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시즌의 마지막 날, LA 다저스는 샌디에이고 원정 경기로 시즌을 마감했습니다. 박찬호가 18승을 거두며 개인 최고의 시즌을 보낸 그 해 다저스는 86승76패의 성적으로 NL 서부조 2위의 성적을 거뒀습니다.
당시 10월 1일에 열린 최종전을 마치고 샌디에이고의 콸컴스타디움 클럽하우스에서 당시 데이비 존슨 감독과 단 둘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나눈 이런저런 대화 중에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기자가 던진 질문은 당시 소문으로 돌던 감독이 교체설이었습니다. 그는 시니컬한 웃음을 지으면서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하고, 대부분 그 책임은 감독에게 돌아가기 마련이지. 감독은 교체되라고 있는 거니까."라고 담담히 말했습니다.

(다저스 시절의 데이비 존슨 감독. 좌우로 박찬호와 허샤이저를 거느렸습니다. )

돌이켜보면 기자와 감독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데이비 존슨 감독은 그만큼 누구에게나 솔직담백하고 직설적이면서도 또 대단히 인간적이고 담대한 감독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그를 묘사하는 형용사는 늘 비슷합니다. '솔직한, 상식적이면서도 능숙한, 자신만만한, 진실한, 진품인.'
워싱턴 내셔널스의 2루수 대니 에스피노사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존슨 감독에 대해 "그는 클럽하우스에서 매일 매일 똑같은 양반이다. 그가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를 항상 알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겐 큰 도움이 된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늘 한결같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젊은 시절의 데이비 존슨은 꼭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젊음과 패기로 뭉쳤던 시절 그는 대단히 뛰어난 선수였습니다. 텍사스 A & M 대학에서 야구 선수로 활약하다가 1962년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계약한 존슨은 1965년 개막전 2루수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곧 다시 마이너로 내려갔던 그는 1966년 중반부터 주전 2루수로 뛰면서 그 해 신인왕 투표에서 3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볼티모어에서 무려 4번이나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던 존슨은 1966년 시리즈에서 LA 다저스의 전설 샌디 코팩스로부터 마지막 안타를 친 타자로 기록에 남기도 했습니다.
1969년부터 3년 연속으로 볼티모어가 월드시리즈에 나갔을 때 자신도 3년 연속 골드글러브를 받으며 공수에서 맹활약했습니다. 1972년 시즌이 끝나고 애틀랜타로 트레이드된 존슨은 1973년 대폭발하며 2루수로 42개의 홈런을 쳐 전설 로저스 혼스비와 타이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해 존슨은 43홈런을 쳤지만 하나는 대타로 친 것이라 2루수 홈런 기록으로 인정되지는 않았습니다.)
1975년 시즌 4게임 만에 어떤 이유인지 전격 방출된 존슨은 일본으로 건너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2년을 뛰었고, 다시 MLB로 돌아가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시카고 커브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습니다. 1978년 필리스에서는 대타 만루 홈런을 두 차례나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MLB 역대 총 5명)

4차례의 올스타와 각각 3차례의 골드글러브와 월드시리즈 챔피언, 그리고 올해의 재기선수상에 갑작스런 방출과 일본프로 등 질풍노도와 같은 선수 시절을 보낸 존슨은 은퇴 후 1979년 독립리그에서 처음 감독을 맡았습니다. 팀을 대번 우승시키자 메츠 구단은 그를 마이너리그 코치로 영입했고, 마이너 감독을 맡은 첫 3년 내내 그의 팀은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결국 은퇴 후 6년만인 1984년 존슨은 41세의 젊은 나이에 뉴욕 메츠의 감독으로 빅리그에 화려하게 컴백합니다.
운명이란 때론 참 공교롭습니다. 1969년 월드시리즈에서 마지막 타자로 나서 플라이아웃 당하며 메츠의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확정지었던 선수가 바로 볼티모어의 데이비 존슨이었습니다. 그렇게 선수로 분루를 삼켰던 그는 지도자로 돌아와 1986년 메츠 팀 사상 두 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끄는 감격을 맛봅니다. 그렇게 빅리그 감독으로 데뷔해 3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역량을 뽐낸 존슨이지만 그의 감독 생활도 결코 평탄했다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메츠에서 NL 사상 최초로 90승 이상 시즌을 5년 연속으로 이끌었던 존슨이지만 늘 태평하고 느긋한 성격인 그의 스타일은 팀이 흔들릴 때면 곧잘 구단의 타깃이 됐습니다. 1989년부터 메츠는 성적이 떨어졌고 존슨은 구단 수뇌부와 삐걱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90년 시즌 초반 팀이 부진하자 그는 메츠 사상 최다승 감독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해고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2년 넘게 야인으로 지내던 그는 1993년 1993년 6월초 바닥을 헤매던 신시내티 레즈의 감독에 전격 임명됐습니다. 감독으로서의 역량은 신시내티에서도 빛났습니다. 1994년 여름 선수 파업에 돌입했을 당시 그의 팀은 NL 중부조 선두였고, 1995년에도 NL 중부조의 첫 우승은 데이비 존슨의 레즈가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존슨은 1996년 레즈의 감독으로 재계약하지 못했습니다. 괴팍하기로 악명이 높았던 마지 셔트 구단주와 결코 가까이 지내지 못했던 그는 우승을 차지하고도 재계약하지 못한 역사에 남을 감독이 됐습니다. 표면상 이유는 당시 약혼녀이던 수잔과 결혼 전에 같이 산다는 것을 셔트 구단주가 용납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이미 1994년에도 해고당할 뻔했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믿는 이는 없었습니다.

(69세의 나이에 워싱턴 내셔널스 감독으로 복귀한 존슨은 지난달 감독 통산 1200승을 거두며 강팀으로 키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래 쉬지 않았습니다.
휘청거리던 명문 구단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곧바로 그를 모셔갔습니다. 그리고 데이비는 확실하게 감독으로서 '매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1996년 오리올스는 와일드카드로 가을 잔치에 나갑니다. 1983년 월드시리즈 우승 이후 13년만의 포스트 시즌이었습니다. 그리고 1997년에는 AL 동부조 우승을 이끌어냅니다.
그러나 느긋하고 '이지 고잉(easy-going)'이지만 야구에 관한한 철저한 전통주의자이자 원칙이 확실했던 그는 반골 기질을 타고난 인물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늘 선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선수 위주의 야구를 펼치면서 존경받던 감독이지만 구단과는 불협화음이 꽤 있었습니다. 오리올스로 가서도 피터 안젤로스 구단주와는 잘 지내질 못했습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서로 말도 섞지 않을 정도였다는 것이 당시 주변 사람들의 증언입니다.
그러다가 1997년 4월 간판선수이던 로베르토 알로마가 팀 만찬과 친선 경기에 불참하자 벌금을 물리는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생겼습니다. 존슨은 자신의 부인인 수잔이 운영하는 자선단체에 벌금을 기부하라고 지시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이해가 상충됐다는 것이 선수 노조의 판단이었고, 존슨은 자신의 판단 실수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안젤로스 구단주는 자신의 허락도 받지 않은 신중하지 못한 판단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존슨은 사표를 던졌고 구단주를 그것을 수리했습니다. 바로 그날 존슨은 AL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됐습니다. 98승을 거두고 2년 연속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으니 올해의 감독은 그의 차지였지만 바로 그날 존슨은 실직자가 된 것입니다.
그 후 오리올스는 '데이비의 저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존슨이 마지막으로 지휘봉을 잡았던 1997시즌 이후 볼티모어는 단 한 시즌도 승률 5할 이상을 기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또 1년을 쉰 존슨은 1999년 LA 다저스의 감독이 됐습니다. 그리고 감독 생활 처음으로 승률 5할에 미치지 부진을 보였습니다. 다음 해 존슨의 다저스는 조 2위를 차지했지만 구단은 그 성적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박찬호의 승리 경기에서 통산 1000승 고지에 오르는 기쁨을 만끽한 정도가 다저스 시절 그의 즐거운 추억거리입니다.
그 후 빅리그는 데이비 존슨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존슨이 야구를 떠난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2003년에는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고 2004년 올림픽에도 네덜란드 벤치 코치로 출전했습니다. 2005년 야구월드컵에서는 미국대표팀 감독을, 2006년 월드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미국팀 벤치 코치를 그리고 2008에는 미국 올림픽팀 감독을 맡았습니다. 국내 팬들도 당시 한국과 경기에서 끝까지 강공을 고집했던, 일면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데이비 존슨의 야구 스타일을 맛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2007년부터 워싱턴 내셔널스의 단장 자문을 맡았던 존슨은 2009년 WBC에서도 미국 감독이었습니다. 또한, 여름이면 플로리다 대학리그에서 감독을 맡기도 하는 등 단 하루도 야구를 떠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2011년 6월 26일 당시 감독이던 짐 리글맨이 적격 사퇴하자 그는 전격적으로 다시 빅리그의 감독으로 복귀했습니다. 11년만의 복귀였습니다.
그리고 2012년 존슨은 만 69세의 나이에 젊은 팀 내셔널스를 이끌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최근 5연패를 당하며 주춤하긴 했지만 2일까지 14승9패의 성적으로 가장 치열한 NL 동부조에서 여전히 선두에 올라있습니다.

데이비 존슨이 얼마나 대단한 감독인지는 성적이 증명합니다.
적어도 승리를 거두는 데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지난달 23일 존슨은 MLB 사상 38번째로 1200승을 거둔 감독이 됐습니다. 승수로 따지면 38번째지만 그 명감독들의 승률을 따져보면 56.2%의 존슨은 9위입니다. 감독 데뷔한 지 28년째지만 그 중의 절반 가까이는 메이저리그를 떠나있었던 그이기에 '만약 꾸준히 감독을 했었다면 몇 승이나 올렸을까?'는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1200승을 거둔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존슨 감독은 "'어, 왜 이렇게 오래 걸렸지?'라고 혼자 생각했다."라며 "내가 원래 반올림한 어림 숫자를 선호해서 관심이 있기는 했지만 승수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라고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존슨 감독은 수자나 통계의 문외한은 아닙니다. 대학을 다니다 프로 선수가 됐지만 존슨은 초년병 오프 시즌이면 트리니티 대학에서 학점을 이수해 학사를 받았는데 그의 전공은 바로 수학이었습니다. 그는 고집불통의 야구 전통주의자로 알려졌지만 MLB 야구에 수학적인 접근법을 적용한 초기 감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늘 한결같고 변치 않는 데이비 존슨의 야구는 오늘도 워싱턴 내셔널스 팬에게 새로운 희망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다크호스' 정도로 여겨지던 내셔널스는 노장 존슨의 지도 아래 가장 치열한 NL 동부조에서도 강자로 부상하며 있습니다. 지난 2005년 몬트리올에서 옮겨 온 이래 단 한 번도 이루지 못한 승률 5할을 넘어서는 것은 물론 가을 잔치의 꿈을 일궈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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