭커들을 차곡차곡 포식해 나갔다. 아무리 봐도 바라오의 상대는 부상을 회복하고 돌아올 크루즈 외에는 딱히 떠올릴 파이터가 없었다. 그렇게 바라오와 크루즈의 꿈의 대결이 벌어질 것만 같았던 판을 보기 좋게 말아먹은 건 바로 루드윅의 지도하에 어느 날 갑자기 뚝 하고 떨어진 TJ 딜라쇼(30, 미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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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여버린 매듭의 시작점, UFN 81 도미닉 크루즈戰

딜라쇼는 처음부터 챔피언급으로 평가받던 재목은 아니었다. 빠른 스피드와 공수 부분에서 좋은 레슬링 스킬을 가지고 있었지만, 타격에서 정점을 찍지 못했다. 그런 딜라쇼 앞에 나타난 드웨인 루드윅 코치는 파이터 인생의 구세주가 됐다.

루드윅은 한계가 명백해 보였던 젊은 파이터에게 자신의 복싱 스킬과 스텝 노하우를 전수하며 순식간에 챔피언 레벨로 조련했다. 자연히 딜라쇼는 자신의 허리에 벨트를 감게 해준 은사 루드윅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갖게 됐다. 결국 딜라쇼는 알파메일을 떠나 자신의 팀을 차리는 루드윅 코치를 따라 팀을 옮겼다. 2015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알파메일을 떠나는 순간부터 딜라쇼에게 불운이 이어졌다. 그는 이듬해인 2016년 1월 18일(이하 한국 시간) 열린 UFC 파이트 나이트 81에서 발목을 잡혔다. 밴텀급 타이틀 3차 방어전 상대는 부상에서 돌아온 크루즈였고, 그 벽을 넘지 못한 채 벨트를 헌납했다.

문제는 이 대결이 그 누구의 손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박빙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경기의 판정 결과는 49-46, 46-49, 48-47이 선언됐는데, 두 명의 저지가 각각 크루즈와 딜라쇼의 손을 들었다. 점수도 3점 차로 완벽한 입장 차이를 보였다. 나머지 한 명의 저지는 1점차라는 굉장히 근소한 점수로 크루즈의 승리에 힘을 실어줬다.

이 2대 1 스플릿 판정은 UFC의 점수 산정 방식과 라운드별 채점 제도에 대한 소소한 논란을 낳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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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엇갈린 승부수···라운드별 채점제와 임팩트 사이에서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관점

크루즈는 대체로 양손을 내려놓고 스텝의 가속을 최대한 살리는 타입이다. 가드에서 리스크가 있지만, 그는 대신 보다 더 자유로워진 하체로 스텝을 밟으며 상대의 공격을 흘리는 데 일가견이 있다. 상대가 아무리 공격적으로 전진해도 유효타를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주로 스탠스 전환과 전진-후진 위주의 스텝을 활용하는 딜라쇼와 달리 크루즈의 스텝은 좌우 방향에 의존하는 경향이 더 크다.

이 흐름 덕분에 딜라쇼는 초반 흐름을 크루즈에게 내줬다. 하지만 3라운드 들어 점차 둘의 공세가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딜라쇼는 자신의 적극성을 최대한 살려 쉴 새 없이 전진을 시도했다.

딜라쇼의 러시를 야속하리만치 피해내는 크루즈의 스텝은 얄미워 보일 정도로 훌륭했다. 하지만 딜라쇼의 공세도 효과는 있었다. 4라운드 들어 딜라쇼의 로킥이 크루즈의 주무기이자 동시에 아킬레스건이기도 한 하체를 괴롭혔다.

킥의 임팩트는 컸다. 5라운드에 접어들자 크루즈는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딜라쇼도 유효타를 많이 허용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타격의 임팩트, 그리고 그로 인해 상대의 전투력 감소가 눈에 띌 정도로 나타났다는 부분에서는 딜라쇼의 로킥이 더 효과적이었다. 그 점을 이지한 딜라쇼는 경기 종료 버저와 함께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듯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나 이 혈투는 결국 크루즈의 2대 1 스플릿 판정승이 선언됐다. 서로 간의 유효타 숫자는 124-125로 박빙이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딜라쇼가 준 로킥의 대미지라는 측면은 크게 산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딜라쇼의 100% 테이크다운 방어율을 깬 크루즈의 태클이 의미 측면에 더 큰 점수가 됐다. 물론 크루즈의 테이크다운 이후에 별다른 공방 없이 바로 스탠딩을 회복한 딜라쇼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라운드별 채점제에서도 완벽하게 수긍하기엔 다소 모호한 판정이었고, 경기의 전체 흐름과 인상을 본다면 되레 딜라쇼에게 손을 들어줄 수도 있는 게임이었다. 그랬기에 딜라쇼는 판정 직후 크게 실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그는 낙관적이었다. 박빙의 승부를 펼쳤고, 자신이 2차 방어까지 해낸 챔피언이었기 때문이다. 딜라쇼는 곧 타이틀을 두고 재경기를 가질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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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딜라쇼, 분노 폭발···“UFC, 더 이상 스포츠 아닌 엔터테인먼트”

시간은 지난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크루즈와의 재대결을 확신하던 딜라쇼는 이를 어필하기 위해 직접 라스베이거스로 가서 로렌조 퍼티타 회장을 만났다. 당시 퍼티타 회장은 딜라쇼에게 “2주 안으로 연락을 주겠다”며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딜라쇼도 이에 만족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온 딜라쇼를 기다린 것은 바로 하락세에 있던 페이버를 크루즈의 타이틀에 도전할 파이터로 낙점 지었다는 소식이었다. 화가 난 딜라쇼는 “UFC는 더 이상 스포츠가 아니다. 엔터테인먼트와 다를 게 없다. 내가 이룬 업적을 UFC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고 분을 잠시 삭인 딜라쇼는 7월에 열린 UFC 200에서 밴텀급 랭킹 2위였던 하파엘 아순사오를 완벽하게 제압하며 자신이 밴텀급 최강자임을 또 한 번 어필했다. 그러나 UFC의 태도는 여전히 미온적이었다. 거기에 챔피언 크루즈까지 합세했다. 실적이라는 명분이 갖추어진 딜라쇼를 향해 크루즈는 “딜라쇼와의 대결은 돈이 되지 않는다. 앞으로는 조제 알도나 드미트리우스 존슨과의 대결처럼 돈이 되는 슈퍼파이트를 하고 싶다”며 선을 그었다.

딜라쇼에게 불리한 상황은 계속됐다. 그 무렵 UFC가 매각된 것이다. UFC를 사들인 4개의 기업 중 WME-IMG라는 회사가 간판을 담당했다. 이곳은 미국 내에서 잘 알려진 엔터테인먼트 전문 기업으로, UFC를 사들임과 동시에 코난 오브라이언, 실버스타 스탤론, LL 쿨 J, 마이클 베이, 애덤 리바인 등 유명 셀러브리티들이 소유권 그룹에 합류했다.

모회사가 바뀌며 UFC의 노선도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WME-IMG는 UFC를 인수하면서 투자한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 대규모 인원 감축을 단행했다. 동시에 최대한 PPV(Pay-per View, 유료방송 판매)를 최대한 많이 팔 수 있는 흥행 위주의 매치업에 집중했다. 명분이 부족하다며 잡음이 있었던 코너 맥그리거와 에디 알바레즈의 라이트급 타이틀전, 마이클 비스핑과 댄 헨더슨의 미들급 타이틀전이 모두 손쉽게 성사됐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딜라쇼의 자리는 없었다. 이는 딜라쇼와 크루즈가 판매한 PPV 수치를 보면 명백해진다. 화끈한 경기를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인지도나 인기가 부족한 딜라쇼가 전면에 나선 UFC 173, UFC 177은 각각 22만 가구와 12만 가구 판매에 그쳤다. 게이트 수익도 볼품없었다.

반면 과거 크루즈가 전면에 나섰던 UFC 132는 35만 가구 판매량을 기록했다. 물론 그 후 부상 공백이 길었고, 복귀 이후에는 넘버링 대회에 주로 코메인 이벤트로 나섰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다. 하지만 분명 흥행에 있어서는 크루즈가 해낼 수 있는 부분이 더 크다. 게다가 크루즈에게는 드미트리우스 존슨과의 2차전이자 슈퍼 파이트라는 잠재적 흥행 기대 요소까지 있다. 흥행을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여러모로 살펴봐도 딜라쇼가 크루즈에게 비빌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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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렌드에 역행하는 파이터···배수의 진을 친 TJ 딜라쇼의 로망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지난 10월 당시 밴텀급 랭킹 6위였던 코디 가브란트가 크루즈의 2차 방어전 상대로 확정됐다. 가브란트는 종합격투기 전적 10승 무패의 떠오르는 신예 파이터다. 특히 9경기를 (T)KO로 끝낸 하드펀처로 임팩트가 크며, 준수한 외모도 갖췄다. 오래간만에 알파메일 체육관이 배출한 스타성 있는 파이터였다. UFC도 그의 상품성을 선택했다.

물론 당시에도 딜라쇼는 여전히 랭킹 1위를 고수하고 있었다. “랭킹 2위인 아순사오까지 꺾고 1위에 있는데 여전히 뭐가 더 부족한지 모르겠다. 더 이상 이런 경기가 부킹 되어선 안 된다”며 다시 한 번 강하게 불만을 터뜨렸다. 하지만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고, 딜라쇼는 또 울며 겨자 먹기로 대신 랭킹 2위인 ‘돌주먹’ 존 리네커와의 경기를 받아들였다.

일단 딜라쇼는 UFC 측에 한 번 더 양보했다. 하지만 동시에 가만히 있지도 않았다. 그는 지난 12월 1일 조르주 생피에르를 필두로 한 종합격투기 선수협회(MMA Athelete Association, 이하 MMAAA)에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명분 없는 매치 메이킹의 개선, 그리고 전 챔피언이었던 자신의 위치에 대한 정당한 존중을 바라며 용기 있게 총대를 멘 것이다.

그에 대한 UFC의 분풀이였을까. 랭킹 1위와 2위의 대결, 누가 보더라도 차기 도전자 결정전의 명분이 확실한 이 경기를 두고 UFC 측은 “딜라쇼 대 리네커 전의 승자가 무조건 타이틀샷을 얻는 건 아니다”라며 선을 그었다. 심지어 크루즈의 타이틀에 도전하는 가브란트도 “내가 타이틀을 얻으면 크루즈에게 한 번 더 재경기 기회를 줄 것”이라고 먼저 선수를 쳤다. 딜라쇼는 UFC와 크루즈, 가브란트까지 3자 모두에게도 안중에 없는 사람이 됐다.

어찌 보면 딜라쇼는 종합격투기의 폭발적인 인기와 성장세에 반비례하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다. 밴텀급 최정상의 파이터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오는 31일 UFC 207에서 예정된 리네커와의 대결에서 승리해도 타이틀샷을 보장받을 수 없는데, 혹여나 패배라도 하게 된다면 상황은 더욱 암울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그에게 소위 말하는 ‘영업’을 강조하고 싶지는 않다. 딜라쇼는 챔피언이라는 ‘명예’보다 대전료라는 ‘물질’의 가치가 더 커진 현 종합격투기 업계에서 아직까지 파이터로서의 자아를 ‘정상’에 두고 있는 선수다. 크루즈와의 재경기를 요구하면서도 “그가 그렇게 돈을 원한다면 이 경기에 10만 달러를 걸겠다. 만약 내가 패배한다면 그에게 내 대전료 전액을 넘겨도 좋다”고까지 말했다. 꽤나 아날로그적인 낭만이 있다. 스스로도 이목을 끌어서 타이틀샷을 얻기보다는, 정당하게 실력으로 다시 챔피언 벨트를 감고 싶은 마음이 클 것이다.

많은 파이터들이 유명세를 얻고, 엔터테인먼트의 측면이 대두되는 현 종합격투기의 트렌드에 역행하는 딜라쇼의 존재는 그래서 흥미롭다. 모두가 ‘돈’을 외칠 때,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구시대적인 로망을 간직한 파이터도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만약 딜라쇼가 리네커전을 또 승리로 장식한다면, 이제는 UFC도 그에게 한 발 양보하는 미덕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사진] ⓒZuffa, LLC
조형규 기자(press@monstergroup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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