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패전? 그런 게 있을까요?
그러나 때론 구질구질한 승리보다 훨씬 빛나는 당당한 패전이 분명히 있습니다. 자존심이 잔뜩 상한 '코리언 몬스터' 류현진(26 LA 다저스)은 17일(이하 한국시간) 올 시즌 가장 자신을 괴롭히던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이하 디백스)를 5일 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8회까지 단 2안타만 내주는 눈부신 피칭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패전 투수가 됐습니다. 시즌 두 번째로 긴 이닝을 던졌고, 세 번째 2안타 경기를 펼쳤지만 데뷔 후 첫 완투패로 기록됐습니다.

'칠 테면 쳐봐!'와 초반 15구

정확히 5일 만에 다시 만난 애리조나의 커크 깁슨 감독은 똑같은 카드를 빼들었습니다. 전날 콜로라도를 8-2로 완파했던 라인업의 야수 8명 중에 3명을 제외했습니다. 2안타를 친 1번 타자 이튼과 역시 2안타에 데뷔 첫 홈런을 친 신인 데이비슨, 그리고 주전 포수 몬테로를 뺐습니다. 이유는 5일전 류현진에게 10안타 3실점을 안겼던 라인업을 타순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내겠다는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전날과 비교하면 3번 골드슈미트와 4번 프라도를 제외한 7자리가 모두 뒤바뀐 셈이었습니다.

1회초 다저스가 안타와 볼넷을 얻은 좋은 기회에서 디백스 선발 케이힐을 흔들지 못하고 공격을 마친 후 1회말 마운드에 올라 몸을 푸는 류현진의 표정은 굳었습니다. 긴장을 해서 굳어진 것이 아니라 그만큼 각오가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좀 힘이 들어갔나요. 1번 폴락에게 투 스트라이크를 잡고도 볼넷을 내주며 땅을 찼습니다. 2번 블룸퀴스트는 우익수 플라이로 처리해 일단 안정. 그리고 다저스와 류현진의 천적 폴 골드슈미트(애칭 골디)를 만났습니다.

전날 4안타 5타점으로 로키스를 거의 홀로 완파했던 골드슈미트는 류현진과 동갑내기 26세로 이 경기 전까지 3할1리에 32홈런, 114타점을 기록하며 NL MVP를 노리는 강타자. 특히 올해 다저스 상대로 3할7푼9리에 4홈런, 16타점의 맹타를 휘둘렀습니다. (샌디에이고전 .212, 샌프란시스코전 .217, 콜로라도전 .283) 또한 류현진을 상대로 11타수 6안타 5할4푼5리에 3타점을 치며 천적으로 떠올랐습니다. 이날 전까지 골드슈미트에게 내준 안타만 7개로 자이언츠의 헌터 펜스와 함께 류현진이 첫 해 가장 많은 안타를 맞은 타자입니다.

그렇다고 자존심 강한 류현진이 피해갈 리는 없었고 정면 승부를 건 것까지는 훌륭했습니다. 그런데 힘이 잔뜩 들어갔는지 초구에 던진 속구가 약간 높은 코스로 들어갔습니다. 마친 느린 그림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146.5km의 속구가 미끄러지듯 딱 치기 좋은 높이로 날아들자 최근 1주일간 4할8푼의 타율을 과시하던 '골디'의 고강도 방망이도 물 흐르듯 공을 향해 날아들었습니다.
2012년 5월27일 밀워키전에서 144미터짜리 대형 홈런을 터뜨리는 등 제대로 걸리면 새까맣게 공을 날려 보내는 괴력의 골디. 그의 방망이는 정확히 스위트 스폿으로 공을 가격했고 124미터 중월 담장을 가볍게 넘어가는 대형 홈런이 터졌습니다. 33홈런으로 피츠버그 알바레스와 NL 홈런 공동 1위가 되면서 116타점으로 2위 신시내티 브랜던 필립스에 15타점 차로 앞서는 순간이었습니다.

정면 승부의 선택은 대담했습니다.
승부사라면 상대 라인업에서 가장 강한, 그리고 자신과의 대결에서 특히 강했던 타자와 힘으로 맞붙을 배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타이밍이 문제였습니다. 주자가 있을 때 승부를 걸었다는 점과 너무 경기 초반이었다는 점이 아쉬움이었습니다. 시작하자마자 이 홈런으로 0-2로 뒤진 류현진은 올해 허용한 14개의 홈런 중에 초반 15구내에서만 9개째를 맞았습니다. 내년 시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과제 중의 하나인 '초반 징크스 탈피'의 보다 확실한 이유가 제공된 셈이었습니다.

.362 vs. .077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디백스 타선이 류현진을 마음대로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은.
골디에게 2점포를 허용하자 또다시 초반 징크스가 떠오르며 불안했지만 류현진은 4번 프라도를 좌익수 플라이, 5번 힐을 2루 땅볼로 잡고 이닝을 마쳤습니다. 타이밍을 완전히 빼앗은 타구였다는 점에서 디백스 타자들이 거의 받쳐 놓고 치던 지난 경기와는 분명히 다를 것임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커브였습니다. 지난 경기에서는 몇 개 던지지도 않은 커브로 결정적인 안타를 허용한 것 때문에 초반 분위기를 빼앗기는 등 최악이었습니다. 그런데 1회부터 류현진은 또 커브를 던졌습니다, 그것도 아주 적극적으로. 5일전 경기에서 커브 5개를 던졌는데 이날은 20개를 던졌습니다. 대신 훨씬 낙차가 컸고 가운데로 몰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몸으로 파고들거나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예상치 못한 공 배합이었으니 디백스 타자들이 당황할 것은 명백했습니다. 속구의 비율을 47%로 줄인 대신에 체인지업 24%, 커브 20%, 슬라이더 9%를 섞어 던졌습니다. 지난 경기에서는 속구 49%, 체인지업 29%, 커브 6%, 그리고 슬라이더가 16%였습니다. 홈런 직후부터 허둥대기 시작한 디백스 타선은 7회 2사 후에 힐이 볼카운트 1-2에서 커브를 받아쳐 안타를 만들어낼 때까지 19타자 연속 범타로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골디도 두 번 더 만나 모두 외야 뜬공으로 잡았습니다. 힐의 안타 후로도 류현진은 4타자를 다시 연속 범타로 잠재웠습니다.
8이닝 2안타 1볼넷 4삼진에 2실점. 투구수는 100개에 스트라이크가 61개였고 시즌 13승7패에 평균자책점은 3.03이 됐습니다.

이날 전까지 디백스 타선은 류현진을 4번 만나 24이닝 동안에 34안타를 치면서 무던히도 괴롭혔습니다. 성적은 1승1패였지만 평균자책점이 5.48이었고 특히 피안타율은 무려 3할6푼2리였습니다. NL 타격 1위가 애틀랜타의 크리스 존슨으로 3할3푼인데 한 팀이 류현진을 상대로 3할6푼2리라니 일면 어이없는 기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류현진은 바로 그 타선의 같은 타자들을 상대하며 26타수 2안타로 틀어막았습니다. 피안타율은 7푼7리였습니다. 명백한 자존심의 승리였습니다.

< 거포 골드슈미트에게 1회에 허용한 2점 홈런이 끝내 덜미를 잡았습니다. 사진=애리조나 홈피 >

소득이 많았던 패전

이날 다저스의 유일한 득점 역시 류현진에서 시작됐습니다.
싱커볼러 케이힐에 밀려 1회 이후 13타자 연속 범타로 밀리던 다저스. 6회초 선두 타자로 나선 류현진은 2스트라이크 이후에 슬라이더를 참아내더니 4구째 125km의 멋지게 떨어진 커브를 또 참아냈습니다. 케이힐은 돌아서서 땅을 찰 듯하며 기분이 나쁜 것을 역력히 드러냈습니다. 두 가지 이유였을 겁니다. 기가 막힌 커브를 류현진이 참아냈다는 점과 함께 상대 투수에게 그런 승부를 펼치는 데 대해 스스로 자존심이 상한 것입니다. 투수가 타석에 서는 NL에서 상대 투수가 나오면 오로지 강속구로만 승부하던 시절이 그다지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상대 투수와 계속 변화구 승부를 하면서도 심기도 편치 않았는데 좋은 유인구를 참아내자 스스로 감정이 더욱 상한 케이힐은 연속 볼을 던지며 류현진을 걸어 내보냈습니다.
이어 푼토에게 2루타를 맞은 케이힐은 결국 볼넷 두 개를 더 허용하며 밀어내기 1점을 내주고 5⅓이닝 만에 교체되고 말았습니다. 다음 투수 콜멘터가 위기를 잘 막아 결국은 승리 투수가 됐지만 내용면에서는 상당히 아쉬웠을 것입니다.

케이힐은 5⅓이닝 만에 교체된 반면 류현진은 8이닝을 던졌지만 그렇지만 이렇게 잘 던지고도 패할 수 있는 것이 야구.
그러나 이날 류현진의 얻은 소득도 상당히 많습니다. 우선 신인왕이고 3선발이고를 다 떠나서 최근 은근히 그에게 쏠린 의혹의 눈초리를 확실하게 되돌려 놓았습니다. 12승3패 2.91의 호조를 이어가다가 최근 4경기에서 1승3패에 4.01의 성적을 보이자 참 말도 많았습니다. 현장에서도 크게 떠들지는 않았지만 '이젠 지친 것 아니냐?' '이닝과 체력 관리에 들어가야 할 것 같다.' '포스트 시즌을 과연 맡길 수 있겠나?' 등등 수군대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러나 이날 시즌 28차전에서 지난 5월29일 LA 에인절스전에서 완봉승을 거둔 이래 최고의 피칭으로 세간의 눈총과 수군거림을 한 번에 잠재웠습니다. 초반 홈런을 맞고도 그토록 자신을 괴롭히던 타선을 당당하고 압도적으로 막아냈다는 것은 '역시 류현진'이라는 감탄사를 자아내게 했습니다.

그의 시즌은 이미 대성공입니다. 그리고 내년을 위해 무엇을 수정하고 무엇을 보강해야 하는지의 소중한 교훈도 함께 얻고 갑니다. 이제 한 번 내지 두 번 남은 정규 시즌 등판에서 이날 같이 당당한 승부를 보여준다면 포스트 시즌에서는 더욱 힘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사는 espn.com, MLB.com, baseballreference.com, minkiza.com 등을 참조했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37 [민기자 코리언 리포트]12승에 하비를 꺾은 류현진의 살상본능 팀몬스터짐 2013.10.24 932
336 [민기자 리포트]BK에게 조급하기보다 진중한 기대를(2012.01.19) 팀몬스터짐 2013.10.22 934
335 [민기자의 SL리포트]MVP 브런의 금지약물 공방전 팀몬스터짐 2013.10.22 935
334 [민기자 MLB 리포트]벌랜더, 세상에 에이스를 외치다 팀몬스터짐 2013.10.22 936
333 [민기자 리포트]포사다, 양키스와 결별하나 몬짐문지기 2013.09.10 938
332 [민기자의 코리언드림]조용함에 숨겨진 글로버의 야구사랑 몬짐문지기 2013.09.10 939
331 [민기자 SL리포트]그랜더슨-추신수는 가장 저평가된 선수 (2012.12.05) 팀몬스터짐 2013.10.24 939
330 [민기자 리포트]박찬호의 김병현의 루키 시즌 기대 (2012.03.30) [1] 팀몬스터짐 2013.10.22 939
329 [민기자 리포트]인디언스, 로키스 돌풍의 빅리그 4월 몬짐문지기 2013.09.10 939
328 [민기자 칼럼] 2011 MLB 파워랭킹 6주차 몬짐문지기 2013.09.10 940
327 [민기자 KBO컬럼]프로야구 인기하락 현실일까, 일시적일까 (2013.04.24) 팀몬스터짐 2013.10.24 940
326 [코리언 드림 41]16세에 뒤늦게 야구를 시작한 웃음대장 리즈 (2012.09.17) 팀몬스터짐 2013.10.24 943
325 [민기자의 PS 히어로 13]카디널스 벌떼 야구와 라루사 [1] 팀몬스터짐 2013.10.17 947
324 [민기자] 2011 파워 랭킹 13주차 몬짐문지기 2013.09.16 949
323 [민기자 캠프인터뷰]추신수-주사위는 던져졌고 최선을 다할 뿐 (2103.02.21) 팀몬스터짐 2013.10.24 950
322 [민훈기 Players5] NC 이호준, 파란만장 프로야구 20년 이야기! 팀몬스터짐 2013.10.24 951
321 [민기자의 파워랭킹] 파워랭킹 마지막주 (2011.09.30) [1] 팀몬스터짐 2013.10.15 952
» [민기자 코리언 리포트]빛나는 패전과 장하지만 아쉬운 한 방 (2013.09.17) [2] 팀몬스터짐 2013.10.24 952
319 [민기자의 PS 히어로]2. 가야도의 역투와 깁슨 감독의 결정 (2011.10.02) [1] 팀몬스터짐 2013.10.15 958
318 [민기자 WBC리포트]WBC의 성장과 MLB의 속셈 (2013.03.13) 팀몬스터짐 2013.10.24 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