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다저스타디움의 기자실은 '빈 스컬리 프레스박스'로 명명돼 있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다저스 출입기자로 매일 그곳에서 특파원 생활을 하던 시절 이 분이 기자실에 들어오면 자동으로 그 존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마치 커다란 스피커를 통해 스테레오 음향으로 울려 퍼지듯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기자실과 기자 식당에 울려 퍼졌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벌써 15년도 더 지난 일입니다. 그런데 빈 스컬리(Vin Scully)씨가 내년에도 다저스의 중계를 한다는 소식이 얼마 전 외신에서 전해졌습니다. 15년 전에 다저스의 중계를 담당했던 분이 내년에도 중계 마스크를 쓴다는 것이 무슨 특별한 일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내년이면 이 분이 처음 다저스 경기를 중계하기 시작한 때부터 64년째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리고 빈 스컬리는 내년에 만 86세가 됩니다.

< 자신의 이름을 딴 다저스타디움 기자실 앞에 선 스컬리 >

당초 스컬리는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했습니다. 이제는 뒤늦게나마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달 말에 다저스가 아드리안 곤살레스와 조시 베켓, 칼 크로포드 등을 받는 초대형 트레이드를 성사시키자 강팀으로 변신해 내년에도 우승을 노릴만한 전력이 됐다며 1년 더 마이크를 잡겠다는 결심을 한 것입니다.
스컬리는 특히 경기 진행을 하는 캐스터와 해설자의 역할을 모두 맡아서 혼자 중계를 하는 '원맨쇼'의 대가여서 더욱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LA 다저스의 중계는 국내 프로야구 중계와는 조금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대부분 팀이 해설자와 캐스터 콤비로 가는 반면에 다저스 중계 팀은 혼자서 이 역할을 다 해냅니다. 그렇지만 9이닝을 혼자 다 하는 것은 아니고 3이닝 후에 다른 사람으로 교체됩니다. 세 명이 한 경기를 할 때도 있고, 예전에는 스컬리가 3회까지 하고 쉬다가 7회에 다시 들어가 경기를 마무리하기도 했습니다.
스컬리가 얼마나 야구 중계를 오래 했는지를 알려주는 가장 극적인 경기가 있습니다. 1956년 월드시리즈 5차전은 미국 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경기였습니다. 1903년에 시작된 월드시리즈 사상 최초이자 그리고 마지막인 퍼펙트게임이 나온 것입니다. 5차전 선발로 나선 뉴욕 양키스의 단 라슨은 브루클린 다저스를 상대로 단 한 개의 안타나 볼넷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실책도 하나 없는 말끔한 수비가 뒷받침되면서 2-0의 퍼펙트게임 승리를 거뒀습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56년 전, 그러니까 한국전쟁이 끝난 지 3년 후에 벌어진 그 경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스포츠 캐스터가 바로 빈 스컬리였습니다. MLB네트워크에서 가끔씩 과거의 명승부 시리즈를 방영하면서 바로 그 퍼펙트게임을 다시 보여주기도 하는데 야구 팬들은 그 경기를 보면서 하나 같이 깜짝 놀라며 동일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 오래 전에 스컬리가 다저스 경기를 중계했다는 사실에 우선 놀라고 또 1956년에도 쩌렁쩌렁하면서도 팬들의 귀에 쏙 쏙 들어오는 편안하고 즐거운 방송을 야구 했던 그가 5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똑같이 명쾌하고 즐거운 야구 방송을 팬들에게 전달하고 있음을 알고는 또 한 번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당시 월드시리즈 중계는 홈팀 캐스터와 원정팀 캐스터나 반씩 나눠서 맡았습니다. 그래서 양키스의 멜 알렌이 그 경기의 전반부를 맡았고 스컬리가 나머지를 맡았던 것입니다. 9회 초 투아웃에서 라슨이 대타 데일 미첼을 서서 삼진으로 잡는 순간 스컬리는 "끝냈습니다!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피칭의 경기를 단 라슨이 이뤄냈습니다. 월드시리즈 역사상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경기입니다. 단 라슨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무실점, 무안타, 무실책, 단 한 명의 주자도 없었습니다. 최종 점수는 양키스가 5안타 무실책으로 2점, 다저스는 무득점, 무안타, 무실책......" 그는 라슨을 다시 한 번 칭찬하고 양키스 팬과 캐스터 멜 알렌에게 보내는 축하 인사를 잊지 않고 코멘트를 마쳤습니다.

< 스컬리는 프로야구뿐 아니라 미국 스포츠 사상 최고의 캐스터로 명성을 떨치며 86세가 되는 2013시즌에도 다저스 경기를 중계할 예정입니다. >

그런데 스컬리가 다저스의 중계를 시작한 것은 그보다 6년 전인 1950년이었습니다. 1927년 11월29일 뉴욕의 브롱스에서 태어난 빈센트 에드워드 스컬리는 23세 되던 1950년에 브루클린 다저스의 라디오와 TV 중계를 시작했습니다. 1958년 다저스가 연고를 LA로 옮긴 뒤에도 팀과 함께 미국 대륙의 동쪽 끝 뉴욕에서 서쪽 끝 LA으로 이주했고 '다저스의 목소리'로 활약했습니다. 프로스포츠 사상 최장기간 한 팀의 스포츠캐스터로 일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야구 명예의 전당과 라디오 명예의 전당 등에도 이미 오래 전에 입성한 멤버입니다. 캘리포니아 올해의 스포츠 캐스터를 28번이나 수상한 것을 비롯해 받은 상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습니다. 또한 20세기 최고의 스포츠캐스터이자 그리고 역대 최고 스포츠캐스터 50명 중에서도 랭킹 1위는 그의 차지였습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스컬리는 맥주와 우편물 배달, 봉제공장 잡역, 펜실베이니아 호텔의 식당 청소 등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포댐 대학을 다니면서 그는 교내 방송 캐스터이자 스포츠 기자로 일하며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라디오의 첫 풋볼 중계를 시작하는 순간 스컬리는 자신의 미래가 바로 방송 부스라는 것을 직감했다고 합니다. 그때가 19세 때였습니다. 학교 사중창단의 멤버였을 정도로 풍성한 목소리를 지녔고 야구팀 중견수를 보기도 했던 그는 졸업장을 받은 후 미 동부 지역의 150개 방송국에 이력서를 보냈습니다. 그중에 딱 하나 워싱턴의 CBS 라디오 지부에서만 답이 왔습니다. 갑자기 빈자리가 생겨 급히 직원을 구하던 참이었습니다.


CBS 라디오 스포츠 국장이던 레드 바버가 그를 뉴욕 본사로 데려가 대학 풋볼의 중계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보스턴 펜웨이파크에서 벌어진 한 풋볼 경기의 중계에서 스컬리는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한겨울에 열리는 풋볼 경기였지만 스컬리는 당연히 실내의 중계 부스를 생각하고 코트와 장갑을 호텔방에 두고 운동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중계석은 운동장 맨 꼭대기의 찬바람이 쌩쌩 부는 노천에 있었습니다. 스컬리는 그러나 전혀 개의치 않고 뜨거운 열정으로 그 경기를 멋지게 중계하자 바버 국장의 신임이 두터워졌고, 평생 그를 이끌어준 멘토가 됐습니다.
1950년 바버가 브루클린 다저스의 라디오와 TV 중계를 맡으면서 스컬리도 선배를 따라가 MLB의 다저스 스포츠캐스터 데뷔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1953년 바버가 월드시리즈 중계 해설료 때문에 스폰서와 분쟁 끝에 스스로 물러나자 스컬리가 처음으로 '폴 클래식'의 중계를 맡게 됩니다. 그렇게 차근차근 전설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앞에도 언급했지만 미국의 고전적인 스포츠캐스터들은 요즘 야구 중계와 확실하게 차별화되는 점이 있습니다. 특히 스컬리처럼 오래 중계를 한 분들은 혼자서 경기를 진행합니다. 그러니까 캐스터와 해설자의 역할을 혼자서 동시에 해내는 것입니다.


그의 중계는 일단 이야기 거리가 너무도 풍성합니다. 선수들의 각종 기록은 기본이고 그 선수의 백그라운드라든지 과거사, 야구 역사, 심지어는 가족사와 사돈에 팔촌 이야기까지 나올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론 너무 경기 외적인 내용이 많다는 불만도 나오지만 대부분 편안하고 즐겁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끝없이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여전히 유머가 넘친다는 것도 스컬리의 강점입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 그렇게 목소리와 체력과 기억력, 그리고 무엇보다 야구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사랑이 넘치는 것을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스컬리는 "선수들이 필드로 뛰어나가고 관중이 열광적인 성원을 보내기 시작하면 내 가슴 속의 무엇인가도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드디어 또 시작이라는 점에 가슴이 벅차온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팀의 순위 따위는 잊어버리고 그 경기를 즐기면서 그 경기만을 전달하는 것이 비법'이라며, 아주 평범하지만 실행은 절대 쉽지 않은 자신의 비결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1955년 월드시리즈 최종전 다저스 우승 경기, 1956년 단 라슨 퍼펙트게임, 1965년 샌디 코팩스 퍼펙트게임 등 노히트 4게임, 행크 애런 715홈런 경기, 1988년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대타 커크 깁슨의 끝내기 홈런 경기(이때 스컬리는 67초간의 침묵으로 팬들에게 순간을 화면으로 느끼게 했습니다.), 1990년 페르난도 발렌주엘라 노히터, 1991년 데니스 마르티네스 퍼펙트게임.......
그가 풀어낸 명승부는 끝이 없습니다. 어쩌면 내년 시즌이 빈 스컬리의 중계를 들을 수 있는 마지막 시즌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우리 스포츠에는 언제나 이런 풍토가 자리를 잡을까 하는 부러움과 함께 85세 빈 스컬리씨의 뜨거운 열정에 경의를 표합니다.

*이 기사는 DUGOUT 매가진에도 실렸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943 두산 코치진 인선은 언제쯤? [1] Hustle두산 2013.12.30 1241
942 양키즈 수니야 2013.01.07 1242
941 강정호, 이장석 대표가 기대하는 MVP의 각오는? [1] Hustle두산 2014.01.07 1246
940 [민기자의 멕시코리그 9.]멕시코와 한국리그를 섭렵한 스타들(2012.03.05) 팀몬스터짐 2013.10.22 1246
939 Mascots Fight & Break Dance Battle 2013.01.05 1246
938 [영상] [프로야구] KIA : 롯데 하이라이트 (08.06) marine4801 2013.08.07 1246
937 [오늘의MLB] (5.3) 추신수 맹활약, 텍사스 4연패 탈출 딥풀업스콰트 2014.05.03 1247
936 야구기초 2 초심 2013.01.04 1248
935 황재균의 희생 플라이로 한 점 더 달아나는 롯데! 리더 2013.03.27 1249
934 [영상] [프로야구] 오늘의 BEST (08.04) marine4801 2013.08.05 1249
933 프로골퍼 배상문! 시구는 부드럽게~ 속구는 선수 뺨치네! [2] 에이핑크빠돌이_미리탱● 2013.11.01 1249
932 [민기자 MLB 리포트]뉴욕 메츠의 몰락과 재기의 안간힘 (2012.09.12) 팀몬스터짐 2013.10.24 1250
931 1타수 1알타.. [2] 알면서왜그래요 2014.05.10 1250
930 [MLB 리포트]2011시즌 전망(2)-변수 투성이의 NL 중부조 김별 2013.09.05 1251
929 [민기자의 MLB리뷰 4월]2011시즌 개막과 위버, 그리고 매니 (2011.11.16) 팀몬스터짐 2013.10.22 1252
928 한화 MLB식 야구장 어떤모습일까?? file 삼대오백 2014.03.10 1252
927 The Jamie Kennedy Experiment - Baseball Dad 2013.01.07 1252
926 [민훈기 Players] '징크스 끝판왕' 롯데 손아섭의 올시즌 승부수! (2013.04.25) 팀몬스터짐 2013.10.24 1253
925 ESPN "벌랜더, 부활 가능성 충분하다" [1] Hustle두산 2013.12.24 1254
924 2012.팔도프로야구 6월13일 수요일 SK vs LG(잠실 ori 2013.01.06 1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