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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포럼, 과거에는 그레이트 웨스턴 포럼(the Great Western Forum - GWF)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유서 깊은 경기장은 농구, 아이스하키 등 수많은 스포츠의 성지였고 복싱도 마찬가지였다.

멕시코에 인접한 캘리포니아, 특히 LA는 히스패닉의 인구 비율이 높은 지역이고 이곳에서 가장 이름난 경기장 중 하나인 GWF는 히스패닉 복서들의 성지이자 등용문이었다.

훌리오 세자르 차베스가 이곳에서 로저 메이웨더를 꺾고 WBC 라이트웰터급 벨트를 들어 올렸으며, 마이클 카바할이 이곳에서 움베르토 '치키타' 곤잘레스와 일전을 펼쳤다. 마르코 안토니오 바레라가 젊은 시절 수많은 경기를 치른 곳, '골든 보이' 오스카 데 라 호야가 프로 데뷔전을 치른 곳이 GWF었다.

1999년, 이 경기장을 홈구장으로 쓰던 LA 레이커스와 LA 킹스가 자리를 옮겼다. 2001년 이후 복싱 경기도 무려 10년 이상 이곳에서 개최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12년 중순에 메디슨 스퀘어 가든 측이 수천만 달러의 거액을 투자하여 GWF를 재단장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이곳을 복싱의 성지로 되살리겠다는 뜻 또한 덧붙였다.

재단장한 GWF는 '더 포럼'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고, 유서 깊은 경기장의 부활을 알리는 첫 경기는 5월 17일 후안 마누엘 마르케스와 마이크 알바라도의 경기였다.

더 포럼에서 무려 13년 만에 치르는 첫 경기의 주인공으로 마르케스가 결정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 경기장은 마르케스에게도 특별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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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마누엘과 라파엘 마르케스 형제는 프로 복서인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고,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부터 글러브와 함께 했다. 그러나 복서로서 그리 성공하지 못했던 아버지를 보면서 어른스럽고 영리했던 후안은 장래를 위해 학업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성장한 후에는 회계사 자격증을 취득하게 된다.

프로 복서로 데뷔한 후에도 그는 한동안 복싱과 회계사 업무를 병행했다. 새벽에 일어나 러닝을 하고, 오전 9시에 출근해서 오후 5시에 퇴근하면 체육관에서 다음 시합을 준비하는 고된 일과를 이어나갔다. 시합이 있는 날이면 직장 상사에게 허가를 받은 다음 비행기로 먼 거리를 이동하고, 시합이 끝나면 몸을 추스를 여유도 없이 월요일의 출근을 준비해야만 했다.

환상적인 콤비네이션으로 화끈하게 상대방을 폭격하는 스타일 때문에 '디나미타(Dinamita, 다이너마이트)'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마르케스는 오랫동안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런 힘든 무명 시절을 겪는 동안 그와 함께 한 장소가 바로 '더 포럼'이었다. 멕시코시티를 떠나 미국의 프로 무대에서 시합을 시작한 마르케스는 젊은 시절 더 포럼에서 12경기를 치렀고, 9회의 KO승을 거뒀다.

조용히, 그러나 착실하게 경력을 쌓은 끝에 마르케스는 기회를 얻었고, 세계 챔피언에 등극하여 마르코 안토니오 바레라, 에릭 모랄레스, 매니 파퀴아오와 같은 세계적인 강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마르케스의 시합 무대는 라스 베가스로 옮겨가기 시작했으며 회계사 업무도 그만두고 복싱에만 전념하게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더 포럼은 마르케스가 큰 성공을 거둔 후에도 잊지 못할 추억이 깃든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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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그레이트 웨스턴 포럼에서 경기를 준비하는 젊은 시절의 마르케스)

이번 경기를 주관한 톱랭크 프로모션의 CEO 밥 애럼에게도 더 포럼은 특별한 장소였다. 41년 전 무하마드 알리가 켄 노튼 2차전에서 1차전 패배의 설욕을 씻고 승리를 거둔 장소가 더 포럼이었고, 이 시합을 주최한 프로모터가 바로 밥 애럼이었다. 애럼은 이 복싱의 성지에서 수많은 시합을 주최한 장본인이었다.이 유서깊은 경기장은 시합의 당사자들에게 모두 인연이 깊은 장소였던 것이다.

비록 이번 시합은 경기장 안팎의 '스토리'를 통해 대중의 관심을 모으는 데 성공했지만, HBO와 탑랭크 프로모션의 상황은 좋지 않다. 간판 스타인 매니 파퀴아오는 브래들리 1차전-마르케스 4차전의 2연패 이후 흥행에서 신통치 못한 성적을 거두고 있으며, (PPV 판매량에서 리오스전은 30만~40만 가구, 브래들리 2차전은 70만~80만 가구에 그쳤다고 한다) 히스패닉 팬을 결집시킬 수 있는 차베스 주니어는 탑랭크를 떠나 알 헤이먼과 계약하는 것이 유력한 상황이다. 이들이 파퀴아오-마르케스 5차전에 집착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현 상황에서 가능한 최대의 흥행 카드이기 때문이다.

아마 이번 시합에서 톱랭크 프로모션과 HBO는 선수 당사자만큼이나 마르케스의 승리를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이 시합의 승자는 파퀴아오를 상대로 WBO 웰터급 타이틀전을 치를 것이라고 공언한 상태였다. 사실상 파퀴아오-마르케스 5차전을 위한 준비 무대를 마련해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마르케스의 기량은 40세가 된 지금도 녹록지 않았다. 경기 막판 뒤늦게 시동을 건 알바라도에게 잠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마르케스는 초반부터 경기를 주도했고 8라운드에는 알바라도를 링줄 바깥까지 나가떨어지게 만드는 녹다운 펀치를 선사했다.

경기 후 판정단 스코어카드는 119-109, 117-109, 117-109. 마르케스의 만장일치 판정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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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후 인터뷰를 진행한 HBO의 코멘테이터 맥스 켈러만의 태도는 HBO와 탑랭크의 파퀴아오-마르케스 5차전에 대한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파퀴아오 5차전에 대한 즉답을 피하는 마르케스의 응답에도 불구하고 켈러만은 몇 번이나 끈질기게 이 시합에 대한 마르케스의 의사를 질문했다.

켈러만: 매니 파퀴아오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전에 당신은 이미 파퀴아오에게 KO승을 거뒀기 때문에 더는 시합할 생각이 없다고 하셨죠. 현 시점에서 파퀴아오와 다시 경기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르케스: 우리는 4차전에서 마침내 정당한 승리를 따냈죠. 4차전의 승리는 저를 응원해 준 모든 멕시코인들을 위한 것입니다.

켈러만: 이번 시합은 파퀴아오 5차전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마르케스: (통역과 대화 중)

켈러만: 파퀴아오 5차전을 원합니까? 네, 아니오로 대답해 주세요.

마르케스: 우리는 편안하게 생각할 겁니다. 이 시점에서는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지만 저와 제 가족, 그리고 멕시코의 팬들에게 최선의 방향으로 결정해야겠죠. 지금 당장은 파퀴아오와 시합하는 것에 대해 결정하지 않을 겁니다. 일단 휴식을 취한 다음 천천히 생각해봐야죠.

마르케스는 현재 멕시코에서 4체급 세계 챔피언에 등극한 단 3명뿐인 복서 중 한 명이다(다른 2명은 에릭 모랄레스, 호르헤 아르세). 이제 그의 목표는 멕시코 최초의 5체급 세계 챔피언이다. 


현재 웰터급 세계 챔피언은 다음과 같다. 매니 파퀴아오,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 션 포터. 이 중에서 마르케스가 누구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은지는 자명하다. 비록 파퀴아오 4차전 직후에는 KO승이라는 확실한 목표를 얻고 더 싸울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시합을 계속해서 거절했지만, 파퀴아오가 브래들리를 꺾고 WBO 웰터급 벨트를 되찾은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마르케스에게도 5차전을 치를 이유가 생긴 것이다.

파퀴아오-마르케스의 1,2,3차전은 모두 근소한 차이로 판정이 갈렸지만 마르케스는 한 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1차전 무승부, 2,3차전 파퀴아오 판정승). 마르케스는 이 세 경기가 모두 자신의 승리라고 줄기차게 주장했고 파퀴아오를 꺾기 위해 체급을 이동하는 것도 불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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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만 해도 을의 입장에서 시합을 요구하는 것은 마르케스 측이었지만, 4차전의 KO 이후 상황은 뒤집혔다. 이제 마르케스는 복수전을 원하는 파퀴아오 측과 최대의 흥행 카드를 원하는 HBO, 탑랭크 프로모션을 상대로 여유롭게 협상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역시 마르케스는 현명했다. 그는 끈질기게 확답을 원하는 HBO의 태도에도 흔들리거나 감정에 휩쓸려 성급하게 시합 여부를 확답하지 않았다. 파퀴아오 5차전의 협상에서 마르케스는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5차전의 대진료는 알바라도전의 열 배 이상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마르케스는 알바라도전에서 대진료 140만 달러를 수령했다)

15년 만에 더 포럼으로 되돌아온 마르케스는 기나긴 무명 생활을 보냈던 그 시절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4체급 세계 챔피언, 매니 파퀴아오를 꺾은 남자가 되었고, 이제는 천만 달러가 넘는 대진료도 그에게는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마르케스는 여전히 자신을 잊지 않고 더 포럼을 찾아온 12,601명의 팬들에게 예를 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저는 이 경기장에 모인 여러분에게 선물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복싱의 역사에, 그리고 이 경기장의 역사에 기품을 더해줄(dignifies) 선물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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