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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은 있지만 관심이 없는 매치?


실바 대 비스핑은 참으로 애매한 매치였다. 10차 방어를 해낸 전 챔피언과 10년 동안 타이틀 문턱에 말뚝 박은 컨텐더가 마주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묵직한 대결이 될 법했으나, 어째서인지 그들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실바는 타이틀을 잃고 정강이 골절이라는 극심한 부상을 입은데 이어 각종 약물까지 적발되며 명예와 지위 모두 바닥으로 추락했으며, 비스핑 역시 최근 눈에 띄는 기량 저하와 9경기 동안 승패를 반복하며 한계를 드러내었던 탓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회 직전 업계에서 가장 뜨거운 남자 코너 맥그리거의 요란한 이슈몰이가 있었고, 국내에서는 새벽 중계라는 치명적인 조건까지 감수해야 했다.

 

-추락하거나, 견뎌 내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선수의 입장에서는-어떤 선수가 경기 하나하나가 중요하지 않겠냐마는-커리어에 있어 너무나 중요한 경기였다. 특히 실바는 이번에 패배할 시 최근 4경기에서 31무효를 기록하게 되어 어쩌면 퇴출까지도 걱정해야 할 수도 있었다. 흔히 이러한 고비에서는 재기와 몰락의 갈림길이라고 표현하지만 솔직히 실바는 재기라기보다 추락을 면한다는 인상이 강했다. 복귀전에서 웰터급의 닉 디아즈를 상대로 보여준 형편없는 경기력은 물론, 심지어 그 경기력까지도 약물의 힘을 빌린 것이라는 게 밝혀졌으며 아직까지 킥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 여실히 보였기 때문이다. 실바의 팬들도 다시 그가 챔피언쉽에 올라갈 만큼의 기량을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적었다. 단지, ‘비스핑 정도는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예상할 뿐이었다.

 

-10년의 도전, 진짜 78


한편 초점을 비스핑에 맞춘다면 그는 기대감을 떠나 이 경기 자체가 정말로 짠하다 못해 처절한 매치였다. 비스핑에게 약간의 호감이라도 있다면 마음 아파서라도 이 경기를 보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앞서 말한 대로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UFC의 정상권에서 활약해 온 비스핑이지만 그에게는 단 한 번의 기회도 없었다. 타이틀전이라는 기회 말이다. 그에게는 일곱 번의 패배가 있는데 이 일곱 번 모두 타이틀전의 길목에서 당한 일격이었다. 더군다나, 이중에서 4명은 약물이 적발되었거나 TRT를 사용하는 등 부정한 파이터였다. 그중에서 비토 벨포트에게는 하이킥을 맞고 망막이 떨어져나가 영구적인 손상을 입는 치명적인 장애를 얻기까지 했다.

 

그러한 그가 기회를 잡았다. 그가 항상 싸우고 싶었지만 항상 그 앞에 가기 직전에 무너지는 바람에 끝내 만나지 못할 것만 같았던 사나이, 앤더슨 실바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비록 현직 챔피언은 아니라지만 7~8년을 그를 목표로 15경기 가량을 치렀으니 그와 싸우는 것 자체가 챔피언에 도전하는 것과 버금가는 도전이 된 셈이다. 하지만 이 실바 역시 비스핑에게 또 다른 악몽을 심어주기에 적합한 선수였다. 약자에게는 한없이 뛰어난 경기력을 보여주지만 자기보다 강하면 사정없이 두들겨 맞는 비스핑의 특성 상, 또한 소위 말하는 약물러들에게 취약했던 비스핑의 경험 상 실바는 너무나 어려운 상대였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기회도 없었다. 지금은 실바가 감각에서도 멘탈에서도 가장 약해져 있을 때, 그리고 약물 검사가 대폭 강화되어 있을 때고 동시에 자신의 기량 하락을 간신히 붙들고 있는 때이기 때문이다. 커다란 기회인 동시에, 마지막 기회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낚으려는 자와 낚이지 않으려는 자


경기는 흥미진진했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끊임없이 접근하는 비스핑과 슬슬 감을 찾으며 특유의 도발을 시전하는 실바. 실바는 첫 라운드 중반 이후부터 현란한 손놀림을 보여주며 도발에 시작했지만 비스핑은 전혀 개의치 않고 차곡차곡 포인트를 쌓아나갔고 큰 임팩트는 없었지만 서서히 라운드를 점유해 나갔다.

 

여기에 의외의 요소였던 것은 비스핑의 펀치였다. 신경의 문제 때문에 오른손이 꽉 쥐어지지 않아 뒷손의 파워가 현저히 떨어지는 물펀치 비스핑이 실바를 펀치로 다운 시킨 것이다. 이것은 1,2라운드를 완벽히 비스핑이 가져가는 열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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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이후의 라운드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3라운드 막판 비스핑이 압박을 당하던 도중 마우스피스가 빠진 것을 어필하다가 플라잉 니킥을 얻어맞는 대참사를 당하고는 페이스가 많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이 장면과 5라운드 프론트킥에 그로기에 잠시 몰렸던 때를 제외하고는 너무나도 소극적이었던 실바에게 돌아갈 점수는 없었다.

 

판정은 결국 1,2,4라운드를 가져간 비스핑의 만장일치 48-47 승리. 비스핑의 출혈이 컸고 실바의 타격이 임팩트가 크긴 했지만 라운드별 채점인 이상 실바의 손을 들어주기는 어려웠다. 판정 논란이 있기도 했지만 해외 매체의 전문가 22명 중 15명이 비스핑, 1명이 무승부를 주는 등 전반적으로 비스핑의 승리가 맞다는 평.

 

-실바, 자신의 영광에 발목 잡히다


경기 종료 이후 서로 존중을 표하며 찡한 장면을 만들어낸 실바와 비스핑이지만 경기 결과에 대한 시각은 조금 다른 듯하다. 실바가 판정에 대한 불만을 표한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행 채점 방식 상 비스핑의 승리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실바는 과연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1,2라운드는 비스핑이 영리하게 잘 풀어나간 라운드다. 그리고 3라운드까지도 그 흐름은 이어졌고 그를 깨부순 것이 바로 그 애매한 상황에서 들어간 플라잉 니킥이었다. 비스핑의 어리석은 판단과 허브딘의 애매한 반응이 섞인 절호의 찬스였고 실바는 무자비하게 그 기회를 잡아냈다. 그리고 이는 비스핑의 급격한 체력 저하를 불러 더욱 큰 찬스를 불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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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바는 이 찬스는 잡지 못했다. 4라운드를 내줘버린 것이다. 플라잉 니킥 찬스도 순식간에 잡아낼 만큼 노련한 실바가 왜 이런 우를 저지른 걸까? 그는 다름 아닌 자기 스타일에 대한 과신 때문이었다. 리치 프랭클린을 공격적인 클린치로 때려잡은 정도만 제외한다면 지금까지 실바는 상대를 도발해 대쉬를 이끌어내고 그에 맞춰 카운터를 집어넣는 스타일로 싸워왔다. 하지만 크리스 와이드먼이 그 도발에 따라 들어가지 않는다면 훨씬 안전하게 경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했고, 이에 따라 타격을 뻗는 회수가 적은 실바의 특성 상 도발에 낚이지만 않는다면 포인트를 야금야금 빼앗길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알려진 셈이다. 더군다나 실바가 정강이 부상 이후 소극적으로 변한 만큼 이러한 경향은 더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포인트 타격의 마스터인 비스핑이 보다 적극적인 타격전을 들고 나오기까지 하면서 실바는 라운드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실바는 작전 변경 같은 것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비스핑에게 넉아웃 타격을 집어넣은 장면을 제외하고는 꾸준히 밀렸으며, 결국 그 타격이 터졌던 3,5라운드만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실바가 승리하기 위한 플레이를 하려면 적어도 3라운드에 큰 데미지를 준 이후부터라도 계속 비스핑을 몰아붙여야만 했었다. 실바 같은 베테랑이 이런 판단 미스를 한 이유가 이런 플레이로 승리하는 데 익숙해져서 이대로만 하면 질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주는 데미지에 취해 판정 기준을 망각한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숙원을 성취한 비운의 사나이


아마 방송을 끝까지 본 시청자라면 경기가 끝나고 나서 눈물을 흘리는 비스핑의 모습이 꽤나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영국 최고의 슈퍼스타로 군림하며 약간의 양아치기믹(?)으로 터프한 커리어를 보낸 비스핑의 눈물이라니. 나름대로 이색적인 장면이니 말이다. 그리고 이 눈물의 의미 역시 팬들에게 와 닿을만한 것이다. 평소에 비스핑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처절한 좌절의 역사를 딛고 10년의 메이저 커리어 끝에 고국에서 정점을 찍은 그의 모습은 충분히 감동적일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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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


오늘 커리어에 있어 큰 반환점을 돌은 두 선수. 이제 앞으로 그들은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먼저 실바는 이로써 3연패를 기록하고 말았다. 아직 일정 수준 이상의 흥행력을 보유하고 있는 만큼 데이나 화이트도 그에게 아직은 호의적이니 곧바로 퇴출을 걱정해야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의 커리어가 이제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여전히 날카로운 타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보여주었지만 대권을 놓고 싸우기는 이제 어려워졌고 그의 플레이가 이젠 분석이 되어버렸다는 것 또한 앞으로 큰 장애가 될 것으로 보인다. 경쟁력은 아직 보유하고 있기에 은퇴하기는 아까우면서도, 동시에 앞으로 가시밭길이 예상되기에 한편으로는 우려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한편 비스핑은 이제 커리어를 확실히 마무리할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이 경기 이전부터 비스핑은 이미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신체 능력 역시 예전 같지가 않았다. 지금 같은 시기에 정점을 찍은 것이 놀라울 정도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목표가 있다. 바로 타이틀샷이다. 앤더슨 실바라는 거물을 잡은 만큼 이제 정말 마지막으로 치고 올라갈 기회이기도 하며, 그에게 남은 마지막 숙원이기도 하다. 동시에 부수적으로는 두 경기만 더 치르면 티토 오티즈의 UFC 27전 기록과 타이, 1승만 더하면 GSPUFC 19승과 타이를 하는 대 기록을 쓸 수 있다. 이미 훌륭한 커리어지만 이를 통해 전설로 자신의 이름을 못 박을 수 있다는 것이다.

 

두 선수 모두 이제 은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은 단계에 진입했다. 하지만 실바는 워낙 큰 영광을 누렸기에 3연패인 지금까지도 아직 잃을 게 많은 입장이고, 뒤늦게 정점을 찍은 비스핑은 커리어의 연장 자체가 당분간은 멋들어진 도전이 될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조금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어쨌든 당분간은 케이지에서 모습을 보일 것임을 약속했고, 오늘 멋진 경기를 펼쳐준 두 선수에게 지금은 박수를 보내야 할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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