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S1.jpg

[엠파이트=조형규 기자] 김동현(35, 부산 팀매드/ ㈜성안세이브)은 UFC에 진출하기 전까지 주로 일본의 딥(Deep)이라는 무대에서 활동했다. 벨트만 없었을 뿐, 김동현은 실질적인 딥 웰터급 최강자였다. 그리고 딥은 그러한 한국인 김동현을 경계했다. 2007년 당시 딥의 웰터급 챔피언이었던 하세가와 히데히코(38, 일본)와 논타이틀전을 주선하거나, 압도적인 경기 내용에도 판정에서 무승부를 선언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리곤 했다.

최두호(25, 부산 팀매드/사랑모아통증의학과)도 마찬가지였다. 딥은 연전연승을 이어나가는 한국인 파이터를 경계했다. 허리디스크 부상으로 출전 불가를 알린 최두호에게 딥은 대회 6일 전 일방적으로 이시다 미츠히로와의 경기를 통보했다. 설상가상으로 계체를 통과하지 못해 라운드별 감점까지 받았다. 다행히 이시다는 그 기회를 살릴 정도로 유능한 선수가 아니었고, 최두호는 1라운드 플라잉 니킥 TKO로 위기를 극복했다.

이처럼 딥이라는 무대는 한국인으로서 알게 모르게 불합리한 결과를 은근슬쩍 내미는 곳이다. 하지만 이 위기를 모두 극복한 파이터들은 UFC 진출이라는 값진 결과물을 얻었다. ‘코리안 좀비’ 정찬성(29, 코리안 좀비 MMA)은 일본에서 센고쿠와 함께 딥을 주전장으로 삼아 WEC로 진출했다. 딥 라이트급 챔피언을 지냈던 방태현(33, 코리안탑팀)도 이를 기반으로 UFC에 안착했다.

정찬성의 팀인 ‘코리안 좀비 MMA’의 에이스 손진수(22, 코리안 좀비 MMA) 또한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가고자 하는 파이터다. 안타깝게도 지난 8월에는 딥의 고질적인(?) 한국인 파이터 견제를 한 차례 당했다. 상대의 복부에 깔끔하게 들어간 니킥이 어이없게 로블로 판정으로 옐로카드를 받아 억울한 판정패를 기록했다. 하지만 경기 내용은 손진수의 일방적인 승리였기 때문에 그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눈은 다시 새로운 타깃을 정조준하고 있다. 오는 12월 17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에서 열리는 딥 케이지 임팩트 2016에 출전해 엔도 다이스케(34, 일본)를 상대한다. 연말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한창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손진수를 코리안 좀비 MMA 체육관에서 만났다.

js4.jpg

■ 손진수를 파이터의 길로 이끈 정찬성 대 레너드 가르시아의 역사적인 1차전

흔히 코리안 좀비 MMA의 선수들을 수식할 때 가장 흔하게 쓰이는 말이 바로 ‘정찬성의 제자’다. 국내 격투계에서 정찬성이 갖는 존재감과 영향력이 크다 보니, 해당 팀의 특출난 선수들에게도 모두 이러한 표현을 먼저 붙여야 관심이 집중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손진수는 유독 특별했다.

“처음부터 격투기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경기 영상 하나가 제 마음을 순식간에 바꿔버렸죠.”

2010년 WEC 48에서 펼쳐진 정찬성 대 레너드 가르시아의 1차전은 전 세계 격투 팬들에게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최고의 MMA 명경기다.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두 파이터가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난타전을 펼쳤다. 이 경기로 정찬성은 단번에 스타 파이터로 발돋움했고, ‘코리안 좀비’라는 멋진 닉네임 또한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었다.

사실 손진수는 과학고 출신으로 이공계 대학 진학을 준비하던 영재였다. 하지만 그는 과학고에서 실패를 몸소 경험했다고 했다. 한 학년 60명이 정원인 과학고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던 학생이었지만,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분야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했다고. 정확히 대학에 진학한 직후 손진수는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고, 때마침 정찬성의 이 경기를 보고 단번에 격투기의 매력에 빠졌다. 

“찬성이 형이 당시 코리안탑팀 소속이었거든요. 그래서 처음 다닌 체육관도 코리안탑팀이었죠. 그렇게 운동을 하다가 2013년쯤에 안와골절을 한번 당했어요. 태클 들어가다가 제 눈을 상대 머리에 부딪혔죠. 그때 얼굴을 부딪힌 상대가 바로 곽관호 선수였는데, 그래놓고 관호 형은 먼저 UFC로 가버리고(웃음)."

"그때 그 부상으로 운동을 한동안 쉬었거든요. 쉬다가 다시 운동을 시작하면서 자연히 코리안 좀비 MMA로 건너갔죠. 공부와 달리 운동은 열심히 하는 만큼 성장하는 게 느껴져서 좋아요. 성과도 따라오는 것 같고요.”

이처럼 손진수는 ‘정찬성의 제자’라는 수식어 중에서도 그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다. 그만큼 서로에 대한 신뢰도 깊다. 형, 동생 할 것 없이 쾌활한 웃음과 붙임성으로 먼저 손을 내민다. “어떻게 보면 형들에게는 버릇없어 보일 수도 있는데···”라며 걱정 어린 어투로 말끝을 흐렸지만, 이미 팀 내 분위기 메이커를 담당할 정도로 이제 그는 코리안 좀비 MMA에 빠져서는 안 될 존재가 됐다.

js3.jpg

■ 판정 논란 딛고 오는 17일 엔도 다이스케와 맞대결···"경기 종료 벨 소리 듣지 못하게 만들겠다"

손진수의 격투 베이스는 MMA 스타일이다. 과거에는 킥복싱이나 레슬링, 주짓수, 태권도 등 다른 종목이나 무술을 수련하다가 종합격투기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종합격투기가 하나의 스포츠로 자리를 굳히면서, 이제는 시작부터 다양한 기술을 습득하는 웰라운드 파이터들이 대세가 됐다.

파이터 손진수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레슬링과 타격, 클린치 싸움, 그라운드 등 다양한 상황에서도 괴리감 없이 부드럽게 넘어가는 유연함이다. 게다가 성장 속도도 매우 빠르다. 다양한 영역에서 영리한 플레이를 펼치는 그의 경기력에 딥의 시라카와 리쿠토, 카기야마 유스케, 오카다 코메이 등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하지만 안타까운 패배도 있었다. 손진수는 지난 8월 '딥 77'에서 밴텀급 타이틀 도전권을 두고 키타다 토시아키(35, 일본)와 맞대결을 펼쳤다. 시작부터 일방적인 싸움이 계속됐다. 3라운드에는 상대를 거의 피니시 직전까지 몰고 갔다. 하지만 경기 종료까지 불과 1분여를 남겨두고 갑자기 시합 중지가 선언됐다. 손진수는 당황했다.

"당시 1라운드에서 키타다의 바디에 니킥을 넣었는데 그게 로블로가 선언이 됐어요. 정말 황당했죠. 아무리 돌려봐도 복부에 맞았는데, 난데없이 로블로라며 옐로카드를 받았거든요. 그런데 경기 종료를 딱 1분 남겨두고 갑자기 중단을 시키더니 또 옐로카드를 주더라고요."

승리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석연찮은 판정이 이어지자 손진수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당시 세컨드를 보던 정찬성 또한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고, 즉시 "경기 재개하자마자 바로 안면에 니킥 난사해"라며 주문을 넣었다. 판정으로 끌고 가지 않도록 제대로 경기를 끝낼 심산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서 이번엔 진짜로 로블로가 들어갔고, 결국 3라운드 종료 메이저리티 판정패가 선언됐다. 

"끝나고 좋게 생각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물론 2015년에도 한 번 패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실력으로 진 거라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경기를 다 이겨놓고도 이런 결과가 나왔어요. 오히려 2~3주 정도 지나면서 후폭풍이 오더라고요."

그러나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손진수는 "1년 넘게 이거만 보고 살았는데 아쉽긴 해요. 그 경기 이겼으면 연말에 딥 밴텀급 타이틀전에 나설 예정이었거든요"라며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다시 무덤덤하게 다음 경기를 준비했다. 마침 최근에 딥 밴텀급 타이틀전을 치렀던 엔도 다이스케와의 경기가 오는 12월 17일 예정되어 있다.

"어차피 딥의 사에키 시게루 대표도 제가 이긴 경기였다는 걸 알고 있어요. 이미 그날 경기가 끝난 후에 12월에 다시 싸울 거라고 이야기해뒀습니다. 엔도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지만 오른손잡이 타격가인데 KO가 없더라고요. 큰 거 한 방만 안 걸리면 괜찮지 않을까요? 지난번 같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이번에는 상대가 경기 시간 종료를 알리는 벨 소리를 듣지 못하게 만들 겁니다."

js5.jpg

■ 일본 무대 고집하는 이유? “가장 큰 꿈은 강한 자와 싸우는 것···최대한 빨리 UFC 가기 위해 딥 활동”

이해할 수 없는 판정이 이어짐에도 불구하고 손진수는 여전히 국내 단체보다 딥에서의 시합을 선호한다.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김동현, 정찬성, 최두호, 방태현 등이 모두 일본 무대에서 활약한 뒤 UFC로 진출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라는 질문을 던졌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손진수는 솔직하게 시인했다.

"제가 일본 무대를 고집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일본 선수들이 굉장히 경험이 많아요. 제가 세 번째 경기부터 20전이 넘는 선수랑 싸웠거든요. 확실히 그런 선수들과 경기를 치러내면 그들의 경험을 제가 흡수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확실히 전적이 많은 선수들이 많고, 그들과 싸워서 이길수록 경험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느껴져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이 운동을 왜 하느냐에 대한 문제인데요. 저는 절대 유명해지거나 돈을 벌기 위해서 종합격투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MMA에서 저의 동기부여는 '더 강한 사람과 싸우는 것'에 있어요. 제 꿈이기도 하고요. 더 강한 사람과 싸우려면 당연히 최고의 무대인 UFC를 가야겠죠? 어떻게 해야 가장 빨리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이 '딥'인 셈이죠."

한가지 위안거리는 현재 딥에서 밴텀급 타이틀전을 바로 치를 수 있는 수준의 콘텐더들이 2~3명 정도로 압축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손진수는 그중 가장 유력한 도전자 후보다. 타이틀전에 나설 선수가 갑자기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바로 당장 대체 선수로 투입돼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다.

덕분에 손진수는 최근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오는 17일 예정된 경기까지 포함하면 올해 총 세 경기를 치른 그는 시합을 많이 뛰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내년에는 목표에 보다 더 빠르게 다가가기 위해 최대한 경기 텀을 타이트하게 가질 것이라고 했다.

"부상만 없으면 한 달에 한 번 뛰는 것도 가능합니다"라는 말을 남기며 웃음을 터뜨린 손진수는 특유의 환한 미소를 지으며 2017년의 행보를 꼭 지켜봐달라고 부탁했다.

"많은 분들이 손진수라는 선수에 대해 거의 모르실 거예요. 하지만 전 아시아권의 그 어떠한 MMA 밴텀급 선수와 싸워도 이길 자신이 있어요. 제 입으로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이제 그 모습을 증명하기 위해 내년부터는 최대한 경기를 많이 뛰려고 합니다. 제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있을 예정이니 관심 갖고 지켜봐 주세요. 응원까지 해주시면 더 감사하고요(웃음)."

JS2.jpg

[사진] 최웅재 작가
조형규 기자(press@monstergroups.com)
[㈜몬스터그룹 몬스터짐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제품 랭킹 TOP 0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