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미국 출장을 갔을 때 미국 야구계의 큰 화젯거리 중의 하나는 한 마이너리그 싱글A 선수의 홈런이었습니다.
MLB의 스타도 아니고 7,000명이 넘는 마이너리거 중에도 하위 레벨인 싱글A에서 뛰는 이 선수의 홈런이 주요 방송 스포츠 뉴스 시간에 전문가가 분석하고 찬반양론이 엇갈리고 논쟁이 벌어지는 핫 이슈였습니다.
물론 그 선수가 MLB의 미래를 짊어질 것으로 큰 기대를 모으는 브라이스 하퍼(18)였고, 그가 보여준 치기와 미성숙한 행동이 많은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

(차세대 슈퍼스타로 기대를 모으는 브라이스 하퍼는 최근 싱글A 경기 중 홈런 후의 치기어린 행동으로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작년 드래프트에서 워싱턴 내셔널스에 전체 1번으로 지명되며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은 지 정확히 1년 1일 후인 지난주 초. 싱글A 해거스타운에서 뛰는 하퍼는 그린스보로와의 경기에서 시즌 14호 홈런을 터뜨렸습니다. 56경기에서 42타점째를 올리는 활약,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하퍼는 홈런을 친 직후 방망이를 약간 과도한 동작으로 던지고는 곧바로 운동장을 돌지 않고 잠시 날아가는 공을 지켜봤습니다. 상대 투수 잭 닐은 당연히 불쾌감을 표시했습니다. 그러자 천천히 다이아몬드를 돌아 거의 홈플레이트까지 조깅한 하퍼가 닐에게 키스를 날리는 동작을 취했습니다.

다른 모든 사회적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야구에도 불문율이 많이 있습니다.
가장 짜릿한 장면을 종종 연출하는 홈런도 마찬가지입니다. 홈런을 친 타자는 감정을 너무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는 것이 기본입니다. 하퍼는 방망이를 집어던진 것부터, 곧바로 1루로 달려가지 않고 공을 지켜본 것, 그리고 마지막에 키스를 날린 것까지 세 번이나 불문율을 어겼습니다.

만약 MLB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어땠을까요?
처음에 방망이를 던진 행위는 상대 팀에서 상당한 불쾌감을 보였을 겁니다. 그렇다고 당장 제재를 가할 정도는 아니지만, 상대 투수와 일부 까칠한(?) 선수는 그 타자에 대한 감정을 입력시켜 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곧바로 베이스를 돌지 않고 홈런 공을 음미하듯 지켜보는 행위에 대해서는 곧바로 다음 타석에서 위협구 내지는 몸을 맞추는 공이 날아들었을 겁니다. 실제로 홈런을 친 다음 타석에서 그린스보로 구원 투수 그랜트 데이튼은 상체 쪽으로 바짝 붙는 패스트볼을 던져 하퍼가 움찔하며 물러났습니다.

마지막으로 키스 세례. 빅리그였다면 분노한 상대 팀 선수들이 모두 달려나오고, 당연히 반작용으로 하퍼의 팀 선수도 더그아웃과 외야에서 달려나와 몸싸움이 벌어졌을 겁니다. 그런 모욕적이고 무례한 행위를 그냥 참고 넘어갈 리는 없으니까요.

아직 10대 후반의 청소년들로 주로 구성된 싱글A 수준이라 프로 경험도 적고, 하퍼라는 그 리그에서는 수퍼 스타가 저지른 짓이라 얼떨결에 큰 사고 없이 넘어갔지만, 야구계에서는 상당히 우려스런 사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미국 언론은 다소 과장되게 소란을 떨며 뉴스 시간에 과연 하퍼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를 놓고 캐스터와 전문가가 토론하기도 했습니다.
소속팀에서도 곧바로 비공개 팀 미팅을 소집하고 하퍼와 선수들에게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말 것을 강력히 경고했습니다. 이번 사건은 하퍼의 더블A 승격에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아무리 야구를 잘해도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면 언제 사고를 칠지 모르니 더 마음의 수련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워싱턴 내셔널스 팬은 곧바로 하퍼를 빅리그로 올리라고 성화지만 이번 사건으로 그의 빅리그행은 조금 더 늦어질 수 있습니다.

과거에도 이런 사건은 반복해서 발생했습니다.
지난 2009년 9월 카디널스의 알버트 푸홀스는 파이어리츠전에 대타로 나서 맷 캡스를 상대로 홈런을 쳤습니다. 그리고는 과장된 동작으로 방망이를 집어던지더니 캡스를 잠시 노려보기까지 했습니다. 알고 보니 시즌 초에 캡스에게 옆구리를 강타당한 적이 있어서 감정의 앙금이 남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변명에 불과하고 푸홀스의 행위를 자칫 화를 자초하는 것이었습니다.

푸홀스는 과거에도 유사한 사건을 벌였습니다.
지난 2006년 4월 역시 피츠버그와의 경기에서 올리버 페레스에게 홈런을 친 푸홀스는 방망이를 하늘로 던져 무지개 곡선을 그어댔습니다. 그 동작은 페레스와 상대 선수는 물론 팀 동료의 얼굴까지 찌푸리게 하였습니다.
경기 후 질문을 받자 푸홀스는 전 타석에서 페레스가 자신을 삼진으로 잡은 후에 과도하게 제스처를 취하면서 '야구에 대한 존경'을 무시하는 행위를 해서 경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페레스의 무례'에 대해 푸홀스는 '또 다른 무례'로 답한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마무리를 말끔했습니다. 푸홀스는 "명백한 나의 실수였다. 그저 아주 뜨거운 물건을 잡은 것처럼 곧바로 방망이를 떨어뜨렸어야 했다."라는, 인구에 회자하는 코멘트를 남겼습니다.

이런 불문율은 야구의 전통을 이어가는데 대단히 소중한 자산입니다.
여러 가지 불문율의 기본은 상대에 대한 예절과 배려와 그리고 큰 틀에서는 동료 의식의 발로입니다. 홈런은 경기의 일부일 뿐이고, 당연히 친 타자와 팀과 팬에게는 기쁜 일이지만 상대 투수에게는 아픈 경험입니다. 적당한 선에서 즐김을 끝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선이라는 것이 사실 매우 까다롭기는 합니다.)
하퍼 사건에 접한 왕년의 홈런왕 마이크 슈미트는 빅리그였다면 곧바로 난투극이 벌어졌을 것이라며 "처음 홈런을 친 사람처럼 행동하지 말고 늘 홈런을 치는 것처럼 무덤덤하게 행동하라."라고 조언했습니다.
이번 사건은 하퍼와 그리고 그의 팀 동료에게 교육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고 워싱턴 구단 자체적으로는 평가하고 있습니다. 알렉스 로드리게스 이후 가장 뛰어난 타격 재질을 지녔고, 50홈런의 잠재력을 지녔다는 이 18세 선수도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우는 계기가 됐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나라마다 문화가 다르듯이 야구 역시 다릅니다. 한국 야구와 미국 야구와 일본 야구는 똑같은 규정에 따라 똑같은 운동장에서 똑같은 장비를 가지고 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확실하게 차이를 보입니다. 옳고 그름을 가를 수 없는 차이도 있고, 이왕이면 유사하게 갔으면 하는 차이도 있습니다.

국내 프로야구를 보다 보면 홈런을 치고 난 후의 타자의 행위에 대해서 가끔 다시 생각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방망이를 멋지게 집어던지고, 동작을 멈추고 담장을 향해 비행하는 공을 쳐다보는 것이 '쿨'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늘 치는 홈런인데 대순가' 하며 방망이를 툭 떨어뜨리고 지나치게 느리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빠르지도 않게 운동장을 돌아 무심하게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더 '쿨'할 수도 있습니다.
가끔 끝내기 안타가 나왔을 때도 비슷합니다. 승리의 축하는 당연히 할 자격이 있습니다. 팬과 공유하는 기쁨의 순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운동장에는 패한 상대 팀 선수와 상대 팬도 함께 있습니다. '우리가 승리했으니 우리 맘껏 즐기면 그만'이라고 주장하면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만.

많은 선수와 팬에게 존경을 받았던 존 오츠라는 감독이 있었습니다. 야구의 전통과 불문율에 대해 철저했던 그는 "당연히 승리는 거두는 법인데 그것이 지나치게 흥분하거나 과도하게 축하할 일인가. 승리를 거두고 그리고 집으로 가면 그만이다. 원래 따라야 하는 전통과 방식에 의해 야구를 열심히 하면 그것이 전부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가 암으로 사망한 후에도 야구계는 오츠와 그의 야구관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야구에 대한 존경과 존중, 그리고 상대에 대한 배려와 예절 등이 너무 퇴색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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